***풍경소리/불교와 자연과학

과학으로 보는 불교의 중심사상

slowdream 2007. 10. 8. 01:28
 

과학으로 보는 불교의 중심사상


양형진

(yangh@korea.ac.kr)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 졸업. 인디아나 대학교 물리학 박사.

신시내티 대학교 박사 후 연구원. 매릴랜드 대학교 교환교수.

현재 고려대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 교수 겸 정보보호대학원 겸임 교수.

저서로 < 산하대지가 참 빛이다-과학으로 보는 불교의 중심사상>

역서로 <과학의 합리성>(양형진-조기숙 공역),

<놀라운 대칭성>(양형진-염도준 공역)이 있다.



1. 과학 시대의 불교


오늘날 우리는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 혁명에서 시작하여 산업 사회와 후기 산업 사회를 거쳐 이제는 정보화 시대에 이르렀고, 기초 과학은 소립자의 극미의 세계에서 우주 저쪽의 극대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인간 지식의 지평을 넓혀 놓았다. 러셀이 철학이란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종교와 윤리의 견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적 탐구의 결과라고 하였듯이, 이러한 자연과학은 철학과 세계관에 영향을 주면서 상호 역동적으로 발전하여 왔다.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마젤란의 항해, 다윈의 진화론 등에서 비롯된 세계관의 변화는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상에 젖어 있던 서구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또한 뉴턴은 과학을 이용하여 신의 존재 혹은 신의 섭리를 증명하려 하였고, 엥겔스는 《자연변증론》에서 자연과학의 견고한 기반 위에 변증법적 유물론의 제법칙을 구축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역사의 궤적은 자연에 대한 이해가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으며, 자연의 이해에 기반하여 세계관을 구축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관이나 철학은 이처럼 자연과학이 제시하는 세계 이해를 통해서만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학이 제공하는 삶의 기반에 의해서도 또한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과학 시대를 사는 오늘날의 우리는 삶의 양식은 물론이고 삶의 정신적 기반마저도 과학의 산물과 과학의 세계상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과학이 제시하는 세계상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삶을 고양시켜 줄 수 있는 세계관을 찾는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는 뉴턴과 엥겔스 시대에 가능하였던 미숙한 자연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현대의 성숙한 자연과학이라는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바탕으로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훌륭한 세계관을 마땅히 구축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아주 다르다. 오늘의 우리는 우리 문명이 지니는 모순에 대해 그 반성적 기초를 지니고 있지도 못하고, 이러한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적 배경 속에서 서구 문명과 여러 면에서 그 맥락을 달리하는 동양적 세계관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불교의 세계관은 여타의 다른 종교와 달리 자연과학의 성과와 모순되지 않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정합적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물론 전 우주적 진리가 하나의 통일적 전체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에 대한 여러 표현은 물론 서로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 속에서 자연과학의 세계상과 종교적 세계관이 서로 모순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던 것이 또한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험과 관찰을 기반으로 하는 자연과학의 세계 이해가 오직 명상만으로 이룩해 낸 불교적 세계관에 접근해가고 있다는 경험은 우리에게 불가사의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자연과학이 인류가 이룩해 낸 그 어떤 지적 작업보다도 자연세계에 대해 신빙성 있는 설명을 제공해 주는 것이라면, 그리고 불교의 세계관이 우주적 진리를 바탕으로 하여 전개된 것이라면 그 둘은 마땅히 정합적인 체계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불교와 과학은 아주 이질적인 것처럼 보인다. 불교의 궁극적 관심은 태어나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안고 있는 존재론적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혹은 그로부터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불교에서는 이 존재론적이며 근원적인 해방을 해탈이라고 한다), 자연과학의 관심은 자연세계를 어떻게 더 잘 이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를 어떻게 잘 응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이나 주제도 무척 달라 보인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20세기 이후에 자연과학의 세계 이해의 성과가 불교의 세계관에 접근하여 간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일체의 사물이 서로의 연관성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현대 과학의 성과 위에서 가능해진다. 이는 곧 불교에서의 연기론(緣起論)에 기초한 세계관을 자연과학이 예증해 주고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불교 공부를 한 사람이 현대 과학이 제시하는 세계상을 보거나 현대 과학을 공부한 사람이 불교의 세계관을 볼 때, 이 두 세계 사이에 놀라운 연관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마치 큰 산을 오르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을 때, 그 각각의 길이 서로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길이 하나의 같은 산 안에 품어지는 것과 같다. 두 길을 따로 오르는 사람들은 정상에 다다르기까지 그들이 같은 산을 오른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도 있지만, 정상에 이르고 나면 같은 산을 올랐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불교와 과학은 산에 오르는 방법 자체를 아예 달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헬기를 타고 산 정상으로 가는 방법과 밑에서부터 한 걸음씩 걸어서 정상에 이르는 방법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이 글에서는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을 자연과학의 세계상을 통하여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2. 연기론에서의 인과와 상의성


일체의 존재가 인연에 의하여 생한다는 것을 인연생기(因緣生起) 혹은 줄여서 연기(緣起)라고 한다. 부처님 교설의 기초인 연기는 대략 시간적 인과성, 시공간적 상호 연관성, 인식 주관과 객관의 상호 작용에 의한 세계 인식이라는 세 가지의 기본적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 연기는 ‘피연생과(彼緣生果)’ 즉 인연(因緣)에 의하여 결과가 생긴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인(因)은 직접적 원인이고 연(緣)은 간접적 원인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 예가 되는 것이 씨앗에서 싹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인데 여기서 씨앗이라는 직접적 원인은 인(因)이 되고 흙, 물, 기후 등의 제반 조건인 간접적 원인은 연(緣)이 된다. 이러한 연기설은 모두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고 저것이 생하므로 이것이 생한다. 저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고,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이 멸한다’라는 생성와 소멸의 인과 관계를 기본 형식으로 한다.


씨앗과 싹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교 연기론에서의 시간적 인과성은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나는 전후 사건의 인과적 연관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원인이 결과를 앞지를 수 없다는 과학이나 철학 일반에서의 인과율의 조건을 만족시킨다. 그러나 일반적 인과론과 다른 점은 연(緣)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인(因)만에 의하여 과(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연이 인과 화합하였을 때 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인만에 의하여 과가 생긴다거나 인 없이 과가 생긴다는 것은 모두 외도의 견해이다. 그러므로 시간적 인과성이라는 연기론의 첫번째 의미에서도 다음에 살피고자 하는 상호의존성의 개념이 이미 들어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무수한 인과 연의 화합에 의하여 과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연기론을 다른 인과론과 구분짓는 특성이다.


연기론의 두번째 의미는 상호 의존성 줄여서 상의성(相依性)인데, 이는 연기론의 핵심적 의미로서 원시 불교에서 중관 사상을 거쳐 화엄종과 천태종, 선종 등의 대승 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 사상의 중핵을 이루는 것이다. 보통의 인과론이 ‘저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고 저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다’는 시간적 인과 관계를 의미하는 것인데 비해, 상의성은 ‘저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고 이것이 있을 때 또한 저것이 있으며, 따라서 저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고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또한 없다’는 것으로서 이것과 저것이 서로 의지하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보통의 인과론이 이것과 저것 사이의 시간적 선후 관계에 주목하여 이를 비대칭적으로 다루는 데 비해, 연기론은 이것과 저것 사이의 상호 의존성에 의한 대칭적 관계까지 포함하는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유명한 비유가 《노경》에서의 갈대 묶음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는 “세 개의 갈대가 땅에 서려고 할 때 서로서로 의지하여야 서게 되는 것과 같다. 만일 그 하나를 버려도 둘은 서지 못하고 또한 둘을 버려도 하나는 서지 못하듯이 서로서로 의지하여야 서게 된다”고 하였다. 물 분자가 물의 성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산소 원자와 두 개의 수소 원자가 서로 의지하여야만 가능하다는 것과 같다. 자연 세계에서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 세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꾸려 나가는 사회 안에서도 그렇다.


내가 선생인 것은 학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요소들과의 인연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어서 그러한 여러 요소에 의지하여 있다. 내가 제자인 것은 스승에게 의지하는 것이고, 내가 자식인 것은 어버이에 의지하는 것이고, 내가 남편인 것은 부인에게 의지하는 것이며, 내가 어버이인 것은 자식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자연 세계이든 인간 세계이든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든 존재는 그러한 상호연관성으로 비로소 성립한다는 것이 연기론의 상의성의 내용이다.


상의성이라는 개념에서 특히 주목하여야 할 것은 세 개의 갈대가 서로 의지함으로써 비로소 서 있을 수 있게 되는 ‘갈대의 묶음’이라는 존재는 ‘하나의 갈대’ 셋이 단순히 모인 것 이상의 어떤 존재라는 점이다. ‘하나의 갈대’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갈대의 묶음’이라는 존재가 그 자체로서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의 하나 하나를 아무리 따로 분석해 보아도 그들이 서로 의지함으로써 성립되는 물분자가 그 자체에서 드러나지는 않는다. ‘물’이라는 존재나 ‘물’이라는 관념이나 ‘물’이라는 명칭은 개개의 원자가 서로 의지한다는 인연의 성립에 의해서만 비로소 드러날 수 있는 존재이고 관념이며 명칭이다.


경에서는 이를 ‘바퀴’ 등의 부분이 모여 ‘수레’를 이루게 되는 경우로 설명하고 있다. ‘바퀴’ 등의 부분이 모이는 인연과 ‘바퀴’ 등의 부분이 서로 의지하는 인연에 의하여 ‘수레’라는 존재가 드러나게 되고 ‘수레’라는 관념이 생겨나게 되며 ‘수레’라는 명칭이 붙여지게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호 의존의 관계는 생명체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생각되는데 이른바 심장, 혈관 등이 모여 순환기관을 이루고 다시 뇌신경기관, 순환기관, 호흡기관, 소화기관 등이 모여 개체 생명을 이루는 경우는 좋은 보기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한 제 요소가 화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인연이 성립함으로써 ‘나’라는 신체와 명칭과 관념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성립된 개체생명은 다시 그들 사이의 상호의존이라는 인연에 의해서만 생명현상을 유지할 수 있으니, 개체생명이 없는 생체기관을 생각할 수 없듯이 전체 생명(온생명)이 없는 개체생명도 또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연기론의 두번째 의미는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상호연관성이다.



3. 연기에 의해 나타나는 세계


연기론의 세번째 의미는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 우리의 마음속에 어떻게 그려지는가 하는 인식 과정에서의 연기에 관한 것이다. 즉, 연기론은 주관이 대상 세계를 어떻게 그려내는가, 즉 객관인 대상이 주관인 우리에게 와서 부딪히면서 객관의 경계가 주관의 인식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까지를 포함한다. 이는 세계에 대한 관념이 나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결과, 세계가 나에게 어떻게 구성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오감에 관한 문제를 다루기 전에 뜰 앞의 잣나무가 움직이는지의 문제를 먼저 생각해 보자. 이를 물리적으로 표현하면 잣나무의 속도가 얼마인가 하는 문제가 될 터인데, 일반적으로 벡터량은 좌표변환에 의하여 그 값이 따라 변하는 것이므로 물체의 속도라는 물리량은 그 물리량을 관측하는 사람의 운동 상태가 규정되지 않고서는 정의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뜰 앞의 잣나무가 정지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지구 표면을 그 기준으로 암묵적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것만을 감안하더라도 매 초당 30km의 속도로 움직인다고 하여야 할 잣나무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서 있는 것으로 단정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언제나 그 잣나무와 같이 움직여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 나무는 그곳에 절대적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의 연관, 나와의 인연 속에서 오직 상대적으로 서 있을 뿐이다.


이제 오감의 인식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우선 시각과 관련하여 무지개가 왜 생기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여 보자. 일반물리학 교과서에 나오는 굴절과 반사, 서로 다른 파장의 빛의 굴절률의 차이라는 물리학적인 설명만으로는 무지개가 왜 생기는지에 대한 설명이 완결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려고 한다. 이러한 설명은 우리의 시각 기능이 현재와 같은 상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우리의 시각 기능은 우리뿐 아니라 우리의 가까운 조상들까지 그러한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의 시각 상태를 전제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너무도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곱 가지 색의 무지개가 우리 눈에 나타나는 이유는 앞에서의 물리학적인 이유에 더하여, 우리가 빨간색에서부터 보라색에 이르는 빛을 감지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빛만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적외선이나 자외선을 감지할 수 있다면 무지개는 7가지 이상의 색으로 보일 것이다. 또 빨간색만을 감지할 수 있다면 무지개는 빨간색만으로 만들어진 원호가 될 것이다.


더 극단적인 예로 우리가 하늘색만을 감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늘색과 무지개를 구별하지 못하여 무지개라는 현상을 감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시각에 관한 예가 되지만 다른 종류의 감각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바닷물이 왜 짠가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바닷물에 오랜 기간동안 무기염류가 농축되고 그 중에서 염화나트륨이라는 성분이 짠맛을 내게 한다는 것만으로는 바닷물이 왜 짠지에 대한 설명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이에 더하여 우리가 염화나트륨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설명이 추가되어야 한다. 청각의 경우에도 가청주파수의 음만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가령 초음파와 같은 파동은 우리 주위에 아무리 많이 있어도 들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우리가 듣는 소리의 세계는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세계로 한정되어 있다. 촉각의 경우에도 우리가 매끄럽다고 느끼는 물질의 표면이라도 그 자체가 매끄럽다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매끄럽게 느껴지는 표면이라도 그 표면의 원자 배열은 설악산의 바위 능선보다도 더 요철이 심하다.


이제 이상에서의 개별 감각에 대한 논의를 종합하여 보자. 공중에 떠있는 물방울과 태양 광선, 광선의 경로에 대한 물리 법칙만으로 무지개에 대한 설명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아무리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을 분석한다 하여도 그로부터 무지개의 본성을 발견할 수는 없다. 이 물방울은 변하지 않는 무지개의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방울에는 무지개의 자성이 없지만, 여러 가지 제 요소가 무지개가 나타날 수 있게끔 조성됨으로써, 즉 모든 인연이 어우러짐으로써 무지개라는 현상이 나타나고 무지개라는 관념과 무지개라는 명칭이 생겨난다. 어떤 물질의 표면이 매끄럽다는 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끄럽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제 인연의 어우러짐으로 우리는 그 물체를 매끄럽다고 느끼게 되고, 매끄럽다는 관념과 매끄럽다는 명칭을 얻게 된다.


감각 경험은 그 대상이 그러한 감각 경험의 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각 경험이 나타날 수 있게끔 우리의 신체와 그 대상, 그리고 물리법칙과 같은 그 외의 모든 요소(세계의 존재 방식)가 화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식 세계는 객관 세계에 의하여 일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객관이 주관에 와서 부딪쳐 상호연관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물리학에서 관찰자가 기술하는 객관 세계의 운동 상태가 나의 운동 상태에 의하여 규정되듯이, 감각 경험을 바탕으로 내 마음이 그려내는 객관의 세계 또한 내가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느냐에 의해 나의 마음속에 그려지게 된다.


그래서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라고 하였다. 색도 소리도 향도 맛도 감촉도 그리고 모든 대상도 거기에 우리가 아는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색과 소리와 향과 맛과 감촉과 대상이 없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주관과 대상이라는 객관의 끝없는 무한한 어우러짐에 의하여 색과 소리와 향과 맛과 감촉과 대상이 나에게 나타난다. 주관과 객관 사이의 이러한 어우러짐, 주관과 객관 사이의 이 영원한 율동이 바로 인식 세계에서의 연기이다.


우리의 오감에 대한 과학 교과서에서의 설명은 인식 주관에 대한 것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그건 철저히 객관주의의 입장이다. 이와 반대로 사유하는 정신을 통해서만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보는 버클리는 관념론의 입장에 선다. 그에게 있어서는 무지개를 보는 정신과 무지개라는 관념만이 실재한다. 이와 달리 우리의 인식에 나타나는 일체의 모든 것이 주관과 객관의 인연의 화합이라는 중도적 입장이 연기론적 시각이다. 대상으로서의 6경(境)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인식 주관으로서의 6근(根)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6근과 6경의 화합에 의하여 6식(識)이 나타난다는 것이 인식에 대한 연기론이다.



4. 연기와 공, 화엄


인과성과 상의성의 의미를 지니는 연기론은 모든 존재가 그 자신의 변하지 않는 스스로의 성질 즉, 자성을 가지고 남과는 상관없이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의 끝없는 어우러짐에 의하여 비로소 성립되고, 또 서로가 서로에게 끝없이 의존한다는 것이다.


물리 세계의 경우 소립자들이 모여 양성자나 중성자를 이루고 그들이 모여 원자를 이루며 원자가 모여 분자를 이루고 그 분자들이 모여 생명체를 포함한 갖가지 물체를 이룬다. 또 그런 것들이 모여 천체를 이루고 그 천체들이 모여 우주를 형성한다. 이렇듯 여러 단계가 있고, 각 단계마다 실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어느 것 하나 불변하는 고정된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같은 양성자라도 어떤 때는 수소 원자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산소 원자가 되기도 한다.


이를 불교에서는 ‘모든 사물이 다 무아’, 즉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한다. 여기서 ‘아’는 범어 ‘아트만(Atman)’을 음역한 것으로서 곧 불멸하고 불변하는 실체를 가리킨다. 이렇듯 우리 세계를 구성하는 (생명체를 포함하여) 모든 존재가 그 자신의 특수한 자성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본성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무아(無我)이다.


이렇게 무아이고 무실체적인 것들이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인연의 모아짐에 의하여 나타났다가 그 인연의 흩어짐에 의하여 사라지니, 우리 우주에 변하지 않고 항상 같은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란 없으므로 무상(無常)이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자는 공간적으로 무아요 시간적으로 무상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연기론의 관점이다.


이렇듯 일체의 현상과 사물이 본래 그 자리에 그런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제 요소가 화합하는 인연에 의하여 나타나므로, 거기에 어떤 실체가 있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그 본성이 공하다. 그래서 모든 존재를 공(空)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연기는 곧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이며 공(空)이다.


여기서 존재자, 즉 색이 공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공이란 무아·무실체적인 것들의 인연의 어우러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이란 색이 아무 것도 아니라거나 혹은 색인 것으로 보이는 무엇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듯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없다는 허무적멸의 의미가 아니다. 또, 지금은 여기에 색으로서 존재하는 듯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은 무화할 것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그리고 색이라는 현실 세계가 있고 이와 동떨어진 어떤 다른 세계를 상정하여 이를 공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색이 공하다는 것은 모든 색이 오직 연기에 의한 것이므로 색의 성품 그 자체가 공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색성공(色性空)이라 한다. 무지개가 공하다는 것은 무지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무지개가 결국은 사라지리라는 것도 아니다. 무지개가 나에게 나타나지만 그것은 오직 인연의 어우러짐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므로 그 성품이 공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색을 떠나 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색의 성품 그 자체가 공하고 따라서 색 그 자체가 공한 것이므로 이를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한다. 색의 세계가 현실의 세계이고 공의 세계가 깨달음의 세계라는 등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불교를 크게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불교는 현실의 세계를 떠나 존재하는 초월적 실재나 초월적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영원한 본체, 상주하는 개체적 자아, 불멸의 영혼, 창조자 등을 상정하지 않는다. 오직 끝없이 전개되는 연기의 망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알아 본 연기와 공의 세계관 안에는 화엄의 세계관의 모든 것이 이미 다 들어 있다. 법계의 모든 사물이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면,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다른 존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다른 갈대의 도움 없이 하나의 갈대가 서 있을 수 없듯이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의 도움, 다른 존재와의 인연으로 비로소 성립되고 유지된다. 이것은 저것이 있음으로 비로소 존재할 수 있고, 저것은 이것이 있음으로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저것에게 빛과 생명을 주며, 저것은 이것에게 또한 빛과 생명을 준다. 무한히 중첩되는 연기의 (생명의) 그물망이 펼쳐져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화엄에서는 화장세계라고 부른다. 무진한 연기의 망이 펼쳐져 있음으로 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빛과 생명을 준다는 것은 그 세계의 모든 존재가 자성이 없이 공하여 연기의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그러므로 연기가 아니라면 공도 화엄도 없고, 화엄이 아니라면 연기도 공도 없다. 그래서 연기는 곧 공이고, 연기는 곧 화엄이며, 공은 곧 화엄이다.


스스로 혼자 존재할 수 없는 무실체적인 존재자가 서로 의지하는 것을 화엄에서는 상입(相入, mutual penetration)이라고 한다. 이는 흔히 사면이 거울로 둘러 쌓여 있는 방의 가운데에 놓여 있는 횃불의 모습에 비유된다. 그러면 한 거울 속에 다른 거울의 상이 들어오게 되어 무수히 많은 횃불의 상이 거울에 비추어지게 된다. 이때 한 거울에 다른 모든 거울의 상이 들어와 서로 합쳐져서 그 모든 상들이 서로 교차하지만 하나 하나의 상이 다른 상의 형성을 방해하지 않게 된다. 거울에 나타나는 무수한 상들이 서로 합쳐지듯이 우리 세계의 모든 존재자가 서로 영향을 주지만, 하나의 상이 다른 상의 형성을 방해하지 않듯이 하나의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의 있음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입의 예로서 뉴턴의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천장에 달려 있는 하나의 전등에 적용하여 보자. 이 전등에 지구의 중력이 작용하고 있음에도 이 전등이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전등을 천장이 들어올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천장이 전등을 들어올려 주고 있는 만큼 전등은 천장을 끌어내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장이 내려앉지 않는 것은 천장을 집의 벽면과 기둥이 받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천장이 집의 벽면과 기둥을 천장이 끌어내리고 있지만 벽면과 기둥이 내려앉지 않는 것은 …… 이와 같이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무한히 계속하여 적용하면 하나의 전등이 천장에 걸려 있기 위해서는 전 우주가 동시에 이 사건에 참여하여야 한다. 이 전 우주적 상호 참여, 전 우주적 상호 투영을 상입이라 한다. 하나의 전등이 천장에 붙어 있다는 이 간단하게 보이는 사건도 상입이라는 끝없는 연기에 의하여 비로소 성립된다. 여기서는 작용과 반작용의 예로 상입을 살펴보았지만, 이 우주의 어느 것도 상입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상입의 예는 우주의 입자 수보다 많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있게 하는 세계는 참으로 평등한 세계이다. 이를 화엄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는지 알아보자. 불교에서 경전의 명칭은 보통 그 경전의 내용을 암시하는데, 《화엄경》은 ‘대방광불화엄경’의 약칭으로서 ‘잡화경(雜華經)’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원래 경의 이름이 ‘대 방광 불타 잡화 엄식 경(maha?vaipulya buddha ganda vyuha sutra)’이기 때문이다. 잡화 엄식이란 여러 가지 꽃이 섞여서 부처의 세계를 장엄하게 장식한다는 뜻이다. 이때의 꽃은 물론 부처의 꽃이다. 부처의 출현은 한량없는 인연과 한량없는 사실로써 성취되니, 한량없는 부처의 마음과 한량없는 부처의 몸이 온 세상에 두루한다는 것이다. 온 세상에 두루 있으니 사실은 부처라고 특별히 이름 붙일 것도 없다.


이름에 그리 집착할 필요는 없다. 특히 한량없는 몸으로 온 세계에 두루하니 부처의 꽃은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래야만 비로소 장엄하게 된다는 것이 화엄의 세계 이해방식이다. 잡화 엄식이라고 해서 이에 의해 이루어지는 세상이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주 작은 이름 없는 꽃이라도 이 세상의 모든 다른 것을 있게 하는 자신의 역할을 다 하기 때문이다. 장미나 백합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는 결코 장엄한 세계가 아니다. 장미와 백합에 수많은 이름 모를 꽃과 풀이 한 덩어리가 되어야 비로소 장엄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잡화 엄식이고 이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평등이다.


천동설에서처럼 지구가 물질 세계의 기하학적 중심에 위치하여야 지구가 역사 전개의 주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생물은 오직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여야 인간이 역사의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 과학은 지구와 태양만이 아니라 우리 은하도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주의 기하학적 구조 때문에 우주의 어느 곳에도 중심이라고 할 만한 곳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중심이 있어야 한다면 우주의 모든 부분이 다 중심이다.


그들이 모두 중심이고 그들이 모두 주인공이다. 나는 너를 있게 하기 때문에 주인공이며 너는 나를 있게 하기 때문에 주인공이다. 자신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이 우주의 일원이 되었을 때 그 모두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주인공이라는 것이 화엄의 세계 이해 방식이다. 그것이 참으로 평등한 잡화 엄식이다.

이러한 평등의 세계를 화엄에서는 인다라망으로 상징한다. 인다라망이란 제석천궁에 걸려 있는 그물인데, 하나 하나의 그물코마다 보배 구슬이 달려 있다고 한다. 그 구슬의 각각은 서로 서로 빛을 비추어 각각의 구슬에는 다른 모든 구슬의 영상이 첩첩이 나타난다고 한다. 무한한 수의 보배 구슬이 서로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니, 그것은 무한한 연기의 그물 속에서 어느 하나만이 빛나는 세계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빛나는 세계, 모두가 서로에게 빛과 생명을 주는 세계, 그러므로 모두가 중심이고 모두가 주인공인 세계를 상징한다.



5. 윤회와 환생


오직 끝없이 전개되는 연기의 망이 있을 뿐, 영원한 본체나 상주하는 개체적 자아, 불멸의 영혼, 창조자 등을 상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윤회나 환생 등의 개념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윤회의 개념은 인도의 전통 사상이나 우리의 토속 신앙 등이 그 중심축을 이루는 것이며 상당히 많은 부분이 비불교적이고 세속적으로 윤색되어 있으므로, 그 자체를 불교의 중심사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일반인이 불교와 관련하여 먼저 떠올리는 단어가 윤회나 환생이기 때문에, 불교의 중심사상과 관련하여 윤회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윤회란 상사라(Sam.sa?a)의 역어인데 이는 삶의 한 형태가 삶의 다른 형태로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윤회라고 하면 사후에 영혼이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상사라에는 이런 의미가 없다. 상사라란 생명의 물결, 생명의 파동과 같은 것이다. 물리학에서의 파동이 물질 자체가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매개로 하여 에너지가 전해지는 것이듯, 윤회란 불변하는 영혼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삶의 진동이 다른 삶의 진동에 영향을 주며 이러한 영향이 끊임없이 순환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윤회와 인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와 관련하여 미린다 왕은 나선(那先) 스님에게 죽어 없어진 자와 다시 태어난 자가 동일한지의 여부를 물었다. 죽은 자와 태어난 자가 동일하다면 (영혼을 포함하여) 생명체의 자성을 상정하는 것이어서 무아설과 모순되며, 죽은 자와 태어난 자가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면 윤회와 인과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결국 이는 윤회설과 무아설이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물어본 것이 된다.


이에 대해 나선 스님은 “짜낸 우유가 굳은 우유가 되고 이것이 다시 버터가 될 때 그 각각은 동일한 것도 아니지만 굳은 우유나 버터는 우유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어린아이와 어른은 동일하지 않지만 어린아이가 자라 어른이 된다. 이와 같이 생겨나는 것과 없어지는 것은 별개의 것으로 보이지만 지속(순환)된다. 이리하여 존재는 동일하지도 않고 상이하지도 않으면서 최종 단계의 의식으로 포섭된다.”고 답하였다.


짜낸 우유와, 굳은 우유, 버터가 동일한 것도 아니지만 서로 연관되듯이 어린아이와 어른도 동일하지 않지만 서로 연관되듯이 그러므로 그 모두가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단절되는 것도 아니며(不常不斷) 서로 동일한 것도 아니고 서로 다른 것도 아니듯이(不一不異), 윤회 역시 불상부단하고 불일불이한 중도라는 것이다.


불교의 근본 사상은 무아이고 무상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실체는 그것이 어떤 것이라도 인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몸과 마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몸은 마음에 의지하여 있고 마음은 몸에 의지하여 있으므로, 몸과 독립하여 그 스스로 혼자 존재할 수 있는 마음이란 불교에서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영혼이 몸을 따라 돌아다닌다는 생각은 우리의 토속 신앙이나 고대 인도 사상의 하나이기는 하겠으나 불교와는 전혀 관련 없는 소박한 믿음일 뿐이다.


일체의 존재가 인연에 의하여 생하지만, 인연은 존재자로 이루어지는 전체 세계의 내부에서 형성된다. 존재자에 의해 인연이 만들어지고 인연에 의해 모든 존재자가 나타나므로, 개개의 존재자는 전체에 의해 형성되는 결과임과 동시에 전체를 형성하는 원인이 된다. 이렇게 존재자와 인연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상호 역동적인 관계에 놓여 있으므로, 존재자에 의해 구성되는 세계는 스스로를 창조하고 유지해 나가는 전체이다. 이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불교의 세계관에서는 법계를 벗어나 존재하는 초월적이거나 신비적인 어떤 것에 관심을 갖지 않으며 그러한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불교의 기본적 관점에서 윤회를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부처님은 《전유경(箭喩經)》에서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신다.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 의사를 청하여 치료하려고 하지 않고, 독화살을 누가 쏘았는지 혹은 화살이나 화살깃, 화살촉, 활줄, 화살통 등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알려고 한다면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목숨을 마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영원한가 아니면 영원하지 않은가 혹은 세상은 한정이 있는가 한정이 없는가 등의 허망한 물음에 매달린다면 그것을 알지 못한 채 목숨을 마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논의한 윤회나 환생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러한 물음에 대해 오직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침묵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이치에 맞지 않고 법에 맞지 않으며, 또 범행의 근본이 아니어서 지혜로 나아가게 하지 않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으며,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사성제를 한결같이 설하시는데, 이는 “그것이 이치에 맞고 법에 맞으며, 또 범행의 근본이어서 지혜로 나아가게 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하며,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다른 곳에서도 물론이지만 윤회와 관련해서도 깊이 새겨보아야 할 부분이다.


내가 다음 생에 어디에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지혜로 나아가게 하는 것도 아니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도 아니며,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도 아니다. 지옥의 세계도 천상의 세계도 오직 인연의 화합에 의한 것일 뿐이어서 그저 잠시 그럴 뿐이다.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설령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인연이 다하고 나면 그 뿐이니, 그것이 깨우침에 이르는 한 방편이 될 수는 있겠지만 결코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다.



6. 중도


모든 것이 인연의 화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무아이고 무상이며 공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모든 대상 즉 색은 다양하게 우리에게 나타나므로 차별이요 무아와 무상, 공은 모든 것에 동일하게 나타나므로 평등이다. 그런데 색즉시공이란 차별이 곧 평등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차별과 평등이라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하나로 종합되는 것을 회통(會通)이라 한다. 이렇게 대립되는 개념이 화해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색의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다.


색의 성품 그 자체가 공한 것이므로 색을 떠나 공이 따로 존재하지 않아 색 그 자체가 공한 것이어서 색즉시공이니, 차별 즉 평등이다. 또한 일체의 사물이 연기공에 의한 것이므로 공을 떠난 색이란 있을 수 없어 공즉시색이니, 평등 즉 차별이다. 이렇게 어느 한 변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중도(中道)라고 한다. 불교 철학의 핵심인 중도를 불생불멸을 통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불생불멸이란 물론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생명체를 포함하여 우리 주위의 모든 사물은 때로는 생겨나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멸하여 사라지기도 하는데 왜 불생불멸이라 하는가? 내가 과거 언젠가 태어났는데 그건 생이 아니고 나는 언제가 죽게 될 텐데 그건 멸이 아닌가? 이를 과학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물리학은 물질의 궁극적인 요소를 한 때는 원자라고 생각하였고 그 다음에는 양성자와 중성자 등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이제는 양성자와 중성자도 다시 수없이 많은 미립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미립자들의 전형적인 수명은 불과 10∼23초에 불과하니, 이처럼 순간에 생하고 순간에 멸하는 이 미립자들이 고정된 본성 즉 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성을 가지지 않는 이러한 무수한 미립자들의 생과 멸이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는 것이 원자 내부 모습이다. 한 미립자의 생은 곧 그 자신의 멸로 이어질 뿐 아니라, 다른 미립자의 생과 멸에 관계한다.


하나의 입자는 다른 입자의 원인이며 다른 입자는 하나의 입자의 원인이 된다. 입자의 생은 입자의 멸의 원인이 되며 입자의 멸은 입자의 생의 원인이 된다. 하나의 입자와 다른 입자 그리고 그들의 모든 생과 모든 멸은 이처럼 동시적으로 함께 존재하며 상호 연관되어 있으니 서로가 서로에 대해 역동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원자 내부에 존재하는 모든 미립자들, 그들의 모든 생과 멸은 그 어느 하나도 빠짐없이 관계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변환의 과정일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는 불생불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생멸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생멸을 떠나서 불생불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멸의 과정 그 자체가 불생불멸이라는 것이 불교의 관점이니 우선 생멸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 그러한가? 하나의 입자가 우리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무언가가 없어진 것은 아니며, 하나의 입자가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고 해서 무언가 없던 것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나타난다는 것은 인연의 모아짐으로 형성된 것뿐이며 사라진다는 것은 인연의 흩어짐으로 분해된 것뿐이다.


마치 성간 물질이 모여 천체를 이루면서 우리 앞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연을 따라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는 오직 연을 따라 그렇게 나타나 보이는 것 즉 성간 물질이 천체로 변환된 것뿐이지 전에 없었던 것이 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니 생하는 것이란 없다. 우리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이렇게 여러 가지 수다한 연으로 이루어지는 것뿐이지 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 다시 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으니 불생불멸이라 한다.


이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멸은 끝없이 연관되는 끊임없는 변환의 과정, 즉 연기의 과정일 뿐이어서 그 어느 순간에도 생겨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다. 다만 낮과 밤이 바뀌면서 태양이 나타나고 사라지듯이 우리 눈에 무언가가 나타나고 사라질 뿐이다. 질량과 에너지가 보존되면서도 물질계의 그 많은 변화가 가능한 것은, 단지 나타나고 사라질 뿐 생이나 멸은 본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겨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지만 우리의 앞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생멸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공이 색을 떠나 있지 않듯 불생불멸이 생멸을 떠나 어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생멸하는 것이 연기요, 생멸하는 것이 공이며, 따라서 생멸하는 것이 곧 불생불멸이다. 마치 아침, 저녁에는 막대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정오가 되면 막대기의 그림자가 짧아지며 밤이 되면 그림자가 아예 사라지듯이, 생멸이라는 것은 연기라는 망 속에서의 관계의 틀이 조금 변화되는 것뿐이다.


생멸은 오직 관계의 틀 안에서의 연기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생이라고 하며 무엇을 멸이라고 하는가? 이를 살펴봄으로써 불생불멸의 중도적 의미를 앞에서의 논의와는 다른 각도에서 다시 고찰하여 보자. 다시 별의 생성을 예로 들면 별이 생성되면서 성간 물질은 없어졌다. 이는 별의 생이란 성간 물질의 멸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니, 멸은 생의 전제 조건이 된다. 이처럼 멸은 생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생이 있는 그 자리에 바로 멸이 존재하며, 멸이 있는 그 자리에 바로 생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간 물질이 멸하는 것을 보지 않고 별이 생하는 것만을 보면서 생이라고 하고, 성간 물질이 생하는 것을 보지 않고 별이 멸하는 것만을 보면서 멸이라고 한다. 단지 우리의 관점일 뿐이다. 그 전체를 다 본다면 생은 멸이라야 비로소 가능하고 멸은 생이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멸과 생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멸이면 곧 생이고 생이면 곧 멸이다. 그러므로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어서 생이라고 할 수도 없고 멸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또한 생멸이 아닌 것도 아니어서 생이기도 하고 멸이기도 하니, 이를 불생불멸의 중도라고 한다.


그러므로 생이 따로 있고 멸이 따로 있으며 이 둘을 더하여 불생불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생해도 불생불멸이고 멸해도 불생불멸이니, 생의 그 자리가 바로 불생불멸의 중도이고 멸의 그 자리가 바로 불생불멸의 중도이다. 수학에서는 1+-1=0이어서 1에 -1을 더해야 0이 되지만, 생과 멸을 더하여 불생불멸이 되는 것이 아니므로 불생불멸의 중도는 이런 미적지근한 계산이 아니다. 1에다 -1을 더하여 0이 되는 것이 아니라, 1이 곧 0이요, -1이 또한 곧 0이다. 1도 연기공이요 -1도 또한 연기공이어서 1도 불생불멸이요 -1도 또한 불생불멸이기 때문이다. 1과 -1, 생과 멸의 차별이 평등한 자리가 불생불멸의 중도이다.



7. 맺는 말


불교의 세계관을 자연과학의 성과를 통하여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둘 사이에는 확실히 심각한 모순이 발견되지 않을 뿐 아니라, 놀랄 만한 일치점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불교의 세계관이 과학적이기 때문에 불교적 세계관에 고도의 신뢰성이 부여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불교는 앞으로의 인류 문명에 대해 상당히 중요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앞으로도 더욱 진보할 것이고, 그러한 과학은 우리의 모든 생활과 우리의 세계관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자원 고갈과 환경 훼손, 빈부 격차, 계급 갈등, 남북 갈등(북반구 공업국과 남반구 농업국 사이의 갈등) 등은 더욱 심각한 문제로 우리 인류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자연과학의 세계관과 정합적인 불교는 부처님의 진리를 전한다는 지금까지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 뿐 아니라, 우리 문명의 모순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밝히면서 문명의 지향점이 어디인지를 제시하는 일까지 떠맡아야 할 의무를 지닌다. 그건 과학 시대를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될 것이다. ■


출처  http://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