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보조지눌(普照知訥)
-‘韓國禪’ 확립한 고려불교의 巨峰-
(1) 시대적 배경
知訥이 살았던 12세기 고려불교는 안팎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었다. 밖으로는 계속되는 정변의 소용돌이 속에 불교가 함께 휩쓸리어 종교적 기강이 해이해졌으며, 안으로는 선과 교의 대립 또한 심하였다. 지눌은 고려 의종 12년(1158)부터 희종 6년(1210)까지 4대에 걸쳐 53년의 길지 않은 생애를 살았지만, 전 고려사를 통하여 이 시기는 극도의 변란과 불안의 시대로 특징지어진다.
예종까지의 융성기를 지나 고려를 변란의 와중으로 몰아넣기 시작한 인종조의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지눌이 태어나기 각각 32년, 23년 전의 일이었으며, 의종말 명종초 일어난 정중부, 이의방을 중심한 이른바 무신의 난은 그의 나이 13세 때의 일이었다. 그 후 계속되는 무신들간 권력으로 서로를 모략하고 살육하는 정변의 와중에서 지눌은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명종 26년 최충헌이 무신 상호간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강력한 세습정치를 하기는 그가 38세 때의 일이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불교는 上求菩提 下化衆生하는 종교 본연의 위치를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본래 고려불교는 태조 이래 왕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러므로 왕실이 정치적인 혼란에 휩쓸릴 때 불교는 초연할 수 없었다. 때로는 승려들이 직접 무력적인 행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명종 4년 왕실파의 입장에 서 있던 승려들이 정중부 토벌운동에 앞장서 백여 명의 승려가 희생당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이렇게 승려들이 현실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는 가운데 고려불교는 종교적 위치를 크게 벗어나 승려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궁중의 옹호를 받은 불교는 납세의 의무를 면제받은 특혜를 이용, 토지와 농노를 겸병하고 노비를 사유하여 사원을 利窟化하는 폐단도 없지 않았다.
이렇게 궁중불교로 정치적 와중에 휩쓸리고, 승려의 기강이 해이되어 정법과 멀어진 것이 지눌 당시 고려 불교가 안고 있는 외적인 문제였다면, 불교 내적으로도 또한 선과 교가 대립, 갈등하고 있었다. 이는 고려 불교가 안고 있는 또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종지를 가진 선이 신라말에 전래되어 고려초까지 9산선문을 형성하면서 발전하게 되자, 재래의 敎佛敎와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불립문자를 내세우는 선이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교불교와 마찰을 일으킴은 필연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눌보다 100여년 앞서 살았던 대각국사 의천의 화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교간의 대립, 갈등은 지눌 당시에도 여전하였다. 이러한 상황 상황에서 선·교를 회통시켜 내적인 갈등을 극복하고 정법을 구현하는 일은 당시 고려불교가 요청하는 시대적인 과업이었다. 지눌은 이러한 시대적인 사명을 자각하고 한국불교를 바로잡는 일에 헌신하게 된다.
(2) 求道와 敎化의 삶
한 사람의 삶이 어떠하였는가는 그 사람의 죽음의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죽음이란 삶의 총결산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죽음은 그들 삶의 질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불타와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그러했고, 예수의 마지막이 또한 그랬다. 보조국사 지눌의 생의 마지막 장면 또한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잘 보여준다. <佛日普照國師碑銘>에 의하면, 그는 타계하던 날 새벽 목욕재계하고 법당에 올라가 향을 사르고 큰 북을 쳐 송광사내 대중을 법당에 운집시켰다.
그리고는 육환장을 들고 법상에 올라 제자들과 일문일답으로 자상하게 진리에 대한 대담을 계속하였다. 마지막으로 한 제자가 “옛날에는 유마거사가 병을 보이었고 오늘은 스님께서 병을 보이시니 같습니까, 다릅니까”라고 물었다. 같은가 다른가 하는 질문은 선가에서 진리를 시험해 보는 질문이다. 임종이 가까운 스승께 이렇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의 세계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 대하여 지눌은 육환장을 높이 들어 법상을 두어 번 내리친 다음 “일체의 모든 진리가 이 가운데 있느니라”하고는 법상에 앉은 채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1210년 3월 27일, 그의 나이 53세였다. 그이 생의 마지막 장면은 최후의 순간까지 제자들과 진리에 대한 가르침으로 일관한 불타의 入滅을 연상케 한다. 그는 진리 속에 살다가 진리 속에 간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다. 그의 생애는 41세 때(1198) 지리산 上無住庵에서의 깨침을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이전의 생애가 고려불교의 타락상에 대한 깊은 인식과 그를 바로잡으려는 정열이 깨침(覺)을 향한 줄기찬 정진으로 승화된 기간이었다면, 깨침 이후의 삶은 모든사람을 위하여 정법을 펼친 자비의 실천 기간이었다.
전기에 의하면 국사의 휘는 知訥이며 자호는 牧牛子였다. 황해도 서응군에서 태어났고 속성은 鄭씨로 국학의 學正인 光遇의 아들이다. 佛日普照國師는 입멸 후 희종으로부터 받은 시호이다. 그는 어려서 입산하여 25세에 僧選에 합격하였다. 당시 승선은 승려의 과거제도로 그의 합격은 출세의 관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승선에 합격한 젊은 지눌은 생의 일대전환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당시 서울인 개경을 떠나 남하하여 깨침을 향한 정진에 몰두한다. 전남 창평 청원사에서 그의 일생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六祖壇經>을 읽다가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한 것이다. 이 체험은 지눌의 구도열을 더욱 굳게 하였다.
3년 뒤 하가산 보문사에서는 선과 교가 계합하는 것을 찾기 위하여 3년간 대장경을 열람하였다. 여기서도 우리는 구가 선교의 융회를 위하여 얼마나 진지하게 탐구하였는가를 잘 볼 수 있다. 마침내 그는 李通玄의 <華嚴論>에서 선교가 둘이 아님을 확신하고 “세존의 입으로 설한 것이 교요, 조사가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러한 수행과 탐구를 통한 체험과 확신을 바탕으로 명종 20년(33세)에는 팔공산 거조사로 옮겨 ‘定慧結社’를 실천에 옮겼다.
이는 당시의 불교를 일선하려는 큰 혁신운동이었다. 그의 깨침을 향한 피나는 정진은 드디어 41세 때 완성되었다.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大慧語錄>을 읽다가 “선정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반연에 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먼저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이나 날마다 반연에 응하는 곳이나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고 참구하지도 말아야 한다. 만일 갑자기 눈이 열리면 비로소 그것이 집안일임을 알 것이다”하는 구절에서 크게 깨친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그 깨침을 기본으로 한 세찬 이익중생의 자비행이었다. 그는 선종 3년(1200)에 전남 순천 송광사로 옮겨 남은 생을 그곳에서 교화하는데 진력하였다. 거조사에 있던 정혜결사도 그곳에 옮겨 修禪社로 개칭 한국불교 유신의 노력을 계속하였다. 수선사의 선풍은 定과 慧를 고루 닦으며 선과 교를 함께하는 독특한 것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은 <修心訣> <勤修定慧結社文> <誡初心學人文> <眞心直說> <法集別行錄節要> <圓頓成佛論> <看話決疑論> <華嚴論節要>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법집별행록절요>와 <계초심학인문>은 현재까지도 한국불교 승려교육의 필수 교재로 쓰이고 있으며 <수심결> <진심직설>은 한국불교에서도 가장 널리 읽히는 저술로, 일찍부터 중국과 일본에 소개되어 애독되고 있다. 근래 미국의 하와이 대학에서 그의 저술을 영역, 출판하였음은 반가운 일이다(Robert Buswell;The Approach to Zen,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3).
이제 그의 영향력은 세계 사상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근래 지눌사상을 주제로 한 박사학위 논문이 미국에서 3편 일본과 대만에서 각각 1편이 나오고 있음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3) 사상
지눌의 사상은 12세기 고려불교의 문제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밖으로 정치적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타락한 불교를 바로잡아 정법을 구현하고, 안으로 선교간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는 일은 지눌이 살았던 고려불교의 과제였으며, 그는 실제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평생을 일관하여 진력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뇌의 산물인 것이다.
지눌은 무엇보다도 불교인 모두가 修心에 투철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수심불교로 돌아갈 때 정법은 구현될 수 있으며 선교간의 갈등도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마음 닦는일을 게을리할 때 불교는 정법과 멀어지며, 쓸데없는 시비에 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눌은 수심에 가장 기본이 되는 깨침(悟)와 닦음(修)의 성격과 체계를 밝히는 일에 진력하였다. 깨침과 닦음의 바른 길은 수심인에게 나침반과 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중요사상을 항목별로 나누어 고찰해 보려 한다.
頓悟漸修思想
깨침과 닦음에 관한 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 그의 돈오점수설이다. 즉, 지눌에 의하면 올바른 수심의 길은 먼저 마음의 성품을 분명히 깨치고, 그 깨침을 의거하여 점차로 닦아 가는 先悟後修라는 것이다. 頓悟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돈오란 범부가 미혹했을 때, 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제 성품이 참 법신임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헤매다가, 갑자기 선지식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생각에 빛을 돌이켜[一念廻光] 제 본성을 보면 번뇌 없는 지혜의 성품이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음을 아나니 그 때문에 돈오라 한다."
돈오란‘마음의 부처’라는 사실에의 눈뜸이며 자기 존재에 대한 명확한 파악이다. 그것은 [一念廻光]이란 자기 존재에 대한 돌이킴으로 가능하다. 밖으로만 치닫던 마음의 빛이 존재의 원천을 돌이켜 비출 때 우리의 실다운 모습은 밝게 드러난다. 그럴 때 우리의 참다운 나, 참 마음의 실상을 여실히 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부처’라는 말은 이때에 터지는 탄성이다. 그것은 어둠(迷)으로부터 밝음(悟)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방이 스위치를 올렸을 때 일시에 밝아지듯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므로 ‘頓’이라는 형용사가 붙는다.
‘心卽佛’이라는 사실을 돈오했으면 수심을 마친 것인가? 지눌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아직 완성인 부처의 경지는 아니라고 한다. 돈오를 기본으로 점차로 닦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漸修이다. 깨쳤으면 그만이지 왜 점수가 필요한가. 지눌에 의하면 깨치기 전 오랫동안 익혀온 나쁜 習氣는 즉시 제거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점수란 비록 본래의 성품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의 습기는 갑자기 버리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해 닦아 차츰 익혀 공이 이루어져서 성인의 胎를 길러 오랫 동안을 지나 성인이 되는 것이므로 점수라 한다"
돈오가 자기 존재의 실상에 대한 눈뜸이요 앎이라면, 점수는 그 앎이 생활 속에 一如하게 하는 실천과정이요 닦음이다. 즉 돈오가 迷에서 悟로의 전환이라면, 점수는 범인이 성인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점차적인 것이다. 돈오가 아기의 탄생이라면, 점수는 그 아기가 어른이 되기까지의 성숙이며 개발과정이다. 그러므로 돈오만으로 닦음이 필요없다는 것은 마치 갓난아기가 어른 행세를 하려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돈오점수란 이렇게 우리 존재의 실상에 눈뜨는 깨침과 그를 바탕으로 깨친 대로 행할 수 있는 점차적인 닦음을 통하여 온전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수심의 체계이다.
定慧雙修
점수의 성격과 내용을 밝히는 것이 그의 定慧雙修論이다. 즉, 정과 혜는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定이란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조용하게 하는 것이며, 慧는 사물을 사물대로 보는 것으로 三學의 덕목들이다. 그러나 지눌이 정혜쌍수라 할 때 정과 혜는 마음에 즉하여 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定은 마음의 空寂한 본체를 가리키며 慧란 마음의 신령스럽게 아는(靈知) 작용을 말한다. 따라서 마음의 본체와 작용이 분리할 수 없듯이, 정과 혜도 항상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심의 실제에 있어서 정에만 치우치면 昏沈에 떨어지기 쉽고, 혜에만 치우치면 산란해지기 쉽기 때문에 항상 정과 혜를 함께 닦으라는 것이다. 그는 또 정혜쌍수라는 깨친 다음의 점수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이타행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看話禪思想
지금까지 우리는 지눌의 돈오점수, 정혜쌍수사상을 고찰해 보았거니와, 지눌은 그와 함께 단도직입적인 話頭禪을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 선양하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그에 있어서 돈오점수의 수행문이 일반적인 근기의 사람을 위한 因敎悟心의 길이라면, 처음부터 일체의 語路, 義理, 思量分別을 거치지 않고 沒滋味한 화두를 들어 깨치는 이른바 徑截門은 특수한 근기의 사람을 위한 길이다. 이렇게 지눌에 있어서는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이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각기 다른 방편문을 제시하고 있다.
禪敎의 融會
지눌은 선과 교의 대립과 갈등을 보면서 그 둘은 과연 화합할 수 없는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었다. 그는 바로 이 의문을 풀기 위하여 보문사에서 3년간이나 대장경을 열람하였다. 선승인 그가 3년간이나 대장경을 열람하였다는 일은 그가 선교의 갈등 해소를 위해 얼마나 진지하였는가를 짐작케 하는 일이다. 그는 드디어 <화엄경>을 통하여 선교가 계합하는 구절을 발견하였다. 그때의 감격을 그는 “그 경책을 머리에 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다”고 적고 있다. 그 후, 이통현의 <화엄론>을 읽으면서 더욱 선교가 하나라는 확신에이르게 되어 드디어는 이렇게 말하였다.
”부처가 입으로 말한 것은 교요, 조사가 마음에 전한 것은 선이다.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입은 필연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인데, 어찌 그 근원을 궁구하지 않고 각기 제가 익힌 데에 편안히 안주하여 망령되이 논쟁함으로써 헛되이 세월을 보내겠는가?"
선은 부처의 마음(佛心)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佛語)이다. 마음과 말이 분리될 수 없듯이, 선과 교가 둘일 수 없다. 이것이 지눌의 선교융회정신의 기본이다. 그가 돈오점수를 강조한 것도 선교를 하나로 융화하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4) 사상의 성격과 의의
지금까지 살펴본 지눌사상에 나타나는 특성은 어떠한 것이며 그 의의는 어떠한 것일까. 먼저 그의 사상 전반에 흐르는 두드러진 성격은 妙合과 會通을 기본으로 하는 원융한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그의 돈오점수, 정혜쌍수, 간화선사상, 선교융회의 사상에 그대로 나타난다. 지눌에 있어서 깨침과 닦음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깨침(悟)을 통한 닦음(修), 닦음을 게을리하지 않는 깨침의 체계이다. 또 이는 悟를 강조하는 頓門과, 修를 강조하는 漸門의 회통을 말하기도 한다.
중국선에서 우리는 깨침과 닦음, 頓과 漸이 분리, 강조된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지눌에 있어서 정과 혜, 그리고 선과 교는 항상 묘한 조화를 잃지 않는다. 그는 因敎悟心의 길과 함께 一超直入如來地하는 徑截의 길 또한 포용하였다. 치우치지 않는 妙合會通의 정신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듣는 이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각기 다른 길과 가르침을 펴고 있는 이른바 應機說法의 원융한 방편을 그의 사상 전반에서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지눌사상의 한 특성이라 하겠다.
이러한 지눌사상의 사상사적 의의는 어떠한 것일까?
첫째, 한국선의 탈중국적인 전통의 확립이다. 지눌 이전의 선이 중국선의 연장, 혹은 강한 영향 아래 있었다면, 지눌에 이르러 비로소 선과 교, 깨침과 닦음, 돈과 점을 하나로 보는 회통적 선의 전통이 이땅에 수립된 것이다. 이러한 지눌의 사상적 전통은 오늘의 한국불교에도 면면히 전승되고 있다. 이는 외래사상의 주체적이고도 창의적인 수용의 한 훌륭한 예이다. 외래문화의 무분별한 수용으로 가치관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우리의 실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지눌의 사상에서 외래문화 수용의 창의적 자세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무엇보다도 우리는 지눌사상에서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에 대한 철저한 규명을 볼 수 있다. 깨침과 닦음을 통하여 인간의 본래적인 자기의 모습에 눈뜰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지혜와 자비의 구현자가 될 수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확신을 그의 사상에서 볼 수 있다. 그가 그토록 강조하였던 깨침과 닦음이란 바로 우리가 우리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 우리답게 살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이는 自己回復, 自己形成의 가장 직접적인 메시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자기상실의 깊은 늪에서 허덕이는 현대인에게 이보다 더 절실한 생명의 원음이 없겠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눌과 같은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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