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인터뷰 18. 원묘국사 요세 스님
“止觀-염불 아니면 수미산 같은 업장 어이 녹이리”
역사에도 굴곡이 있다. 조선 세종 때를 태평성세라 한다면 몽고와 왜군의 침략 시기는 살육과 굶주림과 눈물로 점철된 고난의 시대라 할 수 있다. 그 고난은 사람들을 절망과 상실로 몰고 간다. 하지만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암울함 속에서 영웅과 성자를 배출하기도 한다.
원묘(圓妙)국사 요세(了世, 1163~1245) 스님도 바로 그런 성자다. 정치가 타락하고 종교마저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내란과 외세의 침략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격동의 시대. 스님은 어둠의 한 가운데서 온 몸으로 희망을 말하고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1163년 지금의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스님은 12세에 지금의 합천 천락사로 출가했다. 그곳에서 천태의 이론과 수행법을 공부한 스님은 23세 때 승과에 합격하고 난 후에도 천태학에 천착함으로 명성을 드날렸다. 그러나 당시 세속화된 불교계에 크게 실망한 스님은 운수납자가 되어 산천을 떠돌았다. 이 때 수선사 결사에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편지를 받게 되고 기꺼이 동참한다. 그 때가 스님의 나이 33세 때인 1198년. 수선사에서 여섯 살 위의 지눌 스님과 함께 여러 해 동안 정혜결사운동을 펼치던 스님은 어느 날 자신의 수행방향을 조계선에서 천태교관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자각하기에 이른다.
이후 스님은 대중들을 위해 천태 해설서를 강의하고 법화경을 독송하고 몸소 끊임없는 참회정진을 계속했다. 54세 때 강진 만덕사지 터에 80여 간의 가람을 개창하고, 70세 되던 해인 1232년 4월 8일 드디어 보현도량을 결성하고 백련결사를 시작하자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참했다. 이들 입사자(入社者)들은 요세 스님에게서 참다운 삶의 가치와 희망을 발견했고, 그들 자신도 염불, 독송, 참회 등을 통해 무명과 번뇌의 옷을 벗고 왕생하고자 애썼다.
그렇게 사바의 중생들을 교화하던 스님은 83세 때인 1245년 가을의 어느 날, 가부좌를 틀더니 “50년 산속에서 썩은 이 물건이 오늘 떠나가니 각자 노력해 법을 위해 힘쓰라”는 말을 남기고 정토로 향했다.
▷스님, 이렇게 뵙게 돼 영광입니다. ‘요세 스님’하면 많은 사람들이 백련결사부터 떠올립니다. 백련결사란 무엇인가요?
“석존께서 이 사바에 나투어 법을 펴신 건 모든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함이었소. 그러나 세월이 흘러 말법시대가 되자 법은 멀어지고 중생들은 부평초마냥 고해를 떠돌게 됐다오. 백련결사는 초발심으로 돌아가 신심과 원력으로 나를 구제하고 세상을 구제하자는 신앙운동이라 할 수 있지요.”
▷스님께서는 산 속에 들어온 지 50년간 개경의 화려한 땅을 밟지 않았다는 기록을 보더라도 정치세력과의 결탁을 거부하고 수행인의 맑고 깨끗한 지조를 평생 지켜낸 듯 합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백련결사를 주창하기에 앞서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정혜결사에 참여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이었나요?
“소납이 33세 때 지눌 스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오. ‘물결이 어지러우면 달이 나타나기 어렵고, 깊숙한 방일수록 등은 더욱 빛난다. 그대의 마음 그릇을 바로 하여 감로의 장을 쏟지 말기를’이라는 내용이었소. 사실 그 편지는 내게 충격이었소. 지눌 스님이 당시 불교계에 대해 비판적인데 대해 나도 크게 공감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조계선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오. 그래서 정혜결사에 동참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스님께서는 몇 해 지나지 않아 정혜결사에서 이탈하셨던데요?
“지눌 스님은 참으로 보기 드문 선지식이었소. 명철한 지혜와 보살의 자비로 수많은 사람들을 돈오의 문으로 이끌었소. 그러나 나는 회의가 들었다오. 조계의 선(禪)을 닦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근기가 있는 분들이었지요. 즉 무지하고 근기 낮은 중생들에게 선은 너무 멀리 있었소. 나는 그들에게 불교가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함에 마음이 아팠다오.”
▷기록에 보면 스님께서 ‘천태사상이 아니면 영명연수 스님이 지적한 120가지 병을 어떻게 극복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지눌 스님만큼 수행에 있어 체계적인 경우도 드물다고 생각하는데 조계선으로는 120가지 병통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하신 부분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눌 스님의 선 체계는 참으로 수승하오. 얘기한 것처럼 상근기 중생들에게는 선으로 이런 병통을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반 범부로서는 그 경지가 불가능하다고 보았소. 그럼에도 지눌 스님께서는 타력적인 정토신앙을 비판적으로 보셨소. 하지만 나는 누구든지 성불 가능한 천태교관과 정토신앙이 대안이라고 보았던 거지요.”
▷스님께서는 삼의일발(三衣一鉢)에 이불도 없이 주무시고, 들어오는 시주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셨습니다. 또 매일 『법화경』 독송, 준제주 1000번, 아미타불 명호 1만 번을 부르셨고, 특히 추우나 더우나 53분의 부처님께 매일 12번씩 돌아가면서 예배를 드렸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천태사상과 염불이 어떻게 연결되며, 또 이렇게 고행에 가깝도록 참회하고 예배하셨던 이유는 무엇인지요?
“천태 지의대사께서도 ‘모든 존재가 모두 꿈과 같다고 생각하라. 이와 같이 염불하고 결코 중단하지 말라. 지극히 염불하면 아미타불의 국토에 태어나리라’고 하셨소. 부처님이라는 상을 모두 여윔으로서 부처가 될 수도 있겠지만 염염상속 부처님을 잊지 않음으로서도 부처님이 되어가는 것이오. 또 지극한 참회란 지극한 발심이오. 자신의 업장이 수미산 같음을 알아 깊이 참회하지 않고는 업장소멸은커녕 참다운 발원도 있을 수 없다오. 그렇기에 닦음의 시작과 끝이 참회에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만년에는 오직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구하였다고 하는데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 질문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오?”
▷스님, 정말 서방정토가 있습니까? 유심정토라면 모르겠지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지요. 보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라오.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아미타불은 서양의 유일신과 비슷한 것인가요?
“아미타 부처님도 인연에 따라 나투고 중생교화도 하지요. 자력이다 타력이다 얘기를 하지만 타력 속에 자력이 있는 것이고 자력 속에도 타력이 있는 것 아니겠소. 중요한 건 그 아미타부처님과 우리가 둘이 아니라는 점이지요.”
▷스님께서는 끝까지 정치권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왜 공개적으로 몽고에 반기를 들었나요?
“죽어가는 이는 이도 중생이요, 죽이는 이도 중생입니다. 죽는 이도 고통이지만 죽이는 이도 그 업장의 고통의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 고통과 악연이 자행되는 현실을 어찌 외면할 수 있었겠소.”
▷스님의 삶이야말로 처절하게 찢겨가는 역사현실을 바라보는 양심적 종교인의 사명이자 그래도 끝내 피 묻은 역사를 다시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던 보살의 비원이었던 것 같습니다. 혹시 21세기의 대중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레미제라블』에서 빅토르 위고라는 작가는 ‘인간은 사형을 선고 받은 사형수다. 다만 무기집행유예인 것이다’라고 했다지 않소. 일각이 쌓여 한 시가 되고 한 시가 쌓여 하루가 되고 한 평생이 됩니다. 그렇기에 일분일초가 중요하고 하루가 귀중한 것이지요. 바로 지금의 마음과 행위야말로 일대사인연으로 이에 충실할 때 깨침도 있고 서방정토도 있을 것이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요세 스님 어록
“모든 법의 실상은 맑고 깊어 말하면 이치를 잃고 들어 보이면 종지(宗旨)를 어긴다. 나의 종지는 법화 일대사인데 분에 따라 묘하게 해득한 것은 오직 이뿐이다.” (백련사원묘국사중진탑비 중)
(임종을 앞두고 제자 천책 스님이 ‘세상을 떠날 때 정(定)에 든 마음이 곧 극락정토인데 다시 어디로 가시렵니까?’라는 질문에) “이 생각만이 동요하지 않으면 바로 이 자리에서 도가 나타나니 나는 가지 않으면서 가고, 그들은 오지 않으면서 오니 서로 감응되는 것이며 실상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백련사원묘국사중진탑비 중)
공경과 찬탄
“일심삼관의 근본종지와 교설이 사라지려 할 때 크나큰 진리의 깃발을 세어 아직 듣지 못한 세상의 대중을 일깨워주고 근기가 없어 믿지 못하는 자에게 믿음을 내게 하여 조사의 길을 다시 일으키시며 널리 베풀어 그 다하는 끝이 없게 하셨다.” (원묘국사 비문을 쓴 고려 최자)
“요세의 불교사상은 법화관을 바탕으로 참회행과 미타정토신앙을 실천방향으로 강조한 것으로 이는 13세기 전후의 혼란상에 처해 있던 불교계에 자각을 촉구한 것일 뿐 아니라 대다수 농민, 천민층까지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며, 정토신앙이 민중 속에 깊이 정착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고익진 전 동국대 교수)
“원묘 국사와 그의 백련사, 이는 오늘날 바른 사상적 지표를 잃어버린 채 헤매는 한국불교의 사문들과 총림 사원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흰구름만을 바라볼 뿐 역사 앞에 어떤 긍정적인 역할도 해내지 못하는 교단을 향해 자신의 터전 위에서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실천의 길이 무엇인가를 뚜렷이 제시해 주고 있다.” (조계종 종회의원 학담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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