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인터뷰 22. 태고보우 선사
내 마음이 곧 정토요 내 성품이 아미타불
한국불교사에서 한 획을 그었던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스님은 경기도 양평이 고향으로 13세 때 회암사 광지선사에게로 출가했다. 9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의 종풍에 따라 스님은 선가의 가풍에 자연스레 젖어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를 참구했으며, 교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26세 때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교학의 한계를 깨닫고 궁극적인 깨침에 이르고자 모든 반연을 끊고 화두에만 전념했다.
죽음을 넘나드는 치열함으로 정진하던 33세 때 용맹정진 7일만에 1차 깨달음을 경험하고, 이어 37세 때에는 『원각경』을 읽다가 ‘일체가 다 사라지면 부동(不動)이라 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2차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스님은 조주 스님의 ‘무(無)’자 화두를 들고 다시 정진한 끝에 38세 때 활연히 깨치고, 다시 1700공안을 일일이 참구하던 중 ‘암두밀계처(巖頭密啓處)’에서 오래 막혀 있다가 홀연히 그 뜻을 깨닫고 마침내 중생의 안목에서 벗어나 활활자재한 ‘태고가’를 부를 수 있게 됐다.
백운암에 머물던 스님은 고려에 온 중국 스님의 권유로 47세 때인 1346년 원나라에 건너갔고, 다음 해인 1347년 임제 18세인 석옥청공 스님을 만나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석옥 스님은 태고 스님에게 ‘불조의 명맥이 끊이지 않게 하라’는 당부와 함께 가사와 주장자를 건넸고 이에 스님은 깨달음을 노래한 태고암가를 올렸다.
48세 되던 해 원나라에서 돌아온 스님은 중흥사에 석장(錫杖)을 걸었다. 이후 인연 따라 산천을 주유했고 수많은 납자들이 진리의 눈을 뜰 수 있도록 이끌었다. 이런 가운데 1357년, 보위에 오른 공민왕은 스님을 왕사로 임명하고자 했으나 스님은 끝내 거절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왕사의 법복과 인장을 스님의 처소로 보내 주자 스님도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여 왕사로서 원융부를 설치해 종단의 화합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불과 10개월 뒤 스님은 스스로 왕사의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소설산에 머물었고, 1371년 공민왕은 이러한 스님을 나라의 스승인 국사로 진봉했다.
교단의 자정과 수행풍토를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스님은 1382년 ‘사람의 목숨이란 물거품처럼 공허한 것, 팔십여 년이 꿈속에서 지나갔네. 임종의 오늘에 이 몸 버리니 둥근 해가 서봉에 지네’라는 임종게를 설하고 마침내 적멸에 들었다. 스님의 세수 82세 때였다.
▷스님에 대한 평가가 오늘날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님을 한국불교의 중흥조이자 한국 간화선의 종조로 모시는 분들도 있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정치승·사대주의자라고 얘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가 나를 알지며, 누가 나의 진면목을 말하겠는가. 종조론에 편승해 떠받들거나 폄하하는데 있어 내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다만 한가히 태고가 부르며 무쇠소 거꾸로 타고 인천(人天)에 노닐 뿐이지.”
▷그래도 스님께선 간화선의 종조로 추앙되는데 나쁘실 것은 없지 않을까요?
“사람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지하는 것이 불교네. 선은 근본자성을 깨달아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얘기지. 그런데 주인공으로 살지 못하면서 떠받들기만 한다면 그건 선이 아니라 외도일 뿐이지.”
▷스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의 깨달음을 통해 대오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스스로 깨우쳐 걸림이 없으면 됐지 굳이 중국으로 건너가셔서 석옥청공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세간에야 나라도 국경도 있겠지만 법에 있어서야 그런 게 어디 있겠나. 화두를 타파했지만 그것이 완벽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본색종사를 만나 결택하는 방법 밖에 없네. 내겐 그런 분이 바로 석옥 선사로 나와 그 분의 선지(禪旨)가 계합함을 확인한 게지.”
▷그래도 중국의 법맥에 치우치신 점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임제종을 계승한 점만 강조되다보니 고려와 신라의 전통을 가벼이 여기고 중국의 문화만을 중시하는 풍토가 오랫동안 고착됐던 건 아닐까요?
“내가 석옥 선사를 매우 존경한 것은 사실이네. 허나 이는 언어가 끊긴 자리의 선지가 계합하고 깨달음을 증명한 데 대한 법은(法恩)을 중히 여김이었네. 그렇다고 선풍(禪風)까지야 같겠는가. 나는 원융불교적 이념에서 간화선에 중점을 두되 염불선· 화엄선도 수용하려 했네.”
▷스님께서는 의외로 26세 때 화엄선과(華嚴選科)에 합격하신 걸로 나타납니다. 화엄에도 깊은 안목이 있으신 것 어떻게 다시 선(禪)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연화장세계 또한 깨침이 펼쳐진 세상 아니겠는가. 허나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센다면 반푼어치의 이익이 없다네. 세존께서도 아난에게 ‘네가 아무리 삼세의 부처가 말씀한 12부 경전을 기억해 가지더라도 그것이 하루 동안 무루(無漏)의 학(學)을 닦는 것만 못하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부처나 조사들이 전한 묘한 진리는 문자나 말을 넘어서는 것이네.”
▷그럼 경전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씀인가요?
“경전은 결과적으로 삼매를 설파하고 있지 않나. 이러한 도리에서 간경(看經)은 삼매를 이룰 때만이 올바른 간경일 수 있지 않겠나. 나는 경이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올바른 간경에 대해 얘기하는 것일세.”
▷그럼 당시에도 염불이 지금처럼 성행했던 것으로 아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내 마음이 곧 정토요, 내 성품이 아미타불이네. 아미타불의 명호를 마땅히 마음에 두어 항상 잊지 말고 생각생각에 그침이 없고 나아가 그 염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돌이켜본다면 화두와 다르지 않네. 또 그럴 때 아미타불이 뚜렷이 나타날 것이라네.”
▷스님께서는 공민왕 5년에 왕사로 책봉되신 후 곧바로 개경의 광명사에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고 교단의 통합을 꾀하셨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당시 참선하는 이들은 그 문벌을 배경으로 서로 자기는 잘났고 저쪽은 못났다 하여 싸움이 끊이질 않았네. 선이란 원래 하나의 문이건만 울타리를 만들어 싸움만 일삼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나. 시대의 폐단을 혁신해 불법 중흥의 길을 도모하고자 하는 내 의도였지. 『치문경훈』을 유통했던 것도 그 때문이기도 하고…. 물론 오해와 비난도 많이 받기는 했지만 말일세.”
▷임금께 신돈 스님을 멀리하라고 하신 이유도 충정 때문이었습니까?
“은혜를 아는 것은 위없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고, 은혜를 갚는 것은 일체중생을 교화해 위없는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충고가 사람을 변화시키기는 어렵지. 그럼에도 임금의 은혜를 입고 있는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직언을 하는 게 보은(報恩)이라 여겼네.”
▷스님께서 홍건적의 난을 예고하여 성곽을 수축케 하고 이듬해에는 미지산에 들어가 초당을 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피난을 준비케 했다는 등의 일들도 보은과 둘이 아니겠군요?
“부모님, 도반, 임금님, 시주하는 분, 그리고 이름 모를 들풀 하나까지도 모두 다 은혜를 갚아야 할 대상이지.”
▷오늘날 불교계에는 60여 개가 넘는 종파를 비롯해 많은 문중과 계파들이 대립하고 있고, 종조· 법통 문제의 갈등도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대립은 나를 내세울 때 있네. 어떤 합리적인 말이라도 욕망에 기반하고 있다면 마설(魔說)일 뿐이지.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곧 욕망, 분노, 어리석음에 둘러싸인 ‘거짓 나’에서 벗어나 본래면목을 되찾는다는 게지. 법통과 법맥 또한 조선시대 불교인들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면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전통을 세워야 하지 않겠나. 그게 바로 선의 정신일세.”
▷요즘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부처님이 어찌 성인이 아니며, 여러 조사님네들이 어찌 다른 사람들이겠는가. 다만 이 ‘마음’을 밝혔을 뿐이네. 모든 게 꿈이요, 허깨비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이슬 같고, 번갯불 같다네. 고양이가 쥐를 잡듯 닭이 알을 품듯 부단히 정진해 부디 마음자리를 밝히시게나.”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 문헌
『태고화상어록』, 종범 스님 「태고 보우의 선풍에 관한 연구」, 최병헌 「태고보우의 불교사적 위치」·「조선시대 불교법통론」, 권기종 「한국불교에 있어서 태고보우국사의 원융불교사상과 그 위상」, 이봉춘 「태고사상과 한국불교의 갈등현상」 등
태고 어록
‘생각을 내기 전에 틀렸고 입을 열려 할 때 더욱 부질없다. 비 오고 서리 온 봄가을이 얼마인데 어찌 한가롭게 오늘을 알겠는가. 거친 밥 고운 밥 모두가 제각각 먹으니 운문의 호병 조주의 차인들 어찌 이 암자의 무미식(無味食)만 하랴.’ (태고화상어록 중)
‘놓아라! 망상을 말라! 이것이 여래의 대원각이다. 하나 속에 일체이고 일체 속에 하나, 하나도 없는 데서 항상 또렷하네.’ (태고화상어록 중)
“한 물건이 있으니 밝고 또렷하여 거짓 없고 사사로움 없어 고요히 움직이지 않으면서 대영지(大靈知)가 있다. 본래 생사가 없고 분별이 없고 언설이 없다. 이 한 물건은 항상 사람사람에게 다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분명하고 또렷하다. 낱낱 것에서 밝고 물건마다에서 나타나니 모든 일에 변함없이 밝게 나타남을 방편으로 ‘마음’이라하고, ‘도’라 하고, ‘만법의 왕’이라 하고, ‘부처’라 한다.” (태고화상어록 중)
찬탄과 공경
“내가 만약 고려로 돌아가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면 스님을 나의 스승으로 삼으리라.” (고려 공민왕)
“중국에서 법을 폄에 스님의 명성이 천하에 퍼졌고, 임금의 스승이 되어 은혜는 온 국민이 입었다.” (고려말 이색)
“달마는 서천에서 동토에 법을 전하였으니 동토의 초조(初祖)가 되며, 태고는 중국에서 해동으로 등불을 전하였으니 해동의 종조가 된다.” (전 조계종 종정 성철 스님)
“세간 속에서 중생의 구염(垢染)이 없이 중생과 함께 하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이 태고 스님의 선풍(禪風)이다.”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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