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옛스님 이야기

36. 백운 경한(白雲景閑 )

slowdream 2008. 1. 10. 17:24
 


36. 백운 경한(白雲景閑 1299-1375)

-無心無念禪을 강조한 麗末의 禪僧-



(1) 생애와 저술


白雲和尙 景閑은 태고국사 보우(1301-1382). 나옹화상 혜근(1320-1376)등과 함께 고려 말의 대표적 고승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경한의 불교사적 위치는 태고나 나옹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결과 그의 존재는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지지 못하게 되었다. 이같은 현상은 물론 경한의 활동이 이들에 비해 두드러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기인한 결과라 하겠지만,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성과가 별로 없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염두에 두면서 경한의 생애와 저술 선사상 그리고 그의 불교사적 위치 등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경한의 생애를 전하고 있는 자료로는 <白雲和尙語錄>이 유일한 상태이며 <高麗史>에 그에 관한 단 한 편의 기사가 실려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 자료도 그가 49세 때인 1346년 이후의 사실만 전하고 있어, 그 이전까지의 활동에 대한 내용을 전혀 알 길이 없다. 경한은 법호가 백운이며 1299년 전북 고부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출가하였다는 그의 행적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충목왕 2년(1346) 5월 선묘에 승 백운에게 명하며 비를 벌었으나 얻지 못하였다”는 <高麗史>의 내용이다.


 이후의 행적은 <白雲和尙語錄>으로 구성할 수 있는데 정확한 연도추정이 가능한 것은 약 20여 개가 된다. 경한은 1351년(충정왕3) 5월 중국의 호주 가무산 천호암으로 가서 임제종의 거장인 石屋和尙 淸珙을 만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육조스님과 조주의 화두 등을 예로 들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져 깨달음을 구했으며, 같은 해에 지공화상에게 게송을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지공은 나옹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 본래 인도인이며 원나라에 들어와 있다가 충숙왕 말년에는 고려에서 거주하였다.


 1352년 정월 석옥을 다시 찾은 경한은 깨달음의 큰 전기를 맞이한다. 즉, 아침저녁으로 석옥을 만나 의심을 품던 어느날, 혼자 무심무념의 참뜻을 깨닫자 석옥이 찬탄을 하면서 인가하였던 것이다. 당시 경한은 “곧 내 마음에 맺혔던 의심은 얼음처럼 풀리고 무심의 위없는 참뜻을 깊이 믿게 되었다(卽 我心疑 願然永釋 深信無心無上眞宗)"고 스스로 표현하였다. 스승인 석옥과 이별을 한 후 잠시 휴휴선암이라는 곳에서 머물렀던 경한은 1352년 3월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한 그 해에 보법사에서 태고를 만나기도 했던 그는 성각사에서 대중들과 함께    정진을 하던 중 드디어 대오의 경지를 얻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계사년(1353) 정월 17일 낮에 단좌를 하고 있었는데 저절로 생각나는 것이 있었으니, 永嘉大師 <證道歌> 중의 “망상을 버리려 하지도 말고 진실을 구하려 하지도 마라. 無明의 實性이 곧 불성이요, 幻化의 空身이 곧 법신이다”라는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러 그 말을 깊이 음미하였을 때 갑자기 바로 無心이 되었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전과 후가 아주 끊어져 조금도 의지할 곳이 없어 망연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삼천세계가 온통 하나, 자기 자신임을 보았다.


大悟를 이룬 다음 해인 1354년(공민왕 3) 6월, 석옥의 제자인 法眼禪人이 호주 가무산 천호암에서 석옥화상의 辭世頌을 가지고 와서 경한에게 전하였다. 현재 학계의 일부에서는 이 사세송의 전달 사실을 놓고 석옥의 嫡嗣는 태고가 아니라 경한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을정도로 매우 민감한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세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운을 모두 사서 청풍을 팔았더니

온 집안이 텅 비어 뼛속까지 가난하다.

마침 한 칸의 草屋이 남아 있어

떠나는 길에 다달아 丙丁童子에게 주노라.

(白雲買了賣淸風 散盡家私徹骨窮 留得一間芽草屋 臨行付與丙丁童)


같은 해에 그는 안국사에서 지공화상에게 여러 편의 게송을 올리기도 하였다. 경한은 1357년 태고의 천거로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이어서 그는 나이 68세가 되던 1365년 6월, 해주 신광사의 주지로 들어갔다. 이때도 주지를 사양하겠다는 글을왕에게 올렸으나 결국 부임하게 된 것이다. 이 신광사는 당시의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사찰로, 경한은 이때부터 몇 년 간 왕실과 연관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즉 1368년(공민왕 17)에는 왕비 노국공주의 願堂으로 세워진 홍성사의 주지를 맡았으며 1370년에는 9월에 실시했던 功夫選의 試을 맡기도 하였다. 신광사 주지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활동은 나옹화상의 적극적인 천거로 인한 것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1369년 김포의 포망산에 있는 고산암이라는 곳에서 지공화상의 讚을 쓰기도 했던 경한은 1374년(공민왕   3) 여주 취암사에서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77세였다.


인생 70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다. 77년 살다가 77년에 가나니

곳곳이 다 돌아갈 길이요 머리두면 바로 고향이거늘

무엇하러 배와 노를 이끌어 특히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리.

내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 마음 또한 머무는 곳 없나니

재를 만들어 四方에 뿌리고 施主의 땅을 범하지 마라.

(人生七十歲 古來亦希有 七十七年來 七十七年去 處處皆歸路 頭頭是故鄕 何 須理舟楫 特地欲歸鄕 我身本不有 心亦無所住 作灰散四方 勿占檀那地)


경한은 李穡이 지은 <白雲和尙語錄> 서문에 의하면 대선사라는 승계를 지녔음이 확인된다. 비록 선종계 내에서는 국 · 왕사 다음으로 최고의 위치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사후에 추증되었는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다. 결국 그의 생애는 말년의 몇 년 간을 제외하고는 태고나 나옹과 같이 왕실과 밀접했던 부분을 찾아볼 수 없으며 그의 어록 서문을 썼던 李玖의 표현처럼 “천진하고 거짓이 없어 형상을 빌려 이름을 팔지 않았으니 眞境에 노는 사람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현존하는 경한의 저술로는 <백운화상어록>과 <佛祖直指心體要節>이 있다. 어록은 그의 시자였던 釋璨 · 達港 등이 기록한 것으로, 상 · 하 양권으로 되어 있으며 李穡과 李玖의 서문이 앞에 붙어 있다.  1378년 판각한 것이 전해져 오다가 경성제대에서 1934년 이것을 영인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동화씨는 이 어록에 대해 “한국뿐 아니라 중국 선사들의 법어집으로서도 美文 · 통쾌한 점으로는 이 이상 가는 것이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고 극찬하였다.


 또한 要節은 그 내용보다 1377년 간행된 세계 最古의 鑄字本이라는 것으로 더 알려져 있다.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下卷만이 소장되어 있던 것이 밝혀짐으로써 세계의 주목을 끌었던 이 저술은 역대조사들의 偈 · 頌 · 讚 · 銘 · 書 · 詩 · 法語 등에서 선의 要諦를 깨닫는데 필요한 정수들이 抄錄한 내용을 담고 있다.


(2) 景閑의 선사상


가. 無心無念禪


경한의 선사상 가운데 가장 특색 있는 내용은 무심무념을 제창하였다는 점이다. 그가 무심무념의 선사상을 강조하게 된 데에는 스승 석옥의 영향이 상당히 컸는데, 이는 태고의 경우와는 대조적인 결과라 하겠다. 왜냐하면 태고 는 “화두를 버리라”는 석옥의 말에 “이미 放下한 지 오래이다”라고 대답을 했으나, 귀국한 이후 趙州無字의 화두로 후학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석옥은 무심선을 강조하였던 인물이며, 경한도 대오를 이루고 난 후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스승의 은혜는 부모보다 더하여 무겁기는 산과 같고 깊기는 바다와 같음을 믿었다. 만일 그때에 무념의 참뜻을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더라면 어찌 오늘의 큰 해탈이 있었겠는가"


이로써 보면 경한은 석옥의 입장을 보다 철저하게 계승하려 하였고, 반면에 태고는 경한에 비해 간화선적인 태도를 견지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경한이 화두를 택하는 등의 방법보다 무심· 무념· 무위의 선을 강조하고 있음은 다음과 같은 그의 어록 인용문에서 잘 나타난다.


1. 산승은 지난해에 강남과 강북을 돌아다니면서 선지식만 있으면 모두 찾아뵈었소. 그 선지식들은 사람들을 가르치되 혹은 趙州無字로 혹은 萬法歸一 로, 혹은 父母末生前面目으로, 혹은 學心外照攝心內照로, 혹은 澄心入定으로 하였으나 마침내 다른 말이 없었소. 최후의 가무산 천호암의 석옥화상을 찾아뵈옵고, 여러  날 그 집에서 모시고서 다만 그 무념의 진종을 배워 부처님의 더없는 묘도를 원만히 깨쳤던 것이오.


2. 내 소견에 의하면 공부하는 사람을 다루는 자는 화두나 垂語, 혹은 色이나 소리 언어로써 합니다· (중략) 또 가장 묘한 방편이 있습니다. 무심이나 혹은 무념으로써 하는 것입니다.


3. 바로 가리킨 마음은 다만 평상시의 일없는 그 마음으로서, 거기는 아무런 비밀한 앎이나 이치의 길이 없고, 무심과 무위에 꼭 합하면 천기가 저절로 열리어 아무 구애도 없고 아무 집착도 없소.


4. 이른바 시방의 사람들이 모두 한데 모여 사람마다 무위를 배우면, 그것이 곧 선불장이요, 마음을 비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오. 조금 장황스러운 느낌은 있지만,  이상의 내용을 통하여 경한이 강조하고 있는 무심무념선의 개략을 살펴보았다. 그가 당시 유행하던 화두를 통한 선수행을   멀리한 채 무심무념의 방법을 택하였다는 점은 매우 독특한 사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다음의 ‘無心歌’는 그의 이러한 경지를 유감없이 나타내주고 있다.


“깨끗한 흰 구름은 허공에 있었다 사라졌다 하고, 잔잔한 흐르는 물은 큰바다 복판으로 든다. 물은 굽거나 곧은 곳을 만나도 저것과 이것이 없으며, 구름은 스스로 잡고 스스로 풀어 친하거나 서먹하지 않다. 만물은 본래 고요하여 나는 푸르다 나는 누렇다고 말하지 않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시끄러이 이것이 좋다 저것이 나쁘다고 마음을 낸다. 경계에 부딪쳐도 마음이 구름이나 물의 뜻과 같으면 세상에 살면서도 모두가 자유로워 아무 일 없다. 만일 사람의 마음이 억지로 이름 짓지 않으면,  좋고 나쁨이 무엇을 쫓아 일어나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은 경계만 잊으려 하면서 마음은 잊으려 하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잊으려 하면서 경계를 잊으려 하지 않는다. 마음을 잊으면 경계가 저절로 고요해지고 경계가 고요해지면 마음은 저절로 움직이지 않나니, 이것이 이른바 無心의 眞宗이니라."


이와  같이 백운은 무심무념을 선의 구경으로 보았고 또 화두가 본래의 뜻보다는 오히려또 다른 집착을 일으키는 장애가 되어가던 당시에 선가의 그릇된 선풍을 바로잡기 위해 무심의 선풍을 일으켰던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유념하여 둘 것은 무심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문제이다. 그는 무심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경계하면서, “지금 말한 무심이란 세간의 흙이나 나무 · 기왓장 · 돌 따위가 아무런 識이 없는 그런 무심이 아닌  것이오. 털끝만큼 어긋난 차이가 천리의 간격을 이루는 것이니, 자세히 살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라고 대중들에게 훈시하였다.


경한은 다시 대중들에게 “參學하는 일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서, 그의선사상을 간명하게 밝히고 있다. 즉, 참학이란 반드시 화두를 통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경전을 보아야 하는 것도 반드시 論을 짓거나 疏를 연구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반드시 사방으로 돌아다녀야 하는 것도 아니요, 반드시 시끄러움을 피해 고요함을 구해야 하는 것도 아니요, 또 마음을 움직여 밖을 비추거나 마음을 맑게 하여 안을 비추는 것도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결국 진실한 참학이란 “열두 시간과 行 · 住 · 坐 · 臥 四威儀 가운데서 생사의 큰일을 생각하되 心意識을 떠나 범성의 길을 참구해 내야 하는 것이니, 무심과 무위를 배워 그것을 면밀히 기르고 언제나 생각이 없어 언제나 어둡지 않으면 마침내 의지할 데가 없어 명연한 자리에 이른즉 자연히 도에 합한 것이다”라는 방법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나. 禪敎通論


한국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통불교적 성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저 신라 때의 원효를 비롯하여 대각국사 의천· 보조국사 지눌 등등 여러 시대의 여러 인물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선교일치 사상에서 잘 보여진다. 물론 시대나 인물에 따라 선을 중심으로 하느냐 교를 중심으로 하느냐는 방법상의 차이는 다소 있었지만 그대의는 일맥상통하였던 것이다. 경한의 경우도 <禪敎通論>이라는 글에서 이같은 사상을 피력하고 있다. 이 글은 그의 어록  전체 분량 가운데서 매우 미세한  부분에 불과하지만, 선과 교에 대한 그의 견해가 간결하면서도 명쾌하게 정리된 느낌을 준다.


그는  먼저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요, 선은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므로 부처님의 마음과 말씀은 결코 서로 어긋난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였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네는  손수 이 뜻을 주고 받았으며 조사님네는 서로 이 마음을 전한 것으로서, 각기 그 이름과 글귀를 따라 차이가 있는 듯하지만 선과 교의 이름은 다르나 그 본체는 같아서 본래 평등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다음의 인용문은 그의 선교관에 대한 진수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되새겨 봄직한 훌륭한 문구로 생각된다.


“그 근원을 통달하면 선도 없고 교도 없는데, 그 갈래를 벌려놓는 이가 각기 선과 교를 고집하는 것이다. 거기에 어두우면 모두를 잃을 것이요, 그것을 고집하면 둘을 다 해칠 것이다. 한데 녹여 버리면 통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요, 결정하여 바르게 하면 바르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니, 바르고 그름은 오직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한 생각에 기틀을 돌릴 수만  있으면 저절로 모든 법이 한꺼번에 사라져 마침내 선 · 교의 구별은 없어질 것이다."


경한의 어록을 보면 마치 교학승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가 상당히 해박한 경전지식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록의 여러 곳에서 언급하였듯이 그는 경전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을 비판하였으며, 따라서 그의 선교일치적 사상경향은 선승으로서의 위치를 보다 강조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다. 祖師禪


조사선이란 용어는 일찍부터 禪旨를 파악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던 내용이다. 이것은 특히 여래선의 사상과 대비되면서 선교대립의 한 유형을 보여주기도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 백파와 초의 사이에 벌어졌던 선이 논쟁에서 조사선과 여래선의 유래와 성격에 관해 논의된 바 있다.


한편 경한은 그의 어록에서 조사선이란 별도의 항목을 통해 조사선의 대의를 설명하였다. 그는 이 내용에서 먼저 선지로서의 조사선은 빛깔(色)이나 소리 (聲)나 말(言語)을 떠나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즉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삼 세 근(麻三斤)’ ‘마른 똥막대기’ ‘神 앞의 술상(神前酒臺盤)’등 본분종사의 본분의 대답한 말은 다 빛깔과 소리와 말을 갖춘 것으로서 바로 이것이 조사선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조사선을 색 · 소리 · 언어를 통한 悟得의 대표적인 예를 열거하면서 후학들이 알기 쉽게 조사선의 경지를 터득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 개략적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 종사가 언어로 법을 보여 사람을 가르친 것은, 저 조주스님이 한 스님에게 “죽을 먹었는가”라고 물었을 때 스님이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으며, 스님이 “발우를 씻어라”하였을 때 그 스님이 깨친 것과 같다.


2. 혹은 언어와 소리로 법을 보이어 사람을 가르쳤으니, 玄沙는 “그 속으로 들어가라” 하였다.


3. 혹은 색과 소리로 법을 보여 사람을 가르쳤으니, 그것은 방망이를 들거나 拂을 세우며 손가락을 퉁기거나 호통(喝)을 치는 등 갖가지 작용이 다 조사선이다. 그러므로 소리를 듣는 때가 깨달을 때이며 빛깔을 보는 때가 깨달을 때이다.


이 같은 경한은 조사선을 색과 소리, 그리고 언어를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眞境에 이를 수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며 따라서 색 · 소리 · 언어 등은 禪機의 작용으로 인식하였다.


(3) 불교사적 위치


이상에서 고려 말의 선승 백운화상 경한에 관하여 그의 생애와 사상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경한의 생애는 동시대에 생존했던 태고 ·나옹의 경우처럼 당시의 승속이나 후대에서도 그리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독특한 선사상조차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무심무념선을 강조하면서 고려 후기에 새로운 선풍을 일구어 놓았다. 여기서  석옥의 嫡嗣가 태고냐 경한이냐 하는 부분은 논외로 하였지만,  경한이 석옥의 사상에 갚게 영향을 받았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결과 석옥의 사세송이 경한에게 전달되었다는 점 등은 불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비록 그의 선사상이 揚名을 꺼려하는 본인의 성향과, 또는 고려말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충분한 師資傳承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 등으로 인해 차차 잊혀져 갈 수밖에 없었지만 오늘날 새롭게 그의 선사상을 조명해 보는 작업은 절실하게 요청되는 바이다. 특히 당시 增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주장은 儒佛交替期라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할 때, 시사하는 바가 더욱 크다고 하겠다.


1. 형제들이여 지금 말세를 당하는 성현들이 자취를 감추니 邪法은 더욱 성하고 佛法은 쇠퇴하여 사람들은 몹시 게으르고 밖을 향해 달리면서 구하오. 사방의 형제들은 여기서 여름을 지내고 저기서 겨울을 지내고 또 북으로... .(中略) 이렇게 분주히 생각하니 이런 무리들은 바로 몽둥이를 들고 달을 치는 것 같거늘 본분의 일에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2. 혹은 이치를 깨친 이가 있더라도 극히 소수의 사람으로서 中道를 깨치는 법칙과 이치에 들어가는 문은 알지 못하고 그릇 많이 듣기만 배우고 我見만 높이면서 세상의 이익을 아주 벗어났다 하오.


3. 또 어떤 이는 누더기 옷으로 한적한 곳에 있거나 산수에 놀면서 품을 단속하고 제때에 먹되 부드러운 음식을 버림으로써 경솔하게 上流라 생각하오.(중략) 이 노승이 그대들에게 말해주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시오. 그대들이 듣지 않는 것을 난들 어찌하리오.


여말선초라는 정치사회적 변혁기에 있어 타락해 가는 사회와 불교를 재건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구체화시키지 못했다는 책임은 경한의 경우도 면키 어렵겠지만 불교 사상사 속에서의 그의 위치는 꾸준하게 객관화시켜 놓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佛祖直指心體要節)


1372년(공민왕 21) 경한(景閑)이 부처와 조사(祖師)의 게송(偈頌). 법어(法語) 등에서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엮은 책. 상 · 하 2권. 수고본(手橋本)에 직접 초록한, 정식 서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나, 주로《불조직지심체요절》, 《직지심경(直指心經)》 등으로 관용되고 있다. 내용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오등회원(五燈會元)》등의 사전(史傳)관계 문헌을 섭렵하여 선의 요체를 깨닫는데 긴요한 것을 초록하여 편찬하였다. 권상(卷上)에서는 과거칠불(過去七佛)과, 석가모니불로부터 불법을 계승한 천축국의 제1조(祖) 마하가섭(摩詞迦葉) 이하 보리달마(菩提達磨)까지의 28존자, 그리고 중국의 5조사 및 그 법통을 이은 후세의 국사 중 안국대사(安國大師)에 이르기까지의 것이 수록되었다. 권하(卷下)에는 아호대의화상(鵝湖大義和尙)부터 대법안선사(大法眼禪師)까지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대령선사(大嶺禪師)의 것도 수록되어 있다.


중심 주제인 직지심체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오도(悟道)의 명구를 줄여 나타낸 것이다. 판본은 경한이 입적한 3년 뒤인 1377년(우왕 3) 7월 청주목의 교외에 있던 흥덕사에서 금속 활자인 주자로 찍어낸 것이 초간본(初刊本)이 된다. 상하 2권 중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하권 1책(첫장은 결락)뿐이며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주자본은 활자의 주조술과 조판술이 미숙했던 고려시대에 관서(官署)가 아닌 지방의 사찰이 주성하여 찍은 것이기 때문에 활자의 크기와 글자의 모양이 고르지 않고 부족활자를 목활자로 섞어 사용했기 때문에 인쇄상태가 조잡하다. 그러나 문헌상으로만 전해지던 고려 주자본 중 유일하게 전래된 활자본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유산이 되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이 최초로 금속활자를 창안하고 발전시킨 문화민족임을 실증하여 그 긍지를 세계에 과시한  점에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출처 http://cafe.daum.net/yumhwas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