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책여행 / 현대물리학과 신비주의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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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빛의 속도로 관통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그리고 물질의 존재 형식을 ‘확률의 패턴’으로 해체했던 양자역학. 여기에 더하여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세계에서 건져 올린 지적 보고(寶庫)는 이 세계와 우주에 대한 관습적인 이미지를 깨부수고 그때까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차원의 단절’을 이룩했다.
이즈음 서양의 지적 사유는 대립의 합일, 상반된 것들의 결합, 총체성의 신비를 지향하는 신화적 사고와 동양사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그것은 영성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다음 세기(世紀)를 예비하는 것이었다. 그 새로운 지적 항해의 닻을 올린 게 현대물리학이다.
과학에서도 가장 딱딱한 분야인 물리학과 종교에서 가장 부드러운 신비주의의 만남, 아니 충돌! 그 역사적인 대면은 20세기 초반 물리학자들이 하이젠베르크의 인도를 받아 ‘양자역학의 정신에 깊숙이 들어간’ 연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20년대 초 원자와 원자 이하의 세계를 탐험하던 물리학자들은 숱한 역리에 부닥쳐야 했다. 그 딜레마는 때로는 입자(粒子)로, 때로는 파동(波動)으로 나타나는 아(亞)원자 물질의 ‘두 얼굴’과 관련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몸과 마음처럼 한데 소용돌이쳤다. 당시 물리학자들 사이에는 “전자(電子)는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입자인데,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파동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떠돌았다. 하이젠베르크와 닐스 보어는 밤새 격론을 벌이다 이렇게 탄식하곤 했다. “자연은 어찌도 이리 부조리하단 말인가?”
이들은 현대물리학이 고전물리학과는 달리 그 분야가 매우 한정적이며 부분적이라는 것, 그리고 과학이 궁극적인 실재를 다루는 데 더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질과학이 (플라톤의) 그림자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한 것은 최근의 가장 중요한 발전이다.”(아서 에딩턴)
우리가 물리학을 통해 일상적 경험, 말하자면 동굴 속의 그림자(상대적 진리)에 대해서는 상세한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그림자를 아무리 연구하더라도 동굴 밖의 빛(절대적 진리)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러니 이들 현대과학의 선구자들이 물리학의 태생적인 한계를 넘어 영적, 신비주의적 세계관에 젖어든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자아초월심리학’의 대가 켄 윌버는 현대물리학의 거장들이 거의 예외 없이 우리 인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영원과 마주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최근 국내에 번역된 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한언)에서 그 과학자들의 면면을 이렇게 적고 있다.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보어, 에어빈 슈뢰딩거, 막스 플랑크, 루이 드브로이, 볼프강 파울리, 에딩턴, 제임스 진스….
“인간은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전체의 일부분, 시간과 공간에 의해 한정된 일부분이다. 인간은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인간 의식의 시각적인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아인슈타인)
슈뢰딩거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우리를 포함한 다른 의식 있는 존재들은 모든 것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단순히 전체의 부분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전체’ 그 자체다.” 진스는 “우리는 어떤 영적인 존재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토로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세계 성립에 대해 통찰의 진수를 보여 주는 신비주의 전통의 핵심에 다가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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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자연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아마도 양자역학의 가장 혁명적인 측면은 관찰의 결과가 관찰자의 의식과 상호작용을 한다는 게 아닐까. 어떤 관찰실험을 하느냐 하는 과학자의 의사에 따라 물질은 그 반응을 달리했으니 과학자는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자연 현상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측정은 전자(電子)의 상태를 변화시키며, 우주는 그 다음 결코 동일하지 않다!”(존 휠러)
전자는 과학자의 마음과 관계가 없는 객관적 성질을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정신과 물질, 관찰자와 피(被)관찰자 간의 예리한 데카르트적 분리는 더 유지될 수 없었다. 현대물리학은 의식과 물질의 이원론을 초극하면서 자연에 대한 객관적 기술이라는 고전물리학의 이상을 무효화했다.
“지식의 흐름이 비(非)기계론적 실재를 향하고 있다. 우주는 거대한 기계가 아니라, 차라리 거대한 사상처럼 되어 가기 시작하였다.”(데이비드 봄)
제프리 추의 ‘구두끈(boot strap) 가설’은 아예 물리학 이론을 불교나 힌두교의 통찰로 이끈다. “모든 입자의 특성이 관찰 방법과 밀접히 관련된다는 사실은 물질세계의 기본 구조가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 세상을 보는 방법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찰된 물질 모형은 마음의 모형의 반영인 것이다.”
양자역학의 이 새로운 인식의 지평에서 동양의 신비주의 사상에 주목한 것은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였다. 그는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범양사· 1979년)에서 현대물리학과 신비주의 사이에 발견되는 심오한 유사성을 이렇게 전한다.
“원자물리학이 발견하고 설명하고 있는 것들은 생소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불교나 힌두 사상 속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것들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옛 지혜의 예증이자 장려이며 그것을 더욱더 갈고 닦는 것이다.”(오펜하이머)
“원자세계의 이 거대한 드라마에서 관객이면서 동시에 연기자로서 우리 입장을 조화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부처나 노자와 같은 사상가들이 일찍이 부딪혔던 인식론적 문제로 되돌아가야 하지 않을까.”(보어)
그렇다면 앙코르 와트나 교토의 불교 승려들이 말하는 깨달음은 옥스퍼드와 버클리의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인가? 현대수학의 고도로 정교한 언어로 표현된 정밀과학과, 주로 명상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언어로 전달될 수 없다고 하는 직관(直觀)이 어떻게 수렴된단 말인가?
1970년대 ‘신과학운동’의 선봉에 섰던 카프라와 켄 윌버는 이 점에서 극명하게 갈린다. 윌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한언· 2006년)에서 현대물리학이 결코 신비적 세계관을 지지하거나 증명하지 않으며, 그것은 ‘개의 꼬리’(동굴 안 그림자)로 ‘개’(동굴 밖 빛)를 증명하려는 것과 같다고 잘랐다.
“현대물리학의 선구자들은 그들이 물리학자였기 때문에 신비주의자였던 게 아니라 물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신비주의자였다!”
슈뢰딩거와 같은 과학자도 종교의 진정한 영역은 과학의 영역을 초월한다고 선을 그었다. 현대물리학의 거장들은 물리학과 종교의 강제 결혼에 의한 물리학의 왜곡도 원하지 않았고, 신비주의를 값싸게 팔아 버릴 생각도 없었다고 윌버는 강조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훗날 미래의 물리학에 의해 다른 이론으로 대체될 것이다. 그러나 붓다의 깨달음은 대체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붓다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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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의 직경은 약 1억분의 1cm! 그 크기는 대체 얼마만 한 것일까?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에 비추어 그 크기를 가늠하는 게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프리초프 카프라는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The Turning Point·범양사·1985년)에서 그 극미한 원자세계의 크기를 파악하기 위해 오렌지를 지구 크기만큼 확대해 보라고 제안한다. “아마도 오렌지가 지구 크기만 하다면 오렌지 원자들은 버찌만 할 것이다. 지구만 한 크기의 공 속에 수많은 버찌가 꽉 차 있는 모습! 그게 바로 오렌지 하나 속에 들어 있는 원자들의 확대된 모양이다.”
그러나 이 미세한 원자조차도 그 중앙에 있는 핵에 비하면 대단히 큰 것이라고 한다. 원자를 버찌 크기로 확대하더라도 원자핵은 너무 미세해서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 원자를 축구공만큼 확대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원자를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의 돔 크기만큼 확대해 보면 어떨까? “원자 하나가 성 베드로 성당의 돔만 하다면 원자핵은 소금 한 알의 크기만 할 것이다. 성 베드로 성당의 천장 한가운데에 있는 소금 한 알과 천장의 광대한 공간에서 그 주위를 맴도는 먼지들…. 이것이 원자의 핵과 전자들을 묘사해 볼 수 있는 모양이다.”
원자물리학은 초미시적 세계에 깊숙이 파고들어 처음으로 사물의 본질을 엿볼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원자는 고래로부터 믿어왔듯이 견고하고 딱딱한 입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안에서 극도로 미세한 입자들이 핵의 주위를 빛의 속도로 운동하고 있는 공간의 광막한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물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사건이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반(反)문화 운동이 거셌던 1960년대에 물리학자이면서 동시에 히피였던 카프라. 그는 자서전인 ‘탁월한 지혜’(범양사·2006년 8월 재출간 예정)에서 이 ‘고난의 시기이자 순례자의 시기’에 선(禪) 불교와 도교에 관한 책을 접하면서 현대물리학의 모델과 이미지들이 동양사상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는 데 매료되었다고 적고 있다.
물질에 대한 지식은 더는 직접적인 감각 경험에 기댈 수가 없었다. 여하한 논리적 추리로도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자연은 어떤 명제가 아니라 단지 수수께끼를 내놓을 따름이었다. 과학자들은 원자적 실재에 대한 새로운 각성, ‘통찰’을 통해서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1970년대 들어 카프라는 양자역학의 출현이 의미하는 세계관의 근본적인 변화, 그 혁명적인 패러다임 전환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과학계는 양자론에 대한 그의 지나치게 철학적인 해석을 못마땅해했다. 아직도 뉴턴의 고전물리학에 발을 담그고 있던 과학자들에게 그의 주장은 이단으로까지 비쳤다. 이 때문인지 그의 첫 책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은 1975년 출간되기까지 열두 곳의 출판사를 전전해야 했다.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양자역학의 논리는 거시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원자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일까? 나아가 “신비주의라는 자동차를 물리학이라는 말에 매단다면 우리는 그 자동차를 도랑에 빠뜨리고 말 것”인가?(제러미 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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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중인가? 이 우주는 새로움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결정론적 법칙이 지배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신(神)이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인가?
“상식에 따르면 모든 사건은 선행된 다른 사건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예측이 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시 또 상식에 따르면 인간은 가능한 여러 행동 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능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카를 포퍼)
결정론은 합리적인 사상의 여명기였던 소크라테스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상의 핵심이었다. 그렇다면 이 결정론적인 세상에서 인간의 창조성과 윤리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벨기에의 과학자 일리야 프리고진은 역저 ‘확실성의 종말’(사이언스북스·1997년)에서 여기에 서양 인문주의적 전통의 뿌리 깊은 모순이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으로는 자연을 명백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이룩하기 위해 개인의 책임과 선택의 자유를 강조하는 ‘결정론의 딜레마’(윌리엄 제임스)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
“확실성과 결정론의 추구는 인간 이성에 대한 확신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우리 실존의 바탕을 부인하는 소외에 이르고 말았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과학의 미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자주 들려온다. 우리는 지금 우주론에서 생물학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서 불안정성과 요동을 경험하고 있다. 자연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법칙’뿐만 아니라 ‘사건’이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확고하다고 믿었던 세상의 상당부분은 “과학적 그물을 빠져나갔다”.(화이트 헤드)
프리고진은 “이제 더는 과학이 확실성을 의미할 필요가 없는 새로운 과학이 태어나고 있는지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한다. 그러나 그는 확실성의 종말이 결코 인간 정신의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시간의 실체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뉴턴의 자연법칙은 시간의 방향성을 부정한다. 미래와 과거를 구별하지 않는 뉴턴의 우주는 ‘시간 대칭적인’ 우주다. 미래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등가적(等價的)인 결정론적 우주다. 결정론적 자연법칙에 따르면 시간은 환상일 뿐이며, 완벽한 ‘초기 조건’이 주어지면 과거로 되돌아가는 시간여행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프리고진은 시간의 흐름은 우리 존재의 가장 핵심적인 차원이라고 주장한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화살’이야말로 자연의 기본법칙으로부터 나타나는 고유한 성질이라는 것. “시간의 화살이 존재하지 않는 평형 상태의 물질은 눈이 먼 상태다. 시간의 방향성이 주어질 때 물질은 비로소 눈을 뜨고 앞을 보게 된다.”
시간과 존재는 어쩔 수 없이 뒤엉켜 있으며 시간의 진화가 없으면 ‘빅뱅’도, 생명의 탄생도 없는 것이다.
“시간은 나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나와 함께 흘러가는 강이지만 나 자신이 바로 그 강이다. 그것은 나를 잡아먹는 호랑이지만 내가 바로 그 호랑이다. 그것은 나를 태워 버리는 불이지만 나 자신이 바로 그 불이다….”(보르헤스)
현대물리학은 그 ‘지식의 경계’에서 공간보다는 시간, 존재보다는 ‘됨’, 질서보다는 카오스로 무게중심을 옮겨 가면서 동양의 고대사상과 접점을 넓혀 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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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놀라움에, 그것도 엄청난 놀라움에 대비하고 있어야 하네….”(닐스 보어)
현대물리학의 가장 영향력 있고 독창적인 해석가로 꼽히는 ‘시인을 위한 물리학자’ 존 휠러. 20대 때 자신의 스승이었던 보어의 말을 항상 기억한 그는 1960년대에 블랙홀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고, 물리학 역사상 가장 기이한 ‘다(多)우주론’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그리고 ‘아원자 물질은 실체가 없다’는 스승의 주장에서 나아가 이 세계의 실재가 전혀 물리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미국의 과학저술가 존 호건은 ‘과학의 종말’(김동광 옮김·까치)에서 휠러의 세계관을 이렇게 압축한다. “우리 우주는 관측이라는 행위, 즉 우리의 의식이 필요한 ‘참여적 현상’이다.”
1990년대 초반 휠러는 ‘지연된 선택의 실험’이라는 사고(思考)실험을 고안했다. 그것은 ‘두 개의 틈 실험’의 변형이다. ‘두 개의 틈 실험’은 양자현상의 정신분열적(?) 본성을 잘 드러낸다. 두 개의 틈이 있는 벽을 향해 전자를 방사하면 전자들은 마치 파동처럼 움직인다. 전자는 두 개의 틈을 동시에 통과하면서 파동이 겹쳐져 간섭(干涉)무늬를 형성한다. 그러나 실험자가 한쪽 틈을 막으면 전자들은 열려진 다른 쪽 틈을 마치 입자처럼 통과하고 간섭무늬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휠러는 ‘선택을 나중에 하는 실험’에서 전자들이 이미 벽을 통과한 ‘이후에’ 두 개의 틈을 열어놓을 것인지, 아니면 한쪽 틈만을 열어놓을 것인지를 결정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결정(틈을 다 열어놓을지 말지)을 미리 하고 전자를 방사했을 때와 동일하게 나타났다! 전자들은 마치 실험자가 자신들을 어떻게 관찰하기로 선택했는지를 미리 아는 것처럼 보인다.
휠러는 이 과정을 ‘지연된’ 스무고개 게임에 비유했다. 이 게임은 문제를 낸 사람(질문을 받는 사람)이 미리 답을 정하지 않고 질문을 받은 ‘후에야’ 그 어떤 것을 마음속에 떠올리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서야 문제를 낸 사람은 ‘디즈니랜드’를 생각하고, ‘아니요’ 라고 답하는 것이다.
참가자가 질문을 던지기 전에는(실험자가 어떤 방식으로 관찰할지를 정하기 전에는) 그 어떤 답도 존재하지 않는다(전자는 아직 파동도 입자도 아니다. 실체가 아닌 것이다).
휠러는 과학자들이 ‘궁극의 답’을 좇지만 그것은 결국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라고 자른다. “진리는 객관적으로 이해되는 무엇이라기보다는 단지 상상의 산물이다. 우리는 진리를 창조할 뿐만 아니라 실재 자체, 바로 그 ‘만물’을 우리가 제기하는 질문을 통해 창조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양자역학과 동양사상 사이에 유추를 끌어내고자 시도했던 휠러. 그의 말이 법구경의 첫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름 아닌 우리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우주가 태어났을 때 정신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휠러는 마치 선승(禪僧)과도 같이,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으스스한 역설을 던진다.
“만물의 본질에 들어 있는 것은 답이 아니라 물음이다. 우리가 물질의 가장 깊은 곳, 우주의 가장 먼 변방에 다다라서 그곳을 들여다보았을 때, 궁극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우리를 마주 보는 당황스러운 자기 얼굴이다!”
출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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