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인터뷰 17 보조국사 지눌 스님
입으로 설하면 敎, 마음으로 전하면 禪
원효대사가 한국불교의 새벽이라면 지눌(知訥, 1152~1210) 스님은 먹구름을 뚫고 대지를 환히 밝히는 한줄기 빛이었다. 불일보조(佛日普照)이라는 그의 시호처럼 암울한 시대에 좌표마저 상실한 민중들에게 ‘부처님의 해처럼 널리 비추는 나라의 스승’으로 삶의 참된 이치와 영원한 수행자상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1158년 황해도 서흥군 동주에서 태어난 지눌 스님은 국자감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아들을 위해 부모는 온갖 좋다는 약과 명의를 찾아다녔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어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사찰을 찾아 기도를 드렸고, 그러던 중 아이의 병만 낳는다면 출가자의 길을 걷도록 하겠다는 서원을 했다. 그러자 씻은 듯 병이 나았고 어린나이에 그는 구산선문 중 하나인 사굴산 종휘 선사 문하로 출가했다.
10대 중반 삭발염의의 젊은 지눌 스님의 눈에 비친 세상은 참혹했다. 굶주림에 지친 농민들, 민중들의 반란과 죽음, 권력암투의 장으로 변질된 조정, 거기에 불교계마저 타락해 사찰들은 민중의 고혈을 빨고 있었다.
매너리즘에 빠진 승가집단에서 스님은 ‘법’답게 살기 위해선 제2의 출가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이에 스님은 결사운동을 일으키고 독자적인 선문인 조계산 수선사를 개창했다. 정(定)과 혜(慧)를 기치로 수행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는 스님은 주장은 많은 스님들과 대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결사운동은 시기가 맞지 않아 스님과 도반들은 10년 넘게 기약 없이 흩어졌다.
일정한 스승이 없이 오로지 도(道)만 따랐던 스님은 스스로 수행이 덜 됐음을 알고 자신을 갈고 닦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육조단경』, 『화엄론』, 『대혜어록』 등을 통해 마지막 번뇌 한 터럭까지 말끔히 씻어냈다.
지눌 스님은 이후 선과 교가 둘이 아니라는 확신으로 불교계의 심각한 대립을 중재하고 회통시키려 했다. 특히 스님이 송광사 수선사에 머물자 대중들이 구름 같은 몰려들어 그의 결사운동에 동참하고자 했다.
스님이 53세 되던 1210년 2월 27일, 후학들에게 부지런히 정진한 것을 당부하고 석장을 짚고 평상에 앉아 고요히 열반에 들었다.
▷예전에 스님께서 쓴 『계초심학인문』의 내용이 너무 좋아 달달 외던 적이 있는데 이렇게 마주하게 되니 감격스럽습니다. 스님 당시 무신정권의 등장으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란이 컸을 것으로 보이는데 불교계 상황은 어땠습니까?
“허허, 그러면 ‘승가의 허물을 드러내지 말고 다만 불사(佛事)를 찬탄할지어다’라는 구절을 잘 알 텐데 그런 걸 물어보오.”
▷‘허물’이 아니라 ‘사실’을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 스님.
“내가 저술에도 남겼지만 세속의 명리를 떠나야 할 스님들이 불법을 빙자해 나와 남을 가르며 이익에만 골몰해 도는 닦지 않고 옷과 음식만 허비하니 무슨 출가의 덕이 있겠소!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니 참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할 수 있지요.”
▷스님께서는 승과에 합격하셨습니다. 당시 스님들이라면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대부분 법계의 사다리를 오르거나 유명 사찰의 주지가 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왜 그 모든 것을 접고 홀로 개경을 떠나셨습니까?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이 출가해 계정혜 삼학을 닦지 않고 거짓 위의로 신심 있는 불자들을 속인다면, 차라리 세속에서 명리와 부귀를 구하고 주색을 탐닉하며 몸과 마음이 황량하게 헤매면서 일생을 보내는 것만 못하다고 여겼지요. 손가락과 달을 구분할 수 없는 사람이 어찌 다른 이에게 법을 말할 수 있겠소.”
▷스님께서는 기존 승단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셨는데 그렇다면 스님께서 꿈꾸던 불교는 무엇이었나요?
“이익과 명예를 좇는 대신 정과 혜를 추구하고, 세간의 기복신앙에서 출세간적인 해탈불교로, 귀족불교에서 서민불교로 옮겨놓고 싶었다오.”
▷스님께서는 거조암, 수선사 등 외딴 곳에 오래 머무르셨습니다. 혹시 번잡한 곳을 벗어나 조용한 곳에서 한가로움을 즐기려는 소극적 동기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까?
“출가수행자의 본래 목적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출가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소. 나는 승속을 떠나 정말 불제자답게 살아가려는 이들의 결사체를 결성하려고 했지요.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니잖소. 그것이 곧 내가 진리와 세상을 향해 뛰어드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오. 다른 사람을 구제하려면 우선 정과 혜를 닦아야 하며 그것은 한적한 곳에서 하는 것이 분명하지요. 그러나 일단 깨닫고 나면 자비의 문(門)은 구름이 펼쳐지듯 저절로 이루어지오. 그러니 나만을 위해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아니지요.”
▷스님 말씀대로 결사는 모든 명리를 버린 채 청빈하게 살 것을 서약하고 노동까지도 분담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정혜를 슬로건으로 하자는데 이견은 없었나요?
“둘이라도 서로 뜻이 맞아야 지낼 수 있는데 하물며 결사를 하는데 있어 왜 다른 의견이 없었겠소. 승가 본연의 자세라는 입장에서 반론들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설득했지요. 그렇게 도반들의 주저와 회의를 없앤 후 그 분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스님들도 중국에 가서 공부를 하거나 깨달음의 인가를 받아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스승이 아니라 책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어나갔다는 게 의외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공덕이 부족했던지 내게는 따로 스승이 없었소. 그런 탓에 홀로 진리를 찾아 헤매던 나에게 글과 문자는 진리와 만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오. 경전과 선지식들의 법문은 문자를 떠난 진리 자체와 충격적인 대면을 하도록 해주었지요. 오랜 번민과 고투 끝에 얻은 깨달음, 얼마나 기뻤던지 그때 난 경전을 머리에 이고 눈물을 줄줄 흘렸지요.”
▷선과 교의 문제를 풀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압니다. 왜 그토록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까? 스님 자신의 일만 해결하면 된다는 생각은 갖지 않으셨나요?
“그것은 단지 개탄만 하고 있을 ‘남’의 문제가 아니라 불법의 정도를 찾고 있던 한 구도자로서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하는 내 자신의 문제였소.”
▷정혜결사운동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스님께서는 계정혜 삼학 중 정과 혜만 강조하고 계율은 가벼이 여기신 것은 아닌지요?
“계율은 정과 혜를 닦는 근간으로 새삼 강조할 나위가 없지요. 정진을 하든 안거를 하든 두타를 하든 한결 같이 부처님의 계율에 의거해서 했지요. 계초심학인문을 쓴 것도 계율이 있어야 정과 혜도 싹틀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요.”
▷비문에는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았고 성품이 인자하고 참을성이 있어 후배를 잘 지도했다. 혹 삐뚤어진 자들이 때때로 그의 뜻을 거슬러도 오히려 가엾이 여겨 감싸주니 끊임없는 정리가 자애로운 어머니가 사랑스런 아이에게 하는 것 같았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아마도 스님의 이런 점 때문에 수선사가 변방에 위치해 있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을 거라 여겨집니다. 스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지도했나요?
“사람들에게 늘 금강경을 암송할 것을 권했지요. 또 『육조단경』과 이통현 장자의 『화엄론』, 대혜종고 스님의 『대혜어록』을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선사가 책에 의지하고 수행자들에게 책을 권한다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아닌데 책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하고 또 많은 저술을 남긴 까닭이 있습니까?
“문자를 경계하는 것은 선가의 전통이었소. 그러나 문자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다만 문자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가 문제 아니겠소. 경전과 선사들의 말씀을 지적 이해로 대체하는 것이 문제지 자신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로 삼아 얼마든지 수행의 귀감으로 삼을 수 있다오.”
▷『대혜어록』을 보면서 마치 ‘원수’처럼 오랫동안 스님의 마음을 어지럽혔다던 것이 혹시 지식의 문제 아니었습니까?
“머리속으로만 이해하는 지해(知解)의 병, 지적 알음알이의 병통에 직면했을 때 대혜 스님의 간화선으로 마지막 관문을 넘을 수 있었소. 간화선은 탁월하오. 그렇지만 다른 경전이나 가르침을 외면하고 화두만 붙잡고 있으면 오히려 병통이 생길 수 있음도 간과해선 안 될 것이오.”
▷성철 스님께서는 스님의 돈오점수론과 관련해 ‘돈오점수는 이설(異說)이며 그것을 신봉하는 자는 지해종도(知解宗徒)이고 이단사설(異端邪說)에 현혹된 자들’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돈오와 돈수는 관점의 차이일 뿐 본질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깨달음을 위한 치열한 수행이 화두 공부라 할지라도 깨치기 전까지는 점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오. 성철 스님의 비판은 나를 향한 질책이었다기보다 그 자신과 당대 수행풍토에 대한 채찍이었다고 보오.”
▷스님께서는 한국불교의 브레이크이자 엑셀레이터인 것 같습니다. 계정혜 중 어느 한 곳에 치우칠 때 멈춰서 다른 쪽을 돌아보게 하고, 나태하거나 침체될 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해 분발토록 하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용수보살은 지목(智目)과 행족(行足)으로 미혹을 떠난 깨달음의 세계인 청량지(淸凉池)에 이른다고 했소. 지혜의 눈을 갖추고 올바르게 실천할 때 한순간 봉숭아가 몰록 터지듯 깨달음은 그렇게 다가올 것이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이종익 「보조찬술의 사상개요와 서지학적 고찰」, 길희성 『지눌의 선사상』, 최병헌 「보조국사비문의 문제점」, 이창구 「조선 중기 보조선의 영향」, 김방룡 「조선 후기 보조선의 영향」, 박영제 「지눌연구의 현황과 과제」 등
지눌 스님 어록
“세존이 입으로 설하면 교(敎)이고 조사들이 마음으로 전하면 선(禪)이다.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입은 결코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 어찌 그 근원을 궁구하지 않고 각기 자기가 익숙한 데만 안주하여 쓸데없이 쟁론을 일으켜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는가!” (『화엄론절요』)
“이 육신의 생명은 나고 죽음이 무상하여 잠깐 동안도 보존하기 어려우니 부싯돌의 불이나 바람 앞의 등불, 흐르는 물이나 지는 해에도 비유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탐욕, 분노, 질투로 명리를 추구하면서 세월을 허비하고 부질없는 말로 세상사나 논하고 있는가? 계율을 지키는 덕도 없으면서 함부로 신도들의 보시와 공양을 받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법어』
“땅에서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서라” (『정혜결사문』)
찬탄과 공경
“스님은 힘이 드는 일과 운력을 하는데 있어서도 항상 대중에 앞장섰다.” (수선사보조국사비명 쓴 고려 김군수)
“지눌은 과거에 매몰된 선승이 아니라 작금의 조계종풍을 청신할 살아있는 선승이자 회통불교의 구현자였다.” (이종익 전 동국대 교수)
“지눌은 당시의 불교계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아니 수용되기를 거부한 진정한 의미의 주체적 인간, 한 개인이었다. 현세적 질서에 안주하기를 거부하는 그는 현세적 가치에 몰두하고 있던 고려 불교계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길희성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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