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옛스님 이야기

가상 인터뷰 ⑮ 청평거사 이자현

slowdream 2008. 1. 11. 10:58
 

가상 인터뷰 ⑮ 청평거사 이자현


“욕망-집착 놓지 않으면 僧도 결국 俗”



청평거사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은 부설거사, 추사 김정희 등과 더불어 한국불교사의 대표적인 거사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고려 문종 15년(1060). 이자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할아버지 이자현은 왕에 버금가는 권력자였고, 3명의 고모는 왕비, 왕은 고모부, 삼촌 소현 스님은 왕사였다. 아버지 이의 또한 재상에까지 오를 정도로 높은 관직에 있었다.


 영민했던 이자현은 주변의 기대처럼 어릴 때부터 학문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스물셋에 문과에 급제에 관직의 길에 올랐다. 젊은 나이에 ‘대락서승(大樂署丞)’이라는 고위관직에 오른 그는 사촌 이자겸과 함께 인주 이씨 가문의 영광을 이어갈 인재로 촉망받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사건’은 그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어느날 사랑하는 아내가 시름시름 앓더니 하루아침에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스물일곱의 젊은 이자현에게 더 이상 세간의 삶은 의미가 없었다. 더욱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온갖 권력투쟁과 이를 중재해야 할 불교계마저 사분오열돼 대립하고 있는 불교계의 모습은 뒤늦게나마 출가하려는 그의 의지를 꺾어놓았다.


이자현은 봇짐 하나 짊어진 채 집을 나섰다. ‘이제 가면 다시는 도성(개성)을 밟지 않으리라’는 굳은 각오와 함께…. 목마른 뒤 만나는 옹달샘은 권력의 달콤함보다 청량했고, 허기질 때 먹는 거친 밥 한 끼가 고대광실의 산해진미보다 나았다. 전국을 유람하던 그의 발길이 이른 곳은 춘천 경운산이었고 우연찮게도 이곳은 아버지 이의가 보현원이라는 암자를 지어 놓은 곳이기도 했다. 이자현은 산의 이름을 청평산이라 바꾸고 절의 이름도 문수원이라 이름 짓고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교학을 연구하고 참선수행에 몰두했다. 때로는 왕의 간곡한 부름도 여러 차례 있었으나 도성을 밟지 않겠다는 그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다만 수많은 벗들이나 스님들과 교류하기도 하고 글을 쓰며 경전강의를 할 뿐이었다. 37년간 이곳에서 세월을 낚다가 1125년 4월 65세의 나이로 입적한 거사 이자현. 그는 세속을 초탈한 청평사의 고고한 학이었다.



▷반갑습니다, 거사님. 예나 지금이나 돈과 권력이면 꿈뻑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성 싶은데 보장된 권력의 자리를 뒤로 하고 산속으로 들어가셨다니 대단한 의지 같습니다. 아내의 죽음 때문인가요?

“언젠가 자신이 죽을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소.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남의 일로만 치부해버리오. 그러다보니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마냥 눈앞의 이익을 좇는 게 아니겠소. 아내의 죽음은 내 삶을 돌아보게 했고, 절망과 함께 용기를 함께 주었소. 그래서 나를 세상의 욕망으로부터 고립시키고 결심했던 거요.”


▷크게 버려야 크게 얻는다고 했는데 거사께서 그렇게 모든 것을 버렸기에 그토록 깊은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 수행정도야 뭐 대단한 거겠소. 다만 욕망의 지옥을 통과해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욕망을 극복할 수 없다는 점이오. 집착에 대해 깊이 이해해야만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얘기지요.”


▷당시 출가를 해도 좋았으리라 생각되는데 거사로 끝까지 남았던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출가했다면 체계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겠지만 결국 여러 직책을 아니 맡을 수 없었을 테고 그러면 세속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요. 욕망과 집착을 짊어지고 다닌다면 어디를 가든 세간 아니겠소.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했다오.


▷당시 거사님과 교유했던 분들이 많았다는데 어떤 분들이셨나요?

“혜소국사와 탄연 스님을 비롯해 이오, 윤언이, 곽여, 권적, 은원충 같은 분들이었소. 그중 나와 유독 가까웠던 분 중에 금강거사 윤언이라는 분이 있었소. 비록 그는 나보다 연배는 30년가량 적었지만 참으로 좋은 도반이었지요. 훗날 그 거사는 영평에 금강재(金剛齋)를 짓고 참선하며 지냈는데 간혹 성안에 들어갈 때면 항상 누런 소를 타고 다니곤 했던 기인이기도 했다오.”


▷거사님의 산중 생활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훗날 뇌천(김부식)이 기록했듯 채소와 누비옷으로 검소하고 절제하며 청정한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소. 간혹 선(禪)을 좋아하는 이가 오면 고승의 종지를 들어 토론을 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산중생활에서 가장 큰 벗은 역시 고독 아니겠소. 홀로 경전과 선어록에 심취해 지냈지요. 그러던 어느날 설봉 스님 어록을 읽다가 ‘천지 하나하나가 눈(眼)인데 너는 어느 곳을 향해 웅크리고 앉아 있느냐’라는 대목에 크게 느낀 바가 있었소. 그 후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다시는 의심하거나 막히는 것이 없었소.”


▷그런데 거사님께서는 어록보다도 『능엄경』에 훨씬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들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대장경을 다 읽고 제반 서적을 두루 열람했으나 『능엄경』이 심종(心宗)에 가장 부합하는 경전으로 깨달음의 세계와 그에 이르는 방법을 가장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었소. 그런데 참선을 공부하면서도 이 경전을 읽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았겠소.”


▷요즘에는 『능엄경』이 전통강원에서 꼭 읽어야 할 경전으로 정해져 있고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능엄경』을 강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이와 관련된 박사학위가 나오기도 했으니까요. 어쩌면 거사님께서 당시 강조하신 영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거사님께서는 청평산에 암자를 여럿 지으셨다는데 혹시 그 이름도 『능엄경』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렇소. 내가 10여 개의 암자를 지었는데 그중에 견성(見性)과 문성(聞性)이라는 곳이 있다오. 견성은 성품을 본다는 뜻으로 능엄수행의 이론적 기반을 집약한 표현이고, 문성은 성품을 듣는다는 뜻으로 능엄수행의 실천방법을 집약한 것이오. 이런 의미에서 암자 이름도 그렇게 지었던 거요.”


▷혹시 유식사상에는 관심이 없으셨나요. 스님의 친척들 중 출가하신 분이 모두 법상종 계열이고 그곳에 대한 집안의 후원도 대단했던 것 같은데요.

“유식은 마음의 구조를 심층적으로 다룬 불교수행과 이론의 꽃이오. 어찌 수행하는 이가 이를 외면할 수 있겠소. 하지만 당시 법상종을 비롯한 교단은 지나치게 계파간 이익에만 몰두하고 있었소. 법이 중심에 서지 않은 논쟁과 다툼은 중생을 저버리고 불법을 망치는 길이오.”


▷참 대단한 신념인 것 같습니다. 설령 그렇더라도 예종께서 한 번 입궐하라고 그토록 요청했는데도 응하지 않은 건 좀 너무한 것 아닙니까? 오죽했으면 임금께서 ‘그리워 보고 싶어 애달픈 이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하고 쌓이건만 높은 뜻 뺏지 못하매 내 맘 어이하리오.’란 시까지 남기시겠습니까?

“내가 결심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임금이 부르면 갈 수도 있소. 그러나 한 번 다짐을 어기면 다음번에는 더 쉽게 무너지고 결국 밑바닥까지 무너지게 되는 게 이치 아니겠소. ‘한번만’이라는 나태한 생각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소.”


▷아무튼 나중에는 임금께서 도성을 나와 거사님을 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임금께 어떤 말씀을 하셨나요?

“답답하셨겠지요. 외척 등 임금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정권다툼, 얽히고설킨 세상살이에 불교계마저 싸움판으로 전락했으니 어디서 위로를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저 임금의 말씀에 귀 기울였을 뿐이지요. 다만 ‘하늘의 뜻에 어긋나지 않으려면 욕심을 적게 하시라’는 당부와 함께 맛 좋은 차를 건네 드렸지요. 스스로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집착과 기대인 까닭이라오.”


▷거사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꼭 여쭈어봐야겠습니다. 사회가 잘못되었다면 뛰어들어 고치려 해야 하지 않습니까. 권력자들이 부패하고 승단이 타락해도 홀로 고고하게 유유자적하는 것이 어찌 바람직할 수 있겠습니까?

“니체라는 서양철학자는 ‘악마와 맞서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스스로 악마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지요. 이 말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행위에 대해 경계함 없이 타인의 행위에 대해서만 민감한 사람들이 많지 않소. 교화는 반드시 대중 속에서만 가능하고 산중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편견이오. 스스로 청정해지려 노력하고 자신이 터득한 지혜를 나누는 것 또한 참으로 가치 있는 일 아니겠소. 그것이 곧 세상과 후세를 향한 내 외침이자 믿음이기도 했소.”


▷끝으로 요즘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내 삶이 평화로웠다면 그것은 출신이나 재력 때문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의 결과요. 내 사촌 이자겸은 권력의 끝을 좇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소. 그러나 나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헛된 욕망과 편리함이 아닌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선택했소. 조건이나 누군가를 탓하기에 앞서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행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이은상 「청평거사 이자현」, 최병헌 「고려중기 이자현의 선과 거사불교의 성격」, 조용헌 「이자현의 능엄선 연구」, 이경수 「은둔의 전통과 청평사 한시」, 서경수 「고려의 거사불교」, 김호연 「문수원 정원과 이자현의 사상」, 윤국병 「문수원 정원과 시대적 배경」, 강순형 「문수원터 청평사」, 법현 스님 「능엄선의 도입자 이자현 거사 」 등



이자현 어록

 

“집은 푸른 산봉우리에 있는데/ 전부터 있어온 보배로운 거문고./ 한 곡조 타 봄직 하지만 다만 지음(知音)이 적구나.(家住碧山岑 從來有寶琴 不妨彈一曲 祗是小知音)” (『파한집』 중)


“내가 대장경을 다 읽고 여러 서적을 두루 보았으나 『수능엄경』은 심종(心宗)에 부합되는 것이며, 중요한 방법을 발명한 것인데 선학(禪學)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이것을 읽는 이가 없으니 진실로 한탄할 만한 일이다.” (「청평산문수원기」)


“신이 처음 도성문을 나설 때에 다시는 서울(개성) 땅을 밟지 않겠다는 맹세가 있었으므로 감히 조칙을 받들지 못합니다.” (『파한집』 중)


찬탄과 비판


“이자현으로 말미암아 선법이 해동에 널리 유포되어 혜조국사·대감국사가 모두 그 문하에 공부했다.” (고려 이인로)


“이자현은 승려라는 출가의 명분을 따지지 않은 채 능엄의 오도자요, 또 고려에 있어서 독립적인 선학(禪學)의 선구자이었으니 뒷날 보조의 선종도 실상 그로부터 흘러 내려온 것에 힘입음이 컸던 것이다.” (시조시인 이은상)


“사회구제의 사명감이 없었던 고려불교의 거사들은 결국 자기 구제조차 완성 못하고 청산유수를 벗하며 무역사(無歷史), 무사회(無社會)의 가상적 진공에서 일시적 자기위안과 자기만족에 도취함을 자기구제로 착각하고 일생을 살았다.” (전 동국대 교수 서경수)



출처 http://www.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