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편양(鞭羊) 禪師
- 걸인과 함께 양치며 살던 聖者-
(1) 시대적 배경
흔히 조선불교를 숭유억불의 법란시대라고 한다. 유생들로 가득 찬 조정 위정자들의 갖은 박해와 탄압과 멸시를 받으면서 근근이 명맥을 이어왔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러한 갖은 시련이 있었기에 전국 각지의 수많은 납자들이 오직 수행에만 전념하여 해탈장부가 된 것이다. 유생들의 박해는 도리어 도인들을 배출한 계기가 되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없다. 그런 예는 숱하게 많다.
조선초의 碧溪爭心선사는 沙汰를 당하여 황악산 古紫洞勿汗里의 어느 호숫가에 은거하면서 호수에 곧은 낚시를 드리우고 삼매에 들었다. 碧松智嚴선사는 함경도에 침입한 여진족을 소탕한 장수로서 出家爲僧하여 벽계선사를 찾아가 땔나무 장사를 하며 수도하더니 급기야는 見性悟道했다. 芙蓉靈觀선사는 천민출신으로서 남의 집 종살이를 하다가 뜻을 세워 출가하여 九千洞에서 10여성상을 용맹정진한 끝에 打破漆桶하여 벽송선사의 衣鉢을 傳受하였다.
서산대사는 조실부모하고 고아가 되었는데도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여 과거에 응시하였고 낙방을 계기로 지리산의 신선을 찾을 양으로 義神洞天에 들어갔다가 崇仁長老를 만나 世塵을 벗은 뒤 西山窟에 처박혀 3년여를 씨름하더니 낮닭 우는 소리를 듣는 순간 대오하고는 조선불교의 중흥조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수행풍조의 전통 속에서 유년에 출가한 鞭羊禪師도 선배 도인들처럼 수행에만 전념하여 解脫丈夫가 되어 종풍을 振作하는 한편 廣濟蒼生하였던 것이다.
(2) 생 애
선사는 선조 14년(1581)에 竹州縣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張氏이고 아버지는 張珀이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에 12세의 나이로 금강산 楡岾寺의 玄賓선사에게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왜구가 강산을 짓밟던 8년 풍진 동안은 은사의 슬하에서 三藏을 이수하며 티 없이 자랐으며, 왜란이 가라앉자 捨敎入禪하여 제방으로 다니면서 여러 선지식을 찾았다. 선사는 19세 때 타파칠통하고 保任하면서 평안도 어느 목장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면서 鞭羊堂이라는 법호를 얻게 되었다. 22세 때 묘향산의 淸虛禪師에게 입실하고 3년을 시봉하였으며 이때 스승의 진수를 체달하여 嗣法弟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청허, 곧 서산대사의 법동을 잇게 된 편양선사는 그의 법을 楓潭의심에게 전수하였으며, 풍담은 다시 月潭설제에게로, 월담은 喚惺志安에게 전하여 편양선사가 입적한 지 3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한국 승려 중 95% 이상이 모두 편양문손에 속하게 되었다. 편양선사는 서산대사의 제자 81인 가운데 가장 막내였다. 한 산중을 거느리는 조실자리에 앉은 도인들이 즐비하였으니 이 중에서도 四溟 · 逍遙 · 靜觀 · 鞭羊의 4대 문중을 이른바 ‘서산문하의 4대 문파’라고 한다.
하지만 3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사명· 소요 · 정관 등 3대 문파는 그 대가 끊긴 지 오래이고 현재는 오직 편양문손만이 크게 성하여 우리나라 전체 승려 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편양선사의 어느 면이 그토록 장하기에 선사의 문하만이 크게 떨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선사가 3년간의 양치기 생활과 평양성 내에서의 보살행의 공덕이 아닌가 한다. 양치기생활은 어떤 보수를 받고 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보림하는 가운데 양떼들을 돌본 것이었다. 선사는 양떼들을 자신보다 낮은 축생으로 다룬 것이 아니고 인간과 구별함이 없이 마치 赤子와 같이 여겨 그들의 보호자가 되고 선도자가 되어준 것이었다.
또 평양성에서의 보살행이란 선사가 보림하면서 평양성 내의 모란봉에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성 내에 사는 걸인들 수백 명을 한곳에 모아 그들을 보살펴주었다. 선사 자신이 문전걸식하는 형편인데도 수백 명의 걸인들을 친권속 같이 보살펴준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선사로서는 걸인들의 보호자 노릇을 하는 일이 수행의 한 방편인 두타행일 수밖에 없었지만, 선사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를 가리지 않고 근 10년을 헌신하였다. 이 作福行을 실천궁행한 공덕으로 오늘날 전체 승려의 조사가 된 것이 아닐는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서산대사 문하에는 81인의 悟道弟子가 있었고, 이 중에서 한 산중의 조실이 된 분만도 50여 명이나 되었다. 그 분들 모두가 편양선사보다 법랍이 높은 선배들이었지만 그들의 後福이 편양선사보다 못한 것은 편양선사만큼 큰 복을 못 지었기 때문이리라. 평양성에서의 이타행을 끝내고 묘향산으로 돌아와서 선사는 다음과 같이 읊은 바 있다.
맑은 성에 노닐기를 마친 뒤
묘향산에서 그름과 벗해 한가롭구나.
홀로 앉아 밤은 깊어가는데
앞봉우리 달빛은 마냥 차갑고녀.
(百城遊方畢 香岳伴雲閑 獨坐向深夜 前峰月色寒)
선사는 귀산 후 묘향산의 천수암과 금강산의 천덕사 등 사암에서 후학을 위해 개당 강법하여 널리 교를 선양하였다. 선사는 선을 닦아 깨친 도인이면서 전등 · 화엄 등 삼장을 강설하였으므로 선자에게는 本分宗師이고 교학자에게는 大講伯이었다. 이렇듯 선과 교를 雙修하고 幷闡한 것은 당시의 불교가 선교양종인 탓도 있겠지만 선교일치의 사상을 따랐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편양선사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선에 주안점을 둔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인조 22년(1644) 5월 10일, 이 날은 편양선사가 세연을 거둔 날이다. 묘향산 內院은 선사의 스승이신 서산대사께서 입적하신 암자로서 스승의 최후를 지켜본 편양 자신이 또한 이 절에서 坐化하였다. 임종에 이르러 제자 풍담의심에게 후사를 유촉하고 오되 오심이 없이 오신 길로 가되 가심이 없이 그렇게 가셨다. 선사의 세수는 64세이고 법랍은 53세였으며 은색 사리 5과를 수습한 제자들은 묘향산과 금강산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3) 사 상
조선불교는 한마디로 禪敎兩宗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납자들은 선교를 겸수하는 것을 정규과정처럼 여겨왔고, 또 그렇게 실천해 왔다. 처음 출가입산하면 3년 내지 10년을 행지생활을 하면서 중노릇하는 제반을 익힌다. 행자 중에서도 총명한 사람은 조사어록과 경전을 이수하기도 한다. 사미계를 받고 득도하면 본격적으로 三藏을 배우는데, 《華嚴》《傳燈》《拈頌》등 이른바 大敎를 수료하면 걸망을 메고 諸方禪院을 歷訪하며 참선하게 되는데. 이 과정을 보통 ‘捨敎入禪’이라 일컫는다.
이런 과정을 편양선사도 어김없이 거쳤다. 선교를 겸수한 것이다. 그리하여 40이 넘어 견성오도 후의 保任行을 마치고는 다시 산사에 머물며 수학납자를 提接하였는데 교학을 이수해야 할 학인에게는 삼장을 강설하고 참선대중에게는 禪家 특유의 방법으로 祖師禪旨를 선양하는 등 선교를 한 장소에서 한 스승이 가르친 것이 조선불교의 한 특색이기도 했다. 선원의 조실이 강원의 강사를 겸하였으므로 자연히 선교일치의 사상이 확립되기도 했지만, 편양선사는 교보다 선을 우위에 놓고 교는 선을 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여겼다. 서산대사의선과 교를 편양과 사명이 전수하였으므로 이 두 분의 격을 여타 제자들보다 한층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편양선사의 문집에‘禪敎源流尋도說’이라는 글이 있다. 이 尋검(?)說은 선사의 禪敎觀이라 해도 좋고 선사의 사상을 십분 함축한 내용이라 해도 좋다. 이 글은 선사의 선과 교에 대한 견해를 아는데 충분한 내용이어서 한마디로 선사의 선교관이라 하겠다. 이제 이 심검설을 분석 검토하면서 선사의 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선사의 선에 대한 견해는 어떠한가? 선사는 선을 교보다 우위에 두었으므로 심검설의 첫머리에 놓고 선을 俓截門이라 일컬었다. 물론 이는 선사의 스승이신 서산대사의 사상과 일치하며 멀리 중국 옛 조사들의 사상을 잘 계승한 것으로 이해된다.
옛날 馬祖의 一喝에 百丈은 귀가 먹고 黃蘗은 혀를 토했나니 이 一喝이 문득 이 拈花消息이며 또한 달마께서 처음 오신 면목이니 곧 空劫 이전 부모님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소식이니라. 諸佛諸祖의 奇言妙句와 良久 · 棒喝과 百千公案과 갖가지 방편이 다 이에서 나왔느니라. 銀山鐵壁이라 발을 놓으려 해도 문이 없고 石火電光이라 思議를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니 이것이 교밖에 따로이 전하신 선지니 이른바 俓截門이니라.
여기에서 언급한 염화소식이란 부처님이 교밖에 따로이 전하신 일이 세 차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세 차례 전하신 것을 삼처전심이라 한다. 첫째는 多子搭前分半座요 둘째는 靈山會上擧拈花이며 셋째는 沙羅林中示雙趺이니 이를 교외별전하신 선이라 한다. 이를 쌍수제자 마하가섭이 세존에게 받아가지고 이조 아난에게 전하고 아난은 다시 삼조 商那和修에게 전하여 서천에서 28대를 전하니 28대조는 바로 보리달마이다. 달마는 인도를 떠나 중국에 이르러서 제자 慧可에게 전했는데 혜가는 29조가 되고 혜가는 다시 30조인 僧璨에게, 승찬은 道信에게, 도선은 弘忍에게, 홍인은 慧能에게 전했다.
이 혜능이 33조이며 동토의 6조이니 중국적인 선을 확립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천하에 선법이 가득 차게 되었다. 마조는 6조 혜능의 수제자인 南岳懷讓의 법을 이은 碧眼宗師로서 直心是道란 말을 처음 사용하였으며, 대기대용을 적절히 잘 구사하여 많은 납자의 눈을 뜨게 한 스님이다. 이 마조의 일갈이야말로 세존의 염화미소, 바로 그 소식이며 달마가 동토에 처음 오셔서 전하신 선의 진수이니 이 선을 체득하면 一超直入如來地하므로 경절문이라 한다. 그러면 이 선을 체득하는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선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경절문 공부는 저 조사의 공안상에 때때로 들어 깨쳐서 의심 일으킴을 성성히 하되 천천히도 말고 빠르게도 말며 혼침과 산란에 떨어지지 아니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잊지 않기를 갓난애가 어머니 생각하듯 하면 마침내 분연히 한번 묘를 발하리라.
선사는 여기에서 간화선을 언급하고 있다. 원래 달마조사가 전한 선은 묵묵히 自心을 반조하는 이른바 순선이었는데 육조혜능이 一物을 제창한 이래 趙州從염(言+念)等의 대에 이르러 간화선이 확립되었다. 그래서 육조의 선은 남악회양 문하에서는 간화선이 청원행사의 문하에서는 묵조선이 확립 발전하여 대대로 전승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에 이르러 태고보우선사가 중국에 가서 임제종지를 받아와서 대대상승하여 편양에 이르렀으므로 자연히 간화선의 종지를 따르게 되었다. 위의 글은 화두를 드는 요령을 설명한 것으로서 중국 大慧宗杲禪師의 가르침과 궤를 같이한다.
다음으로 선사의 교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면 옛날 교가종장들의 4교 때처럼 4교를 들고 있으니 화엄 · 아함 · 방등· 법화가 곧 그것이다. 교에 사등차별이 있으니 佛이 처음 성도하자 緣熟菩薩과 上根凡夫를 위하여 二頓을 설하시니 화엄이요 성문을 위하사 사제를 설하시고 연각을 위하사 12인연을 설하시니 아함이며, 보살을 위하사 6도를 설하시니 방등이요, 전의 3승구경을 위하사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설하시니 법화라 이를 4교라 하느니라.
선사의 4교관은 옛날 종장들이 이미 제창하신 것이어서 특별한 것은 아니나, 사등차별의 교법은 실은 차별이 없고 다만 4교를 수용하는 사람의 근기에 스스로 차별이 있는 것이며 그래서 사제가 화엄보다 얕지 않고 화엄이 사제보다 玄微하지 않아서 모두가 일법을 따름이라고 역설하였으니, 이는 선사의 안목이 뛰어났음을 보게 되는 장면이라 하겠다.
“연이나 당기에 스스로 차별이 있을지언정 법은 차별이 없나니 樹王을 일으키지 않고 鹿苑에 노닐며 돈설이 곧 사제를 설한 것이니라. 그런즉 仙苑과 覺場이 한자리요 화엄과 사제는 일설이라, 화엄이 반드시 사제보다 현미하지 않으며 사제가 반드시 화엄보다 얕지 않느니라. 다만 근기를 따라 대소의 차별이 있나니 마치 하늘이 비를 내림에 초목이 윤택함을 받되 초목이 스스로 길고 짧음이 있을지언정 그 비는 한 맛이니 불설도 또한 그러하여 교는 근기를 따라서 다를지언정 그 실제는 다 일법이니라"
그러면 이 교, 즉 圓頓門을 깨치는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원돈문 공부는 일령심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하여 원래 번뇌가 없음을 반조함이니 만일 경계를 대하여 분별하는 때를 당해 문득 이 분별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앞을 향하여 이 마음을 추구하되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고? 하라. 만일 일어나는 곳을 궁구하되 얻지 못하면 곧 심두가 뜨겁고 답답할 것이라, 이것이 좋은 소식이니 놓아버리지 말지어다.
“자기의 심성을 반조하는 공부를 선사는 권하고 있다.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을 향하여 그 분별심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고 하고 궁구해 가되, 일어난 곳을 못 찾아 마음속이 답답할 것이지만 바로 그 경지가 깨침으로 가는 좋은 소식인 만큼 방사하지 말고 계속 추구해 나가라고 가르쳤다"
선사는 또 심검설에서 염불문 공부를 언급하고 있는데, 참선 · 간경과 함께 수행의 삼대로 중 하나인 점으로 보아 여기에서 설한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점이라고 하겠다.
“염불문 공부는 行住坐臥에 항상 서방을 향하여 존안(阿彌陀佛)을 첨상하여 의지하여 잊지 않으면 목숨이 마치는 때에 아미타불이 오셔서 상련대에 영접 하시리니 이 마음이 곧 불이며 이 마음이 곧 육도만법이니라. 그러므로 마음을 여의고 달리 부처가 없으며 마음을 여의고 달리 육도선악의 여러 경계가 없느니라."
“마음을 오롯이 하여 아미타불을 염하여 잊지 않는다면 臨命終時에 아미타불의 영접을 받아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사상은 미타경에 설한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이 심검설에서 염불문 공부를 언급했다고 해서 편양성사 자신이 염불인이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불교수행의 세 가지 길 중에 속하는 까닭으로 후생들을 위해 올바른 수행방법을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선사는 임명종시의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설하고 있다.
“목숨이 마치는 때에 만일 불경계가 현전함을 볼지라도 경동심을 없이 하며 만일 지옥경계가 현전함을 볼지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이 할 것이니 심과 경이 일체라. 이를 不二라 하나니 이 불이법문 중에 어찌 凡聖 · 善惡의 차별이 있겠는가?"
“불경계가 현전하거나 지옥경계가 나타나거나 거기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말아라. 경계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 그러므로 선악 제경에 마음을 내지 않으면 마음과 경계가 여여하여 곧 일체가 될 것이다. 이를 不二라 하거니와 이 불이의 경지가 부사의한 제불경계인 것이다.”
선사의 가르침이 여기에 이르러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음을 재삼 감탄해 마지않으며 염불문 공부의 결론을 마저 들어보기로 하자.
“이와 같이 관찰하여 미혹하지 않으면 생사마를 어느 곳에서 찾으리요? 이 역시 도인의 마구니를 제압하는 요절이니 학자는 모름지기 착안하여 살펴볼지니라.”
선사는 심검설에서 선과 교를 밝힘에 있어 조금도 무리와 억설이 없이 선을 깨친 도인다운 품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끝 부분에서 경절문 · 원돈문 · 염불문의 공부하는 요령을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설한 데에서 스승으로서의 대자대비를 공감하게 되어 더욱 돋보인다.
또 臨命終時의 마음가짐을 맨 나중에 설하여 우리에게 생사대사를 해결하도록 촉구한 고차원적인 배려에서 선사를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해짐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이 아니리라.
(4) 업 적
편양선사가 본격적으로 행화하던 시절은 임란이라는 전대미문의 전란을 치른 뒤여서 민심은 흉흉하고 백성들은 기아와 병마에 극도로 시달림을 받는 시기인지라 많은 제약과 어려움이 따랐다. 평양성에서 걸인들을 보살피면서 민심의 소재를 알게 되고 백성들의 고충도 피부로 절감하였으므로 선사는 더욱 자애심을 발하여 내 나라와 내 겨레를 아끼고 애휼히 여겨 자신의 고통쯤은 아예 잊은 채 중생제도에 여생을 바쳤다.
나라가 어지러우매 승풍도 다소 흐린 점이 없지 않았을 터이나 선사는 시종일관 계율을 엄정히 하고 오로지 수행일로만을 부지런히 걸음으로써 전체 승려의 모범이 되었으며 귀감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불법문중의 동량으로서 천하승려의 정신적 의지자가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이타행이 어디 있으며 이보다 더 큰 업적이 또 어디 있겠는가. 선사의 그 모범됨과 귀감 됨의 공덕으로 선사의 문손이 연륜이 쌓일수록 더욱 성하여져서 3백여 년이 흐른 현금에 와서는 전국 전체 승려가 선사의 문손 아님이 없으니 편양선사의 도덕과 복업의 크고 장하심이 하늘과 땅에 가득하다 하겠다.
그런데 필자의 무딘 솜씨로 고작 이 정도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독자들께서는 이해하여 주시기 바라면서 끝을 맺는 바이다.
출처 http://cafe.daum.net/yumhwas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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