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인터뷰 20. 백운거사 이규보
“밤에 누워 능엄경 암송하니 이불 속이 도량일세”
백운거사 이규보(1168~1241)는 훗날 다산 정약용이 ‘문장이 동국의 으뜸’이라고 칭송했을 정도로 한국 한문학사에서 시인으로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또 문학적인 성취는 물론 문학 장르의 폭넓은 활용으로 중세기를 밝혀준 이상적인 교양인인 동시에 한국지성사에서도 맞수를 찾기 어려운 위대한 문화인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어릴 때부터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읽고 글재주가 탁월했던 그는 22세 때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했으나 관직을 받지 못하고 시문을 지으며 세상을 관조하며 살았다. 빈궁에 시달리다가 32세 때 최충헌의 초청시회에서 그를 칭송하는 시를 짓고 나서 비로소 전주목이라는 벼슬길에 올랐으나 부임 1년 4개월만에 동료들의 비방을 받아 면직되었다.
무신정권기라는 혼돈의 시기를 살아야 했던 그는 최 씨 일가에 의해 등용과 좌천을 반복하다가 최이에 의해 다시 등용돼 고위관직자의 길을 다시 걸을 수 있게 됐다. 특히 몽고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몽고에 대한 국서의 작성을 전담하는 한편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많은 글들을 쓰기도 했다.
그는 혜문·수기 스님 등 당대의 고승식들과 교유하며 불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추구했으며, 400수가 넘는 불교시를 남기기도 했다. 특히 청평거사 이자현과 더불어 고려의 양대 거사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그는 선· 능엄· 화엄· 법화 등 불교의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아들을 출가시키기도 했고, 임종을 앞두고 서쪽을 향해 옷을 갈아입고 세상을 떠났을 정도로 불교에 대단히 심취했다.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지극한 신심을 지녔던 백운 이규보 거사. 그는 당대 최고의 고승들에 필적하는 재가불자였고, 수선사 혜심 스님과 함께 불교시가 가진 문학성을 최고로 고양했던 인물이었다.
▷거사님께서는 젊은 날 스스로 유학자라고 자부한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알다시피 고려시대의 두 축은 유교와 불교였소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유학자라 하더라도 불교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었고 나 또한 어릴 때부터 여러 경전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소. 특히 내 주변에는 훌륭한 스님들이 많이 계셨다오.”
▷그래도 한 때 불교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하신 것으로 압니다만.
“사실 다른 많은 사대부들처럼 나또한 불교를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었소. 청산에 들어가 홀로 나물먹고 물마시며 일생을 마치도록 홍진(紅塵)을 밟지 않은 이들이 있는데 이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일 뿐 어찌 대도(大道)라 하겠소. 참다운 수행자라면 능히 세상과 함께 살아가되 세상에 집착하지 아니해야 되는 것 아니겠소. 또 당시 나는 부처를 팔아 이익을 도모하지만 터럭만큼의 선행을 하지 않는 승려들과 기이한 행동으로 시주를 얻어내려 하는 일도 숱하게 보았소이다. 그러다보니 부처의 가르침이 무엇이냐를 떠나 부정적인 시각으로 비춰지더이다.”
▷그러한 불교계의 상황이 하루아침에 바뀐 것은 아닐 텐데 불교에 귀의하게 된 까닭은 무엇 때문인지요?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잖소. 처음 사람으로 인해 불교에 실망했다면 나중에 사람으로 인해 불교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됐소이다. 내가 스님들과 교유를 많이 하다보니까 많은 일들이 있었소. 천수사 지각 대선사도 그 중의 한 분이오. 나는 시와 술과 거문고를 대단히 좋아했소. 그런 나는 절에 가서 술 마시는 것도 당연히 여겼고 술에 취해 미치광이 짓도 참 많이 했소.
그런데 어느날 선사께서 내게 “그대의 광란은 나이가 젊은 탓이니 장차 스스로 반성할 것이다. 옛날 사대부는 법화경을 많이 읽어 마음 닦음의 요법으로 삼았는데 그대도 그렇게 하겠는가?”라고 물으셨소. 그 간곡함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소. 나는 그 자리에서 법화경 8만7500자를 읽었는데 실로 중생이 일승(一乘)으로 들어가는 드넓은 문이었소. 나는 그 때 선사께 “3일 내에 법화경을 모두 외우겠다”고 했더니 믿지 않았소. 그러나 나는 약속대로 3일 뒤 스님께 법화경을 외워 바쳤고 물러나와 법화경에 대한 송(頌)도 짓게 되었소.”
▷『동국이상국집』에는 ‘늙자 유교 경전 그만두고 옮겨가 능엄경을 배웠지. 밤에 누워서도 암송하거늘 이불 속이 오히려 도량일세’라는 시가 있더군요. 만년에는 늘 능엄경을 끼고 사셨던 것 같습니다.
“승통이셨던 수기(守其) 스님의 소개로 읽게 됐다오. 처음 그 경전을 읽고 나서 너무 후회가 됐소. 이런 가르침을 너무나 늦게 만났음을 말이오. 나는 경전을 외우고 밤이면 늘 능엄경을 암송하며 잠들었소. 능엄경은 내 때묻은 흉금을 씻어내고 참된 마음을 어떻게 찾아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했소. 그 즐거움이 임금이 되는 것에 뒤지지 않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했겠소.”
▷거사님께서 선에 대한 이해도 깊었던 것은 알겠지만 지나치게 호국사상과 결부시키신 것은 아닌지요?
“일촌(一村)밖에 안되는 마음의 크기지만 쓰기에 따라서는 천리나 되는 크기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마음이오. 하늘을 덮은 구름이 걷히면 달이 환하고 바람이 그치면 물결이 잠잠해지지 않소. 우리 민족의 마음먹기에 따라 몽고가 아니라 더한 나라가 침략한다고 하더라도 거뜬히 막아낼 수 있다고 보오. 그리고 이것을 자각시켜 줄 수 있는 게 나는 선이라고 믿었소.”
▷혹자는 거사님이 정권의 욕구에 부합하며 기득권을 누린 문약한 지식인이라고 비판합니다. 특히 ‘도(道)를 지키는 것이 관직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는 비판도 들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아무리 왕이 허수아비이고 무신들이 정권을 휘두른다고 해서 백성들이 어디 가겠소. 관리들이 덩달아 착취한다면 백성들에게 그것은 생지옥과 다르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도 홀로 도를 지키는 것이 났다고 하는 무리들은 관직을 지키는 근본이 도임을 알지 못한다고 밖에 볼 수 없지 않겠소. 나는 내 ‘정직’만을 제외하고 모든 것과 타협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거사님의 글을 읽다보니 ‘만물이 곧 일류(萬物是一類)’라고 강조하셨더군요. 실제 「쥐를 놓아주다」라는 시에서는 ‘사람은 하늘이 낸 물(物)을 도둑질하고/ 너는 사람이 도둑질하는 것을 도둑질하누나/ 다 같이 살기 위해 하는 짓이니/ 어찌 너만 나무라겠는가’라고 하며 쥐를 놓아주기도 하고, 「술에 빠진 파리를 건져주다」라는 시에서는 ‘남을 헐뜯는 사람 같아 널 싫어하나/ 술에 빠져 죽으려 하니 맘이 아프네/ 살려주는 은근한 이 마음 잊지 말아라.’는 시도 있더군요. 이를 잡아 화롯불에 던지지 않고 살려주는 자비심이나 목민관을 하시면서 도둑질한 백성을 벌주지 않은 것. 또 군수 몇 사람이 부정하게 재물을 모아 벌을 받았다는 얘기는 듣고 ‘그대는 보라 강물을 마시는 저 두더지도/ 그 배를 채우는데 만족하거늘/ 묻노니 네놈들 입은 몇 개나 되길래/ 백성을 그리도 뜯었나’라고 쓴 시에서도 거사님의 일관된 사상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사람과 동물이 다른 게 무에 그리 많겠소. 오히려 인간의 지나친 욕망이 인간은 물론 만물을 해치고 훼손한다오. 지혜와 자비는 ‘말’이나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며 ‘실천’의 문제인 것이오.”
▷거사님의 생활과 글에서는 단순한 대문호의 모습을 넘어 심오한 이치를 깨친 각자(覺者)의 풍모가 느껴지곤 합니다. 또 상투성이나 진부함을 벗어난 창조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것도 물론이고요.
“‘신의(新意)’, 그러니까 창조적 상상력이 진실과 사물의 본질을 포착한다고 나는 생각하오. 따라서 잔재주나 외면적 화려함, 겉치레를 숭상하는 글은 배격하려 했소. 그럴 때 글이 자신을 성찰토록 함으로써 생명의 본성을 되찾게 하고 온갖 구속의 틀로부터 벗어나 자유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요즘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지요?
“고전을 가까이 하십시오. 석가와 공자 등 성현과 선지식들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고전이기 때문이오. 책이란 법을 얻을 도구로 얻고 나면 언제가 버려야 할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다운 삶을 열망하면서 그것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고민하는 사람은 고전에서 지혜와 빛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진성규 「이규보의 불교관」, 강석근 「이규보의 승려 교유시」, 정제규 「이규보의 불교이해와 수능엄경 신앙」, 김인호 「이규보와 최해의 불교인식과 비판론」, 박희병 「이규보의 생태주의 사상」등
백운거사 어록
“산에 거하거나 집에 거하거나 오직 도를 즐기는 자라야 거사라 칭할 수 있는데 나의 경우에는 집에 거하며 도를 즐기는 사람이다.” (동국이상국집 중)
“쇠잔한 이내몸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허리에 찬 인수를 풀고자 하네/ 한가히 집으로 물러가/ 무엇으로 나날을 보낼까 하니/ 때로는 거문고를 타며/ 연달아 두강주를 마시리/ 무엇으로 때 묻은 흉금 씻어낼까/ 백낙천의 시를 펴보리/ 무엇으로 수양을 할까/ 능엄경을 외리라/ 이러한 즐거움이 이루어진다면/ 임금이 되는 것에 뒤지지 않으리/ 옛 친구들 몇 명이 남았는지/ 맞이하여 노경의 벗으로 삼으리라.” (동국이상국집 중)
“사대(四大)는 본래 있지도 않은 것/ 어느 곳을 좇아 이르렀는가/ 뜬구름 다시 일어나 사라지듯/ 그 근원 알 수 없어라/ 그윽이 관조하면 모두가 공(空)인 것을/ 그 누가 태어나 늙고 죽는가/ 나 자신은 자연으로 만들어진 몸/ 본성대로 순리를 따를 뿐/ 저 조물주야/ 어찌 여기에 간여했으리.” (동국이상국집 중)
찬탄과 평가
“이규보는 고려후기 불교계에서 중요시되었던 불교적 논리를 나름대로 이해하고 구체화 시켜 사회적 문제점을 치유하는 방법으로까지 제시하고 있다. 학문적 본령은 유학자였지만 왕성한 지적 호기심 때문에 만년에는 불교인으로서 일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중앙대 진성규 교수)
“이규보가 한국의 최고 수준의 시인으로 인정받는 저변에는 선시가 열어 놓은 언어에 대한 철저한 자각, 역설적이며 과정적인 표현방법 그리고 형이상학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 제한받지 않는 상상력과 같은 선학(禪學)의 방법론을 도입하여 문학적인 지평을 크게 확장했다.” (동국대 이강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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