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함허득통(涵虛得通) 화상
- 斥佛의 强風을 온몸으로 이겨낸 巨木 -
(1) 시대적 배경
涵虛得通和尙은 지공 · 나옹 · 무학 삼대화상의 후예로서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적 혼란기와 불교 유교의 종교적 전환기에 이 민족의 정신문화에 큰 기둥으로서 혼신의 힘을 다하고 간 고승이었다. 함허스님이 활동한 시기는 고려 말 우왕(禑王) 2년(1376)에서 조선조 세종 15년(1433)사이로 이때는 종교문화의 사상적 전환기로서 불교에서 유교로 장치이념이 바뀌어 가는 시기였다. 이때의 유생들은 고려불교의 병폐에 대해서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불교 배격이 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고려말기에서 조선초기의 불교계는 자체 내의 병폐 때문에 정치적 지도이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고려불교는 형식적인 교리와 기복적 행사에 치우친 나머지 일반승려들은 권력과 지위다툼에 눈이 어두워 승단의 화합과 질서는 파괴되고, 또 파계한 승려들로 인하여 사회적 승가의 위신은 여지없이 추락되어 있었다. 고려 성종 조 최승노(崔承老)의 상서문(고려사 권85 刑法志 禁令 성종원년 6月條)에 보면 세속인들은 자기의 소원을 위하여, 그리고 승려들은 자기네의 주처를 마련하기 위하여 많은 사우(寺宇)를 다투어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승려들의 수가 무한정 증가하게 되는 것은 필연이라 할 것이다.
인종 8년(1130) 7월 國子 諸生의 상소문 가운데 ‘佛氏寺觀 周遍中外 薺民逃彼 館食逸居者 不知幾千萬焉’(고려사 권74 選學志學敎)이라 한 것을 보면, 절을 지어놓고 안일하게 포식하는 무리가 얼마나 많았던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조 성종 때 左副承旨 이극감(李克嵁)은 고려불교의 사원경제를 단적으로 말해 ‘寺社半於閭閻 田壯過於官府’(成宗實錄 권48 성종 5년 10월 戊申條)라 한 것을 보면 여염집의 반수를 사원이 차지하고, 사원의 전장(田壯)이 관부보다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불량승들의 재색에 대한 행패가 심할 뿐만 아니라 토전의 조(租=세금)나 노비의 고용에만 그치지 않고 식하(植賀=투자)에 노력하여 고리대금업에도 종사했다.
고려사 권108 최이전(崔怡傳)에 ‘聚無賴僧侶 爲門徒惟以 殖賀寫事云云’이라 하고, 고려사 권7 文宗 世家8년 8월조에 ‘今有避投之徒 托號沙門 植賀營生 耕畜爲業 估販爲風 (中略) 通適賣買 結商醉誤云云’이라 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피역자들이 승려로 위장하고 사원에 들어와 수행(修行)에는 뜻이 없고 재물(植利)에만 눈이 어두워 불교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일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많은 재물이 예속된 사원은 주지들 사이에 쟁탈의 표적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선교(禪敎) 양종 사이에 사찰 쟁탈의 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되, 이를 세도가에 회뢰(賄賂=뇌물)함으로써 지방관리들은 감히 이를 막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
고려말기의 불교승단은 사원과 승려의 증가에 따라 사찰의 전지(田地)와 노비가 증가되고 이로 말미암아 국가존립의 기반이 위태롭게 되었다. 특히 권문세도와 사원세력의 결탁은 장원(莊園)의 발달과 함께 국가 재정을 궁지에 몰아넣고 더 나아가 거국적으로 번번히 시행되는 여러 가지 불사(佛事)는 국가 재정을 크게 소모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말의 왕정은 근본적인 재원정비 없이는 부지될 수 없을 만큼 군자(軍資)와 녹봉이 크게 결핍되었는데 여기에 불교의 영향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까닭에 결국은 사대부와 일반 민중의 배불론이 대두될 수밖에 없었고, 더구나 고려말에 유학의 바람을 타고 일어난 배불과 억불론이 조선초에 와서는 본격적으로 불교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와같이 고려왕조의 정치적 이념인 불교사상이 조선의 개국공신들에 의해서 배척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배불소와 호불소가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배불론에 비하여 호불론은 조족지혈이라 할 만큼 약세를 면치 못하였다. 그 까닭은 고려조의 국교인 불교가 정치적인 세력을 얻지 못하고 자체의 부패와 함께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억불론을 주장한 대표자는 목은이색(牧隱李穡1328-1396)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공민왕 원년 4월에(佛敎通史上編 공민왕 원년 4월조) 상서하기를 고려중기 이후로 五敎兩宗이 모두 이익의 집단[利窟]이 되었다고 하고, ‘川傍山曲 無處非寺’라 하여 사찰의 지나친 축조[濫造]를 지적하고 도첩제를 실시하도록 주장하며, 새로 건축된 사찰에 대해서는 철거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억세게 일어나는 유신들의 반론을 의식하면서도 그는 공공연하게 ‘佛大聖人也 佛者至聖至公’이며 ‘布施功德 不及持經’이라 하여 불사의 지나친 소비를 지적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左思議 吳思忠과 門下舍人 조박(趙璞) 등이 ‘論刻利橋 以需宗佞佛 毁人心述 敗亂風俗云云’이라 공민왕 원년 12월에 상소하고, 후세유생들은 ‘學門不純 崇信佛法 爲世所譏’(고려사 권115 利穡列 傳)라 하여 그를 비평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고려말의 불교를 배척하는 유학자들에 의하여 고려왕조는 멸망을 당하고 조선왕조가 개국하니, 이에 따라 사원의 전답이 몰수되고 승려의 지위는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져 버렸다. 巨儒 삼봉 鄭道傳은 공양왕 3년 5월조에 소를 올려 불사(佛事) 때문에 국가재정이 고갈되어 민생고가 늘어나며, 신불(神佛)을 섬기는 것은 전혀 이익이 없고 해로움만 더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구체적인 예로서 양무제(梁武帝)를 들고 있다.
삼봉이 불교를 비난하는 데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승려가 놀고 먹어 비생산적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승려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며, 셋째는 지나친 불사(佛事)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며 넷째는 장례의 절차가 무례하고 엄숙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가운데 삼봉의 <佛氏雜辨>과 <心氣理篇>과 <心問天答>은 체계화된 이론적 척불론으로 후대 유생들의 배불의 기초가 되었고 이에 대한 반론이 바로 함허스님의 <顯正論>이다.
이것은 불교의 세력이 몰락한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함허스님이 아니라면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발론이었다. 결국 조선초에 척불론자들이 득세하는 바람에 불교는 산중으로 밀려가고 그 많은 재산과 노비는 공탁되었으며 승려들은 강제로 환속을 당하는 시기에 무학의 뒤를 이은 함허스님은 무너지는 불교를 받쳐들고 호법의 등불이 되었던 것이다.
(2) 생애와 업적
스님의 휘(諱)는 己和요 호는 득통(得通)이며 舊名은 守伊고 舊號는 無準이다. 함허는 자모산(지금의 황해도 평산군 成佛山) 연봉사에 머물면서 거실의 당호를 함허라 했기 때문에 생긴 별호이다. 스님은 고려 禑王 2년(1376)에 중원(지금의 충주)에서 劉民의 아들로 태어났다.아버지의 諱는 聰이고 벼슬은 典客寺事이며 어머니는 方氏이다. 스님의 모친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서 대성자모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꿈에 대성이 나타나 어린애 하나를 품에 넣어주고 간 뒤 곧 태기가 있어 洪武 11년(1376) 변진 11월 17일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곧 守伊이다. 어려서부터 스님은 아이들과 함께 장난하고 놀 때에도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며 泮宮(성균관)에 나아가 공부할 때에는 하루에 수천 어를 기억하고 조금 자라서는 一實의 道를 깊이 통달하였다고 한다. 守伊는 21세가 되었을 때 同館의 벗이 죽는 것을 보고 세상의 무상함과 봄의 허망함을 알고 두가지 생사(범부의 생사와 성인의 생사)를 벗어나 부처님의 열반을 구하며 도를 넓혀 四恩을 갚고 덕을 길러 三有에 이익(資)을 주고자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스님의 출가동기가 무상을 절감한 데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원인은 본래 그의 탁월한 두뇌가 유교에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불교에 귀의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저서인 <顯正論>에 보면 仁을 주장하는 유교가 살생을 금하지 않는데 대한 의심을 불교의 자비사상에서 크게 깨닫고 불교에 귀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관악산 의상암에 가서 머리를 깎고 병자년(1396)에 승려가 되었다. 이듬해 丁丑年 이른 봄에 처음으로 회암사에 가서 왕사 무학 妙嚴尊者를 만나 친히 법요를 들었다.
이 인연으로 스님은 임제종 계통으로 제21세손이며 나옹 밑으로 제2세가 된다. 스님은 무학스님 밑에 조금 있다가 하직하고 여러 산으로 돌아다니면서 수행에 전념하였다. 갑신년(1404) 봄에 스님은 회암사로 돌아와 한 방을 치우고 지냈는데 行住坐臥 語默動靜이 여일하였다.
이내 그는 수마를 항복받고 어느날 밤 거닐다가 자신도 모르게 읊기를 ‘행행홀회수 산골입운중’(함허어록 p8)이라 했으니 다니고 다니다가 갑자기 머리를 돌리니 산뼈가 구름 속에 우뚝 섰다는 것이다. 또 어느날 그는 변소에 갔다가 나와서 물통을 들어놓고 ‘유차일사실 여이칙비진’이라고 느낀 바를 갈파했다. 이 말이 어찌 부질없는 말이겠느냐고 野夫는 주를 달고 있다. 이후로 함허당은 교화에 전력을 다하게 된다. 병술년(1406) 여름에 스님은 공덕산 대승사에 들어가 을축년에 이르기까지 4년동안 반야(금강경)의 강석을 세 번 베풀고, 경인년 여름에는 천마산 관음굴에 들어가 覺樹[보리수]의 현풍을 크게 떨쳐 인연 있는 사람들을 모두 교화시켰다.
또 스님은 신묘년 가을에 불회사에 가서 3년동안 결제하며 절을 수리하고 여러 불자들을 모아 조풍을 드날렸다. 갑오년(1414) 3월에는 자모산 연봉사에 가서 조그마한 방 하나를 정하여 함허당이라 이름하고 3년 동안 수행을 부지런히 했다. 그 후로 스님은 정유년에서 무술년까지 한 겨울 두 여름동안 <금강경오가해>의 강석을 베풀었다.
이때 <오가해설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이후로 반야의 강석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스님의 나이 40여세로 반야사상이 완숙되었을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수행하되 마음대로 자유자재했다고 한다. 그는 마을에 나아가 다니기도 하고, 절에 머물면서 일정한 장소에 국한하지 않고 청하기도 하고 만류하기도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 선지식’이라고 했다.
경자년(1420) 늦가을에 스님은 오대산에 들어가서 향기로운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여 오대의 여러 성인들에게 공양하고 영감암에 가 나옹스님의 眞影에 제사한 뒤 잠을 잤다. 그런데 꿈속에서 어떤 선승이 나타나 스님에게 “卿名己和闕號得通”이라 하는 것이다. 스님은 절을 공손히 하고 꿈을 깼는데 갑자기 선기가곧 하늘에 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이튿날 득통은 월정사에 내려와 주장자를 버리고 한적한 방에 고요히 앉아 평생을 마칠 때까지 道胎를 기르기 위하여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물마시며 세월을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주머니 속의 송곳 끝이 밖으로 나와 감추기 어려운 것처럼 그 도덕이 빛나 원근에 두루 전파되었다.
결국 세종대왕이 이 말을 듣고 신축년(1421) 초가을에 大慈御刹(경기도 공양군 大慈山)에 머물도록 하여, 스님은 거기에 주석하면서 왕과 여러 군신들, 그리고 수행납자들을 대접하기를 4년 동안 했다. 그 뒤 갑진년 가을에 왕에게 글을 올려 어찰을 사퇴하고 길상 공덕 운악 등 여러 산에 노닐며 인연따라 날을 보내다가 문득 三學과 一乘法을 펴서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정각을 얻고 진풍으로 말운을 붙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스님은 신해년(1431) 가을에 영남 의양산 봉암사에 들어가 퇴락한 절을 수리했다. 그러나 스님은 법을 펴지 못하고 선덕 8년(1433) 계축 3월 15일 발병하여 심신이 편치 못했다. 4월 1일 신시에 스님은 조용히 앉아 “湛然空寂 本無一物 靈光赫 洞徹十方 更無身心 受彼生死 去來往復 也無罣碍”라 하고, 조금 있다가 또 “臨行學目 十方碧落 無中有路 西方極樂”이라 했다. 이것이 곧 스님의 영결이다. 문도들은 5일 동안 그대로 모셔두었는데 안색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다비 후 치골을 향수에 씻으니 뼈에 붙은 사리가 학연히 빛났다. 효령대군이 이 사실을 상달하니 왕이 명령하여 제자들이 네 곳(현등사, 봉암사, 정수자, 연봉사)에 부도를 세우게 했다.
스님의 세수는 58세이며 법랍은 38년이다. 문하에 文秀 · 學眉 · 達明 · 智生 · 海修 · 道然 · 允悟 · 允澄 등이 있다. 스님의 저서는<涵虛得通和尙語錄>에 보면 〈圓覺經疏> 3권,<般若五家解說誼> 1권,<永嘉集說誼><顯正論> 1권, <般若懺文> 2질,<綸貫> 1권,<涵虛序> 1권,<對靈小參下語><倫釋質疑論> 등이 있다.
(3) 법맥과 사상
함허득통화상의 법맥은 지공 · 나옹 · 무학 삼대 화상의 법계를 이어받았다. 지공이 서천축 108대 조사니까 함허는 가섭 후 101대 법손이 된다. 또 나옹이 평산처림에게 법을 받은 것으로 치면 달마 후 31세가 되며 임제종맥으로 보면 21세가 된다. 삼대 화상의 법맥을 따라 함허당은 역시 선법을 종통으로 하고 반야를 종지로 삼았다. 함허화상은 문장과 이론에 뛰어난 대교학자일 뿐만 아니라 선정사상을 현실에 밀착시켜 생활화한 대선사이다. 그의 중심사상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실긍정적 반야관이다.
반야(空)사상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은 현실부정적인 것 또는 출세간적인 것, 아니면 초현실적인 것으로 오인하고 있다. 그러나 함허는 <금강경> 서문에서 ‘有一物於此’ 즉 현실(此)에 반야(一物)가 실재(有)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교가에서 말하는 一物이나 선종에서 말하는 일물이나 선가에서 얘기하는 일착자는 희유한 것이기 때문에 보기 어렵고 황홀해서추측키 어려우며, 미오를 따져서 범성으로 나누거나 분간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냥 일물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無頭無尾하고 無名無字”라고 한 육조혜능의 일물이나 “說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라”고 한 南岳懷讓和尙의 일물이나 “有一物於此”라고 한 함허의 일물은 심연한 당처의 자리곧 반야 자체를 말한 것이다. 화상은 반야의 본체는 명상이 끊어졌다고 하지만 그 작용은 시간적으로 억천겁의 과거 · 현재 · 미래를 통관하고 공간적으로 능소능대하여 적게는 미진에도 들고 크게는 법계를 다 쌀 수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첫째 희유한 반야는 체를 잡을 수 없어서 일물이라고 강칭하고 둘째로 반야의 상은 공적하여 절명상이라 하며, 셋째 반야의 용은 시간적으로 관고금하고 공간적으로 위육합이라고 한다. 한량없는 묘용의 본래구족한 반야는 삼세의 주인이며 모든 법 중 왕인데 이것을 불조가 깨닫고 우리 중생들에게도 함유해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그리고 반야지혜로 我執과 法執을 다 끊고 俱空의 일승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반야는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며 天上天下 唯我獨尊인 절대자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것이 곧 함허의 절대긍정적 반야관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절대평등의 인간관이다.
유교는 임금과 신하,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 즉 주종의 인간관이지만 불교는 누구나 다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평등의 인간관이다. 그래서 함허는 <금강오가해설의> 가운데 “釋迦도 眼橫鼻直이시고 人人도 亦眼橫鼻直이라(부처님께서도 눈은 옆으로 째지고 코는 밑으로 처졌으며 사람마다 또한 눈은 옆으로 찢어지고 코는 밑으로 흘렀다.)고 했다. 이것이 함허가 주장하는 인간의 절대평등관이다.
셋째, 無彼此의 열반관이다.
흔히 열반은 피안의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함허는 “十類生이 與十方佛로 一時成佛道하고 十方佛이 與十類生으로 同一涅盤이라”하고 이상적인 불세계를 현실 그대로 불세계라 했다. 즉, 함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닌 동일 열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넷째, 無彼此의 절대평등적 진리관이다.
진리는 따로 어디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항상 평등하게 있고, 그 평등 가운데는 너와 나를 차별하는 어떠한 것도 없다는 것이다. 화상은 “平等性中엔 無自他라고 해서 自他가 없는 員如性” 즉 절대평등의 진리관을 주장하고 있다.
다섯째, 物我一致의 우주관이다.
화상은 <현정론>에서 불교는 “萬物與我一體”라 하고 유교에서도 “天地萬物寫一己”라 하니 양교는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함허는 <현정론> 맨 처음에, 도 그 자체는 시간(고금)과 공간(유무)을 초월해 있으나 거기에 다 통한다고 한 것을 보면 마치 般若一物을 설명한 것과 같다. 體性은 본래 情이 없지만 性이 迷하면 情이 생기고 情이 얼어나면 智慧가 멀어지며 상념이 변하여 결국은 體와 달라지는데 이에 따라 삼라만상이 형상으로 나타나며 또 생사가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와 유교의 근본적인 性情論이다.
五戒는 人道, 十善은 天道, 四諦十二緣起는 二乘, 六波羅密은 一乘菩薩이 각각 성취해야 할 수행덕목이라 하고 3장 12부 경전이 다 사람들로 하여금 정을 버리고 본성을 발현하도록 한 것일 뿐이라고 함허는 자신의 종교관을 피력한 뒤 불교와 유교를 비교했다.
儒以五常으로 而寫道樞하니 佛之所謂五戒는 卽儒之所謂五常也라 不殺은 仁也요 不盜는 義也요 不婬은 禮也요 不飮酒는 智也요 不妄語는 信也라.(현정론)
즉, 화상은 오계와 五常을 배대하여 양교가 근본은 같다고 했다. 그런데 5계 10선을 사실상 불교에서는 가장 천한 것이라고 해서 유교를 얕잡아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의 자비와 유교의 인애는 사상적 뿌리는 같지만 그 깊이와 행동은 다르다고 지적한다. 유교가 살생을 하면서 인을 주장하는 것은 불교가 살생을 하지 않고 자비를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함허스님의 출가 원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배불론에 대해서 스님은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현실과 종교를 모르고 한 말은 일축해버렸다. 아무튼 함허득통스님은 쇠운에 접어든 불교를 붙잡고 “佛子는 잡아 죽여야 한다"는 유교인들을 설복해서 불 · 유의 과도기에 혼신의 힘을 다한 大敎師 요 大禪師이며 大宗師였던 것이다.
출처 http://cafe.daum.net/yumhwas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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