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옛스님 이야기

42. 백곡(白谷)화상

slowdream 2008. 1. 17. 14:19
 

42. 백곡(白谷)화상

- 척불(斥佛)의 부당성 항의한 대장부 -



(1) 백곡(白谷)의 생애


백곡허능(白谷處能)(1619-1680)은 숭유배불정책으로 인해 불교가 그 명맥을 유지하기조차 힘에 겨웠던 조선 중기에 출현하였다. 그는 당시 가혹했던 배불정책에 대해 공식적으로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시정을 촉구했던 유일한 승려로 기록되고 있다.  전기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백곡의 생애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유문집인 『대각등계집(大覺登階集)』『백곡선사탑명(白谷禪師塔銘)』, 이 탑명을 쓴 최석정(崔錫鼎)의『명곡집(明谷集)』 등 단편적인 몇몇 기록들을 통해 그 편모를 더듬어 볼 수 있을 뿐이다.


백곡의 속성은 전(全)씨, 자는 신수(愼守), 광해군 9년(1619)에 태어났다. 법명은 허능(處能), 백곡은 그의 법호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속리산에서 살았다. 속리산에서 2-3 년을 배우다가 17-18세 무렵에 서울로 올라왔는데 서울에서의 백곡은 불학(佛學)보다는 잠시 한문과 유학에 더욱 전념하고 있었다. 이때 백곡은 주로 동양위(東陽尉) 동애(東涯) 신익성(申翊聖)(1588-1644)의 집에 머물면서 경사(經史)와 제자(諸子)의 책을 읽고 유학과 문사에 대하여 깊은 조예를 갖게 된다. 동애와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선조(宣祖)의 부마(駙馬)이며 병자호란 당시 척화오신(斥和五臣)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한 그와의 친분은 어쨌든 백곡으로 하여금 당시 고관대작 및 지식인들과의 교제 폭을 넓게 해주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경사(京師)에 머물면서 그는 고관 문사들과 더불어 시문(詩文)으로 두텁게 교유하였으며 약관에도 채 이르지 못한 나이에 기재(奇才)로 불릴 만큼 문명(文名) 또한 높았다. 그러나 백곡은 이 같은 경사제자에 대한 지식이나 뛰어난 문명에만 안주하지는 않았다. 동애의 집에서 4년을 지낸 그는 어느날 문득 ‘기사(己事)가 미명(未明)함’을 깨달았다. 그 길로 백곡은 멀리 지리산 쌍계사로 내려가 벽암각성(碧岩覺性)(1575-1660)을 찾아뵙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미 15세 때 속리산에서 출가한 몸이기는 했지만 진정한 출가는 이때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나이 20세를 조금 넘겼을 무렵의 일이다. 각성의 문하에서 20년 동안을 수도에 전념한 후에 그는 스승의 법을 전해 받았다.


그로부터 백곡은 중년에는 서울 가까운 산사에 머물렀으며, 현종 15년(1674)에는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 되어 남한산성에 있다가 3개월이 채 못 되어 사임하고 말았다. 이후 백곡은 얼마동안 표연히 남북을 두루 유행하며 속리산 · 성주산 · 청룡산 · 계룡산 등지에서 법석을 열어 전법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는 그의 나이 60세 전후의  일이므로, 학덕이나 사상이 완숙한 경지에 이른 시기였다. 그는 대둔산 안심사에서 가장 오래 주석하였는데, 숙종 6년(1680) 7월 2일 64세를 일기로 입적하니 『대각등계집(大覺登階集)』『백곡집(白谷集)』 2권이 전해지고 있다. 그의 유문집을『대각등계(大覺登階)』으로 제명한 것으로 미루어 그는 또한 대각등계라고도 불렸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백곡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여기서 잠시 그의 저술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대각등계(大覺登階)』는 물론 불교사상을 체계적으로 다룬 저술이 아닌 그의 시문집이다. 우리는 그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나 문장을 통하여 그의 시와 문사가 얼마나 유려하고 호방 · 웅건한가를 친히 접해 볼 수 있다. 실제로 그의 시재(詩才)는 당시 선배 거공(鉅公)들의 아낌없는 사랑과 칭찬을 받았음은 물론, 효종(孝宗)같은 이도 세자로 있을 때에 백곡의 문덕이 탈속의 높은 경지에 있음을 극찬한 바 있다. 그는 선사(禪師)이면서도 난해한 선시류(禪詩類)가 아닌, 조야의 상찬과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격조 높은 작품들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한국 시문학사에 있어서도 특출한 존재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그의 이 같은 뛰어난 시문이 아니다. 문집 하권에 제사(諸師)의 비문 · 행장 · 記 등과 함께 수록되어 있는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 1편의 존재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국가의 가혹한 배불정책에 대한 불교측의 공식적인 항의인 동시에 백곡의 분명한 호법의지를 보여주고 있는『간폐석교소(鍊廢釋敎疏)』는 오직 이 문집에만 그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대각등계집(大覺登階集)』은『간폐석교소(鍊廢釋敎疏)』를 통해 조선불교의 암울했던 시대상황과 함께 당시 불교계의 호법의지의 일단을 전해주고 있는 만큼, 그 사료적 가치 또한 높이 평가할 만한 문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 법계(法階)와 선교관(禪敎觀)


여말선초에는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의 문하 법손들이 적지 않게 배출되어 법맥을 상승해 왔다. 그러나 곧 이어 단행된 조선 초기의 종파 축소 및 통폐합을 비롯하여, 이후 도첩제 및 승과제의 폐지 등으로 불교계는 종맥가통마저 상실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럴 무렵에 서산대사 휴정(1520~ 1604)이 출현하여 선대상전(先代相傳)의 법맥을 확고하게 일으켜 세우고 있음은 이미 주지하는 사실이다. 휴정이 확립한 법맥은 물론 그의 법조 벽송으로부터 영관으로 이어져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 휴정보다 나이는 23세 연하이면서도 동문의 위치에서, 당시는 물론 오늘의 한국 불교계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던 고승으로 부휴선수(浮休善修)(1543 -1615)가 있다. 즉, 지엄으로부터 영관에 이어진 임제의 법맥이, 영관 이후에는 휴정과 선수 양대 문하로 나누어져 발전되어 나온 것이다. 백곡은 이 선수파의 법계에 속한다. 선수의 7백여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벽암각성의 법을 전해 받았으므로, 그는 곧 선수의 법손이 되는 것이다.


영관 이후 휴정의 문하와 선수 문하의 활동은 불교계 내의 법계형성 분포로나 당시 외란에 처한 국가적 현실참여에 있어서 양대 산맥을 이룬다. 흔히 휴정 이후 조선 불교계는 휴정 문하에 의하여 주도된 것으로만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은 선수 이후 각성, 처능 대에 이르러서는 휴정 문하 못지않게 그 세(勢)가 번성하였다. 국가적 현실참여의 활동 면에서 보더라도 임진왜란 때에는 휴정과 그 문도에 의하여 의승군의 활동이 주도되다가 병자호란 과정에서는 양계파가 쌍벽을 이루고 각성 이후 응준과 백곡이 팔도도총섭을 역임했던 사실 등이 그것을 말해준다.


선수, 각성으로 전해져 온 법을 이은 백곡의 선교관은, 휴정의 그것과 기본적으로는 입장을 같이하면서도 여기서 한 걸음 더 발전적인 모습을 띠고  있어 눈길을 끈다. 즉 선교관은 철저하게 합일적이고 일치적인 것이다. 이는 한국불교의 통합사상적 성격을  또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 볼 수 있게 하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한국불교의 통불교적 전통은 신라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을 그 근원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원효의 사상이 고려시대에는 의천의 교관겸수로 나타나고 그것은 다시 지눌의 정혜쌍수로 전개되면서 선교일치의 총화적이며 통불교적인 사상의 흐름을 형성해 왔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런 사상이 휴정(休靜)에 의해 재삼 확인 실천되고 있었다 할 만한데, 여기서 편의상 백곡의 선교관을 휴정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살펴본다. 휴정의 선교관은 그의『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말하고 있듯이‘선시불심(禪是佛心) 교시불어(敎是佛語)’라는 한 마디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세존이 삼처(三處)에서 전심한 것이 선지(禪旨)이며 그 분 일대의 설법이 교문(敎門)이므로 선은 곧 불심이요 교는 곧 불어라는 것이다. 휴정이 입적 10여 년 후에 출생한 백곡도 또한 이 같은 선교일치적 기본 입장에서는 거의 다름이 없다. 그의 문집 가운데 선과 교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짤막한 ‘禪敎說(선교설)’에서 백곡은 ‘선자심야(禪者心也) 교자회야(敎者誨也)’라고 정의하고 있다. 선은 마음으로써 전하고 교는 말을 빌려 홍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교에 대한 이 같은 두 사람의 거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정의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것의 수용에 있어서는 각기 다른 입장을 보여준다.


 즉, 휴정은 선교일치를 말하면서도 수행과정에 있어서는 선과 교를 역시 선후의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 사교입선(捨敎入禪)의 공(功)을 말하고 있음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설은 활처럼 굽은 것이라고 보고 조사의 마음은 활줄처럼 곧은 것이라고 봄으로써 선과교의 우열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백곡의 선교에 대한 견해는 자못 다른 바가 있다. 한 마디로 말해 그의 ‘禪敎說(선교설)‘에 나타나는 일관된 정신은 선과 교로 구분해서 양문을 국집하는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는 선문과 교문이 나누어지고 선문자는 이사난변(理事難辨)하고 교문자는 공유호집(空有互執)함으로써 스스로 오류를 범하는 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가공의 허위를 천착(穿鑿)하며 서로 비방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타인을 그르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고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선과 교가 불이(不異)하면서도 이(異)하고 이(異)하면서 불이(不異)하다고 전제하고, 그 이유로서 선과 교가 오직 그 근원이 하나이므로 도리가 다를 바 없고, 다름이 있다면 심(心)과 구(口)의 다름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이처럼 백곡의 선교관은 이이불이(異而不異) · 불이이이(不異而異)의 입장으로 결국 선교일치로 귀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선교관은 실은 선교 이전의 불분(不分)을 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백곡은 다시 선과 교로 나누어서 그 이(理)가 각각 다르다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 논리적인 방법으로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매우 놀라운 견해를 드러내 보여준다. 그것은 흔히들 세존이 가섭에게 선을 전하고 아난에게 교를 전했다고 하지만, 이는 믿을 수 없다는 논리이다. 다시 말하면 불법은 세존으로부터 가섭 · 아난으로 전해져 온 것인데, 만약 가섭이 선이라면 전교(傳敎)의 아난에게 선을 전할 수는 없을 것이며, 아난의 교 또한 전선(傳禪)의 가섭에게서 선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선이라면 주고받는 자가 다같이 선이지 교가 아니며, 다만 교라면 그 경우도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백곡의 이러한 견해 한 마디로 선종계보설이나 교외별전설 마저 부정하는 것으로서, 대단히 파격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으로 보건대, 백곡은 선과 교가 완전히 합일된 것으로 파악하는 선교관을 갖고 있으며, 이는 휴정에게서와 같은 선과 후, 시와 종, 우와 열의 선교관과는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휴정의 선교관을 초월하는 백곡의 선교관에서 우리는 통불교적 사상의 새로운 전개를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한편, 당시 시대상황에 따른 한 조류였다 할 유불일치 혹은 유불회통사상에 대해서도 그는 보우나 휴정 등과는 분명히 다른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백곡은 두 사상이 진리성에 있어서는 서로 회통될 수 있음을 굳이 부언하지는 않았지만, 그 깊고 얕음과 우열에 있어서 유교는 불교에 비해 천열(淺劣)하다는 것을 직설하고 있는 것이다.


(3)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의 의의(意義)


백곡은 문장에 특출하였고 또 차원 높은 선교관 및 확연한 유불관을 지닌 고승이었다. 그러나 한국불교사에서 그의 존재는 배불정책하의 조선시대에 당당하고 기개에 찬 논조로 국가의 척불에 대해 항소를 제기했던 유일한 승려로서 더욱 크게 부각되어 있다.


가혹한 배불교시책이 단행되었던 조선초 무렵, 이에 대한 불교측의 항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태종 6년에 조계종의 승려 성민(省敏)은 누차 의정부에 조정의 지나친 척불시책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고, 수백 명의 승도를 이끌고 가서 신문고를 쳐 왕에게 직접 척불정책의 완화와 사원 · 전토 · 노비의 복구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비록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불교측의 적극적인 항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함허당 己和처럼《현정론(顯正論)》을 저술하여 유불의 회통성을 주장함으로써 유학자들의 척불론에 대해 불교를 제대로 이해시키고 그 척불론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는 간접적인 저항활동도 있었다.


이처럼 법난이 계속되는 가운데 몇몇 사람의 항거가 있기는 하였으나 그러한 항거도 국초(國初)에 극히 짧은 시기의 일이고 그나마 미미한 것이었다. 또한 상소의 경우도 국초의 승려 상총(尙聰)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당시의 사명· 의암에 의한 몇 차례 예를 들 수가 있다. 그러나 상소의 내용은 불가 내의 자체문제이거나 국난에 대처할 국가 중대사에 관한 문제를 소진(疏陳)한 그야말로 위국충정의 글들로서, 배불시책에 대한 불교측의 저항 및 정당한 주장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이럴 때에 오직 백곡만이 국가의 배불시책에 대항하여 장문의 〈간폐석교소〉를 올리고 있는데, 이는 백곡 이전의 여러 상소들과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한다. 백곡이 생존했던 조선중기만 하더라도 그동안 계속 되어온 척불로 인하여 종단의 피폐상은 물론 승려의 사회적 지위 또한 소위 팔천(八賤)의 하나로 전략되어 있던 시대였다. 따라서 승려들은 국가의 부당한 대불시책에 대하여 저항할 기력조차 상실한 채 다만 현실을 수용하고 침묵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백곡은 정연한 논리로 척불을 논파하고 그 시정을 촉구하는〈간소(諫疏)〉를 제기한 것이다. 이 소(疏)는 조선조 500년간에 걸친 배불정책 하의 불교사에서 단 한 편의 항소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도 더할 수 없이 논리정연하고 간절긴요하다. 그런 점에서 백곡의〈간폐석교소〉는 단연코 우리 불교사 특히 조선조 불교의 역사에서 기념비적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백곡이 이와 같은 항소를 제기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물론 그 동기는 한마디로 국가의 배불정책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 직접적인 동기는 백곡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인수(仁壽) · 자수(慈壽) 양원(兩院)을 철폐하여 승(尼僧)을 환속시키고 봉은(奉恩) · 봉선(奉先) 양사(兩寺)까지도 폐하여 승중(僧衆)을 환속시켜 불교를 사태훼파(沙汰毁破)하고자 한 조정의 결의에 있었다. 즉 현종이 즉위하여 그 원년(1660)에 양민으로서 머리를 깎고 승니가 되는 것을 금하고, 만약에 승니가 된 자는 일일이 환속시키고 또 그것을 어기는 자는 죄를 과하도록 하였다. 그해 2년 정월에는 성 안의 인수원(仁壽院)과 자수원(慈壽院)의 두 원(尼院)을 철폐하고, 봉은사와 자수원에 봉안했던 열성위패(列聖位牌)를 땅에다 묻었으며, 이어서 니중(尼衆)을 환속시키고, 또 봉은사 · 봉선사 까지도 폐하여 승중(僧衆)을 환속시켜 불교를 사태훼파(沙汰毁破)코자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계의 절박한 현실문제가 항소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이지만, 그러나 도첩제 승과제의 폐지 등 백곡 이전에도 그가 제기한 문제 이상으로 가혹한 척불시책이 강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백곡의 항소제기는 눈앞의 절박한 문제에서만이 아닌 또 다른 측면에서 당시 사회의 어떤 변화와 상황이 뒷받침되어 백곡으로 하여금 분연히 항소의 붓을 들게 했던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것은 주로 임진 · 병자 양란의 과정과  그 후 승려들의 국가적 기여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양란의 과정에서 의승군의 활동과 그 국가적 기여는 제한적이기는 하나 척불의 도를 둔화시키고 불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백곡에 앞서 사명의 상소 등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것이 비록 불교 자체와는 무관할지라도 불교와 국가와의 언로가 잠정적이나마 개설되어 있었으며, 승려의 지위가 어느 정도 상승된 것도 사실이다.


임진란 중의 사명 · 영규 등의 특기할만한 공헌은 말할 것도 없고, 백곡의 사승인 각성 또한 임진 · 병자 양란을 통해 크게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는 임란 중에는 스승 부휴를 대신하여 명나라 장수와 함께 바다에서 왜적과 대전하였고, 인조 2년(1624)에는 팔도도총섭이 되어 승도를 거느리고 3년에 걸쳐 남한산성을 쌓았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남쪽에서 3천 명의 의승군을 모아 스스로 의승대장이 되어 북상하기도 하였다. 그런 각성의 제자인 백곡은 그의 상소에서 승려들이 국가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지만, 어쨌든 양란을 통한 불교계의 힘의 성장세를 배경으로 백곡이 〈간폐석교소〉 와 같은 강력한 항소를 제기할 수 있었으리라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4) 간소의 내용


현종 2년(1661)에 올린 백곡의  〈간폐석교소〉는 8천여 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하나의 훌륭한 논저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여기서 백곡은 폐불훼석의 부당 불가함을 논증하기 위해 광범한 사례와 심후(深厚)한 식견(識見)을 구사하여 타당하고도 이를 정연하게 항변 역설하여 위정자의 시정을 촉구하고 있다.


그는 서론적으로 불타의 탄생과 입멸 그리고 불교의 중국 전래와 홍전(弘轉)내력에 대하여 약술한 다음 본론에 들어가 우리나라에서의 훼불훼석의 근거를 6개항으로 요약해 보이고 있다.


그것은 1. 불교가 중국이 아닌 이방(異邦)에서 생긴 것이므로 2. 3대 후에 출현하여 상고(上古)의 법이 아닌 시대가 다른 것이므로 3. 인과응보의 그릇된 견해로서 윤회를 무설(誣說)하므로 4. 농사를 짓지 않고 놀면서 재면(財綿)을 소모하므로 5. 머리를 깎고 법망에 잘 걸려 정교(政敎)를 손상케 하므로 6. 승려임을 빙자하여 요역(徭役)의 기피로 편오(編伍)에 유실이 있기 때문에, 폐불하는 것이라는 가정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 백곡은 자신이 가정한 이 6개항에 달하는 척불논리와 이로 인한 폐불훼석은 부당불가한 것임을 많은 사례와 경전 등에 근거하여 일일이 논파하고 있다. 그런데 대체로 이들 6개항에 달하는 그의 논증은 불교의 철학적인 교리의 측면보다는 현실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불교가 존재해야할 당위성을 역설하는 내용들이다.


그는 또 중국에서 숭불과 억불의 사례를 들어 척불 위정자들의 주위를 환기시키는가 하면, 우리나라로 눈을 돌려 삼국의 숭불흥국과 고려의 봉불(奉佛)이 치도(治道)에 유해하지 않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태조 이래 조선의 역대 왕이 실제에 있어서는 숭불하여 폐불치 않았음을 예를 들어 보임으로써, 당시 국왕 현종에게 재삼 불교의 무해(無害)를 강조하고 봉불의 이익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특히 풍수지리설을 독신(篤信)하던 당시에 도선의 ‘사탑비보설(寺塔裨補說)’을 호소력 있게 강조함으로써 거듭 봉불의 이익을 논하고, 끝으로 상소의 궁극적 목적인 양원(兩院) 즉 내외원당의 훼폐가 불가하다는데 초점을 맞추면서 폐불훼석을 간하는 소의 결론을 끝맺고 있다.


국가정책을 문제 삼아 불교 측에서 공식적으로 이를 항의하고 시정을 촉구한 것으로는 백곡의 간소가 유일한 것이어니와, 이 같은 상소에 대한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그 정확한 결과는 알 수 없지만 다만 그 후 몇 가지 조치와 추세를 통해 상소의 결과를 짐작해볼 수는 있다. 즉 양원은 이미 철훼되었지만 봉국사와 봉선사는 끝까지 철폐되지 않고 존속되어 왔다는 점과, 현종이 그 만년에 봉국사를 세우게 하는 등 신불(信佛)의 흔적이 보이는 점, 또 현종 15년에 백곡 자신이 팔도도총섭에 임명되었다는 점 등은 곧 그의 상소가 어느 정도 주효했던 것으로 보아지는 것이다.


이처럼 백곡은 대문사(大文士)로서, 선교관(禪敎觀)에 있어서는 독자적인 사상가로서, 또 배불의 시대상황을 극복하려 했던 호법자(護法者)로서, 조선조 불교사에 불멸의 족적을 남기고 간 것이다.


출처 http://cafe.daum.net/yumhwas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