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부휴선사(浮休禪師)
--名利 외면한 수행승의 본보기--
(1) 생 애
浮休禪師는 속성이 김씨이고 법명은 善修이며 호는 浮休로 전북 獒樹(지금의 남원) 사람이다. 부친의 이름은 積山으로 조상은 일찍이 신라 조정에 높은 벼슬을 지낸 대성이었지만 신라가 멸망하면서 가족도 몰락하여 서민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李씨인데 자식이 없음을 근심하다가 부부가 함께 서원하기를 만약 자식을 얻으면 출가시키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길가에 있는 한 奇石에 자식을 얻기를 기도했는데 어느날 저녁 꿈에 한 신승이 하나의 둥근 구슬을 주자 이것을 받아삼키고 임신을 하였다. 선사가 태어난 해는 明의 世宗帝 嘉靖 22년(중종 38, 1543) 癸卯 2월이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말씀드리기를 “뜬세상이 매우 어두우니 저는 장차 출가하기를 바랍니다”고 하더니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信明長老를 좇아 머리를 깎고 芙蓉靈觀대사의 게송을 듣고 그의 친절한 가르침을 받아, 마침내 그의 심법을 남김없이 터득하였다. 그의 신체적 특징은 배가 크고 눈썹이 길며 몸이 컸는데 다만 왼쪽 손이 조금 不仁하였다. 득법 후에는 京師에 나아가 당시의 재상 盧守愼(蘇齊)의 장서를 빌려 보았는데 7년 만에 그의 책을 남김없이 다 보았다. 그의 필법 또한 매우 뛰어나, 당시 사명대사와 더불어 二難(두 사람의 상대하기 어려운 명수)이라 불리어졌다.
壬辰亂을 당하여 덕유산의 초암에 있었는데 왜군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암굴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저녁 늦게 왜적이 지나갔으리라 생각하고 샛길을 따라 암자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돌연히 왜군 10여명이 숲속으로부터 나와서 칼을 휘두르며 기세를 떨쳤으나 선사는 叉手하고 서서 태연하게 동요하지 않았다. 왜적들은 이것을 크게 이상스레 여겨 모두 선사에게 엎드려 절하고 흩어졌다. 다음 해에 사명대사가 선사를 조정에 천거함으로 진중에 이르러 선사도 승장의 한 사람이 되어 전지를 전전하였다.
난이 평정되니 선사는 가야산으로 가서 다시 선창의 사람이 되었다. 그때 명나라 사신 李宗城이 황제의 명을 받고 豊臣秀吉을 일본 국왕에 봉하려고 서책과 함께 바다를 건너려 하다가 도중에 가야산 해인사를 유람하던 중 선사를 한번 보고 심복하여 돌아갈 것을 잊고 며칠을 머물다가 돌아갔다.
선사가 九天洞으로 옮겨갔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눈을 감고 『원각경』을 암송하는데 아직 경을 다 암송하기 전에 한 마리의 큰 구렁이가 계단 밑에 넘어져 있음을 보고 그 꼬리를 제쳐주니 다시 서서히 기어가는데 쫓아갈 수가 없었다. 그날밤 꿈에 노인이 와서 선사에게 절을 하면서 말하기를“화상께서 독경하는 것을 듣고 이미 고통에서 벗어났습니다”고 하였다.
光海君朝에 선사가 두류산에 거주할 때의 일이다. 임자년에 광인의 무고를 받고 제자 碧巖과 함께 당시 수도에 압송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광인이 누구인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시 풍수설에 밝고 여러 큰 절을 짓게 하면서 궁중에 출입했던 性智라는 설이 있다. 선사가 옥에 갇히자, 옥을 관리하는 사람이 스님을 보니 氣宇가 軒昻하고 언설도 또한 비범한지라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이것을 광해군에게 아뢰었다.
다음날 광해군이 선사를 안으로 들도록 하여 법요를 물어보고는 크게 기뻐하여 紫蘭가사, 壁彩장삼, 염주 등을 하사하고 그 밖에도 진기한 물건들을 후하게 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봉은사에 큰 재회를 열어 선사를 도사로 삼아 궁중에서 쓰던 좋은 말을 타게 하고 圉人들로 하여금 전도케 하니 당시 경성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그 모습을 우러러 뵈옵고 절을 하면서 그 뒤를 따랐다. 선사는 평생토록 신도로부터 받은 것을 일찍이 한 물건도 간직한 일이 없고 모두 흩어서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어 주었다. 선사의 기품과 도량은 매우 깊고 의연하였으며, 크고 넓어서 헤아릴 수 없었다. 선사의 法學(법력의 명예)이 해내에 분분하여서 스님을 찾아와 도를 배우려는 자가 7백여에 달했다.
광해군 6년 庚寅에 선사는 72세가 되어 송광사로부터 쌍계사 · 칠불암으로 갔는데, 이는 입적할 땅을 정하기 위함이었다. 다음 해 7월에 가벼운 병증세를 보이더니 上足제자 碧巖覺性을 불러 간절히 법을 부촉하였다. 11월 1일 午時에 목욕을 마치고 시자를 불러 지필을 가져오도록 하여 하나의 게송을 썼다.
‘七十三年을 幻海에 노닐다가 오늘 껍질을 벗고 初源으로 되돌아간다.
廓然空寂하여 원래 一物도 없거니 어찌 菩提와 생사의 뿌리가 있으랴.’
쓰기를 마치고 조용히 遷化하니 法臘이 57세였다. 문인들이 靈骨을 수습해 이것을 나누어 海印, 松廣, 七佛, 百丈 네 곳에 부도를 세웠다. 이 일이 있은 지 5년 후에 광해군이‘弘覺登階’라는 시호를 陽하였다.
(이상은 李能和 선생의 『조선불교통사』 高橋亨의 『李朝佛敎』 및 忽滑谷快天의 『朝鮮禪敎史』 金仁德 교수의 『浮休禪師의 禪思想』 을 참조하였음.)
(2) 교우관계
芙蓉靈觀선사의 심법을 곧바로 이은 직계제자로는 서산대사와 부휴대사가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당세에 학덕과 공훈 및 승계에 있어서 서산대사를 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서산대사에게 사명대사와 같은 걸출한 제자가 나와서 스승의 법예를 드높인 것처럼 부휴대사도 碧巖覺性과 같은 빼어난 제자와 翠微 · 白谷 · 晦隱 등과 같은 훌륭한 제자를 두어 그 법맥이 면면히 이어졌다.
벽암각성은 사명대사의 뒤를 이어 팔도도총섭이 되어 毫名을 떨친 사람이다. 물론 제자의 많고 적음과 세상에 대한 공적에 따라서 바로 그 사람의 禪的 境地를 평가할 수는 없으나, 이처럼 훌륭한 제자를 키워낼 수 있었음은 그의 법력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다만 부휴선사는 서산대사와 법형제이기는 하지만 나이가 23세나 아래이므로 나이만으로 보면 사명대사와 동년배가 된다. 그러므로 법형인 서산스님을 스승과 같이 존중하였으며, 사명대사와는 친구처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사명스님의 글이 있다.
“성인이 가신 지 3천년이 지난 지금 大雄(부처님)의 진실한 법은 날로 쇠퇴하고 마군의 말들만 분분한데 사람들은 모두 이것에 취해 있구나. 金言은 땅에 떨어지고 세상은 헛된 말만 쫓아서 집착하니 이 때를 당하여 靈山이 어찌 평안하겠으며 少林은 어느날 생기를 되찾을 것인가. 지금에는 오직 正眼을 지닌 우리 형님이 있을 뿐이니, 형님이 아니고서는 누가이 邪網을 다시 정돈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 형님이라 칭한 것은 곧 부휴선사를 가리킨 것이다. 두 분의 서로를 아는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사명대사가 나라의 위급함을 구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다 보니 종문의 본분사에 충실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이를 은근히 자기가 마음으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부휴선사에게 당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부휴선사는 다만 종문에서만 선지에 밝은 탁월한 스님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당시에 학덕과 인격을 갖춘 최고 수준의 유생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의 재상이었던 盧守愼과의 관계가 잘 말해준다. 선사가 그의 책을 빌려서 7년 만에 모두 독파하였음은 이미 말한 바이지만 두 분은 사상적으로도 불 · 유에 구애됨이 없이 토론하여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노수신이 유배지에서 저술한 『夙興夜寢箴註』 에 心의 體用을 설한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 一物이 문득 지나가도 眞體는 전과 같이 그 光靈을 모두어 흩어지지않는다. 모든 사려가 끊어져 明鏡止水와 같되 터럭 끝만치도 꾸민 흔적이 없으며 虛明靜一의 상이 있으되 비록 귀신이라 할지라도 그 分際(분별되어진 모습)를 볼 수 없으니 이것이 靜하면서 存養하는 것이다."
여기서 一物이라 함은 眞如一心이라 볼 수 있고 眞體란 心眞如自體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心體가 비록 작용한다고 할지라도 眞如自性은 본시 그대로의 光靈이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또한 사려가 끊어져 명경지수와 같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는 인위적으로 닦아 얻는 것이 아님을 다음에 말한 것이며, 끝으로 眞如自性 자체는 귀신이라도 형상으로 포착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心의 體用을 묘하게 설명하려고 한 것으로 비록 언로의 자취가 남겨진 흠이 있으나, 선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없이는 하기 힘든 말이다. 그러므로 이퇴계 선생도 이 글을 평하여 말하기를, “禪의 寂照虛通과 다를 게 없다”고 하였다.
또한 노수신은 竊見通書에서 말하기를 “성인을 가히 배울 수 있습니까? 배울 수 있소이다. 요긴한 것이 있습니까? 있소이다. 청컨대 여쭈어 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가 요긴한데 無欲입니다. 무욕한즉 靜虛하고 動直합니다. 靜虛한즉 밝고(명) 밝은 즉 통합니다. 動直한즉 공평하고 공평한 즉 溥大하게 됩니다. 明通하고 公溥하면 두루할 수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보면 노수신이 비록 유학자이기는 하지만 심의 체용에 대한 이해와 공부방법에 대해서는 선사로부터 시사받은 바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3) 법맥과 선사상
松廣寺嗣院事蹟碑를 보면, 臨濟禪師로부터 18대를 전하여 石屋淸珙에게 법이 전해졌고, 이 법을 고려의 太古普愚선사가 전해 받았으며, 다시 여섯 번 전승되어 부휴선사에게 이어졌다고 한다. 또한 송광사 開倉碑에서 말하기를, “고려승 보우가 중국 가무산에 들어가 석옥청공선사의 회상에 참여하였는데, 淸珙은 임제의 18대 嫡孫인 바, 보우가 이 법을 남김없이 증득하여 幻庵混修에게 전했다. 혼수는 龜谷覺雲에게, 각운은 登階淨心에게 전했으며, 정심은 碧松智嚴에게, 지엄은 芙蓉靈觀에게, 그리고 영관은 상족제자에게 전했는데 그 이름이 善修이고 자호는 부휴인 바 內典을 모두 꿰뚫어 一代의 宗師가 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부휴선사가 서산대사와 동문의 형제임을 알 수 있음과 동시에, 임제선사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선종의 골수 법맥을 계승한 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사상적 핵심은 문자의 소전을 뛰어난 格外禪道理를 종지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이 가운데 소식을 누가 알 수 있으랴. 크게 분발하여 제 몸뚱이도 잊고, 간절히 疑團을일으키니, 囮地一聲에 천지가 무너지거늘, 어찌 북쪽바다 남쪽 땅을 논의할 것인가?"
남쪽이다 북쪽이다 분별하는 것은 인간의 주관적인 생각에 따른것일 뿐, 광대무변한 허공계에는 그런 분별이 붙을 수가 없다. 하물며 천지가 무너져 버린 마당에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는 문자의 해석이나 구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신적 체험의 경지이며 이는 일체의 망상이 부서져 본연의 심광이 열린 자리를 노래한 것이다. 마음의 기틀이 근원의 빛으로 되돌아왔으므로, 이를 一念廻光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선사는 이렇게 노래한다.
“사람마다 스스로 衝天하는 기운이 있으니, 일념회광하면 곧 대장부이다.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이신 소식이 끊어졌다면 말하지 마라. 비가 지나간 뒤에 산새들이 다시 서로 부른다."
흔히 말법시대에는 참선을 해도 소용없다고들 한다. 시대가 혼탁하고 중생의 근기가 어둡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發心求道는 하지 않고, 그 책임을 시대에 돌리려는 것이요, 자기 자신을 중생일 수밖에 없다고 자굴하는 것인 바 선사는 이것을 경계한 것이다.
진정한 구도심은 안이한 상황에서보다 오히려 위기의 자각에서 더욱 치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가 온 뒤에(즉 고뇌를 극복한 그 자리에) 깨달음의 환희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의 길은 단순한 도피의 길이 아니요, 적극적인 초극의 길이다. 그러기에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기틀을 당해서 活眼을 열며, 사물에 응해서 玄風을 떨쳐라.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毘盧의 정수리를 밟으면, 연꽃이 불 속에서 피어나리라"
어렵고 답답하며 위험한 일에 직면하여 눈을 감아 버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눈을 똑바로 뜨고 진상을 직시해야만 된다. 정신이 죽으면 눈을 뜨고 있어도 죽은 사람과 같으며, 산 정신으로 문제를 똑바로 보면 진상을 깨달을 수 있다. 진상을 깨닫고 보면 두려울 것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면 자타가 함께 자유로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스스로 중생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체념하거나 자굴하지 않을 수 있어서 聖俗의 한계를 뛰어넘으니, 비록 번뇌의 불꽃이 맹렬한 사바 속에 있을지라도 청정한 자성이 결코 물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진실에 돌아와 망상이 곧 空임을 了達하면 중생과 부처가 본시 통해서 같아지나니, 미혹함은 마치 불나비가 불꽃 속에 뛰어듦 같고 깨달음은 마치 학이 새장을 벗어남과 같다."
불꽃이 나비나 곤충을 태우려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니요 미물이 스스로 미혹하여 제 몸을 태우는 것일 뿐이다. 창문이 본시 열려져 있으나, 미혹한 생명이 열린 곳을 향해 날지 않고 닫힌 창문만을 두드림은 창문에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장애는 본시 밖에 있는 것이 아니요, 제 스스로의 미혹에 있음이 분명할진대 답답함에서 벗어나는 길도 지혜의 눈을 여는 길 밖에 없다.
그러므로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 진리가 특별한 것이 없으니 모름지기 말(言)을 잊고 그 뜻에 계합하여라. 그 근본 뜻에서 활안을 열면 邪魔外道가 스스로 歸降하리라."
마음에 미혹됨이 있어 이것과 저것이 막혀 있으면 통할 길이 없고, 마음이 통해 있으면 막힘이 없다. 그러니 제 마음은 막아놓고 있으면서 다른 것이 나를 장애롭게 한다는 생각이 있는 동안은 사마외도의 작란을 실감할 수 밖에는 없다. 반대로 제 마음이 통해 있으면 본시 사마외도가 있을 자리가 없고, 설사 그런 것이 있어서 작란을 하려 할지라도 어찌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본시 통해 있는 것을 억지로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허공을 누가 막아 놓을 수 없음과 같다.
그러면 일념회광하여 활안을 열고 활발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선사는 간화선의 방법이 그 첩경이 됨을 이렇게 말한다.
“趙州의 無字에 疑端을 일으켜 12시중에 뜻을 오로지하여 보라. 물이 다하고(盡) 구름이 다한 자리에 이르면 곧바로 祖師의 關門을 때려 부수리라"
조주선사의 무자화두는 매우 유명하여 중국에서 看話禪이 행해진 이래 가장 대표적인 화두로서 손꼽히고 있다. 이 화두가 생긴 유래가 있다. 어떤 날,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개(大)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곧 ‘無’라고 답하였다. 이 대답을 들은 스님은 크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열반경』 에는 ‘-切衆生悉有佛性’이라 하여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째서 스님은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였을까 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그 스님이 부처님이나 조주스님을 의심했다면 굳이 의심을 일으킬 까닭이 없다. 또한 조주스님도 童眞出家한 大善知識으로 ‘古佛’이라 불리워지는 분이니,결코 虛言을 할 리가 없다. 그러니 그 스님은 큰 의심뭉치가 가슴을 가득 채워 밤이고 낮이고 이 문제를 참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는 화두에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진실로 의심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먼저 큰 신심을 전제로 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신심이 견고하지 않으면 절실한 의단도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산대사도 선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三要’가 있는데, 첫째가 大信根이요 둘째가 大疑團이며 셋째가 大憤志라고 했다. 부휴선사의 사상적 맥락도 서산스님과 軌를 같이하므로, 大疑團과 大憤志를 중시해서 發憤忘身하고 절실히 의단을 일으킬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큰 선심을 또한 매우 중시한다. 그러므로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道는 다른 데 있지 않고 오직 나에게 있나니 부디 먼 곳에서 구하거나 하늘에서 구하지 마라. 마음을 거두고 산창 밑에 조용히 앉아서, 낮과 밤으로 항상 趙州禪을 참구한다."
즉 道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철두철미하게 믿어야만 趙州禪도 비로소 참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도가 나에게 있음을 믿을 수 있는 것은 내가 활안이 열려서 몸소 그런 것임을 증득한 것이 아니요, 여래의 말씀을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의 말씀이 없으면 처음부터 의심을 일으킬 것도 없다. 따라서 선의 참구는 여래의 말씀을 부정하는데 그 특색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래의 말씀을 몸소 체증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여래의 말씀을 듣고 보면서 제 생각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으면서도 문자만 이해한 것으로 만족한다면 이는 진실한 불자가 아니요, 또 직심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선은 큰 믿음과 진실한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 어째서 여래가 그와 같이 말씀하셨는지 그 속뜻(살림)을 끝까지 체득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선과 교가 본시 원융하여 전혀 갈등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부휴선사는 사명대사 小禪疏에서 말하기를 “부처님 법은 자비스런 배가 되어 모든 중생들을 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네주시니 삼계의 火宅을 면하려면 모름지기 三寶의 威神을 힘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薦登階禪師疏에서 말하기를 “위대한 부처님의 중생을 제도하시는 대비는 만겁을 지내도 다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또 追薦父母疏에서는 “법계의 含靈이 다 불법의 가피의 힘을 입었고 하늘과 같이 끝이 없으매 나를 낳으신 부모의 은혜를 정성껏 갚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비의 문을 두드려 그 저승의 길을 닦아야 할 것이온데, 만일 귀의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어찌 그 감응이 더디겠습니까?" 하였다.
이처럼 부휴선사는 선종의 골수 법맥을 이은 종사이지만 大信을 바탕으로 활안을 열어, 말의 끝을 버리고 그 속뜻을 포섭하여 일체 함령을 자재롭게 度脫하는 길을 걸었으니, 진실로 대승의 참 불자요, 이것이 곧 한국 선종의 특색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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