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효봉(曉峰)선사
(1) 선동(禪童)의 환생(還生)
스님은 1888년 5월 28일 평안남도(平安南道) 양덕군(陽德郡) 쌍용면 (雙龍面) 반성리(盤城里) 금성동(錦城洞)에서 수안(遂安) 이씨(李氏) 병억(炳億)을 아버지로 김씨(金氏)를 어머니로 오형제 중에서 삼남(三男)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찬형(燦亨).
어려서부터 유달리 영특해서 이웃 간에는 신동(神童)으로 알려졌다. 열두 살 때까지 선비인 할아버지로부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워 통달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귀여워했던가는 다음 일을 미루어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스님이 열 세 살 되던 정월 보름날 동무들과 밖에서 연을 날리다가 집에 돌아와 인절미 세 개를 먹은 것이 그만 관격이 되어 빈사의 지경에 빠졌다. 의원들이 와서 보고 최후의 수단으로 정수리를 쑥으로 뜨고 했지만 깨어나지 않았다. 스님의 정수리엔 그때 쑥으로 뜬 흉터가 남아 있었다.
집안에서는 울고불고 하던 끝에 아주 죽은 줄 알고 이불에 말아 한쪽에 치워 놓았었다. 귀염둥이 손자가 죽은 것을 보고 상심한 할아버지는 홧술을 폭음한 나머지 그길로 돌아가셨다. 집안이 온통 뒤집혀 있는데 그때 마침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삼촌이 부득부득 조카의 시체를 보겠다고 이불을 헤쳤다.
그러자 죽은 지 스무 시간이 넘은 몸에 맥이 돌고 있었다. 이 사실을 두고 스님은 가끔‘나는 아무래도 그때 할아버지의 운명을 대신 받고 살아난 것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열 네 살 때, 연례(年例)적으로 평양감사가 베푼 백일장(白日場)이 있었다. 사방에서 모인 수많은 재동(才童)들이 글재주를 겨루는 마당. 이때 스님은 어린 소년으로서 장원급제의 영광을 차지했다고 한다.
(2) 출가(出家)
스님은 평양고보(平壞高普)를 나온 뒤, 개화(開花)의 흐름을 따라 청운의 뜻을 품고 현해탄(玄海灘)을 건넌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법학(法學)을 전공한다. 안팎으로 어지러운 한말(韓末), 젊은이의 꿈은 인간 사회의 질서(秩序)를 바탕으로 한 법(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세속적인 출세(出世)의 첩경이라고 부모들은 인식했으리라. 스물여섯 살에 와세다를 졸업하고 귀국(歸國). 이로부터 서른다섯 살 때까지 십년 간(1913~1923)을 스님은 법관생활(法官生活)을 한다. 서울과 함흥(咸興)의 지방법원에서, 그리고 평양의 복심법원[지금의 고등법원]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판사(判事)직에 종사하게 된 것이다.
이때는 일제(日帝)의 잔악한 식민지정책이 날로 그 이빨을 드러내던 시절. 중국 상해(上海)에서는 우리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뜻있는 인사(人士)들은 방방곡곡에서 일제(日帝)에 항거. 민족독립의 기치(旗幟)를 들었다. 그러자 일제(日帝)는 사상범(思想犯)의 색출에 혈안(血眼)이 되었다. 이 무렵 젊은 판사(判事)는 같은 겨레로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사상범을 다루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양심(良心)의 소리가 움트기 시작한다. 그러한 하루하루의 생활은 누구에게 입 벌려 말할 수도 없는 잿빛 고뇌였다. 한국人의 처지에서 그 당시 법관(法官)의 자리는 실로 화려한 지옥(地獄)이었다. 1923년 나이 서른여섯 살 때 그러니까 법관생활 십년 째 되던 해, 스님은 하나의 절벽에 부딪치게 된다.
판사(判事)로서 내린 사형(死刑)선고(宣告)! 어떤 사건의 결과, 그 자료와 증거에 의해서 직책상 사형을 선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막상 한 인간의 눈에 대고 사형을 선고한 그 순간부터 자신(自身)을 회의(懷疑)하고 나아가 인간의 사회구조에 대해서 회의하기 시작한다. ‘인간이 인간을 벌할 수 있는가. 범부(凡夫)인 내가 어떻게 같은 인간을 벌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무슨 권리로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 나는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인간(人間)의 길인가.’
지난날 찬란하던 청운의 꿈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꼬박 사흘 동안 이 인간적인 자책(自責)앞에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밤을 새워 고뇌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가장 깊은 內心에서 우러나온다.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이 생각이 떠오르자 그 길로 집을 뛰쳐나왔다. 입은 옷에 맨주먹으로. 물론 직장에 사표를 내던질 여유도 어린 세 자녀를 거느린 아내에게 작별을 알릴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대개 출가(出家)의 경우가 그러듯이, 일단 마음이 작정되면 한시도 더 지체하기가 어렵다. 출가에 대한 한 생각 뿐 모든 분별(分別)과 사량(思量)은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러니 그때의 선고는 결국 자신(自身)에 대한 사형선고이기도 했다.
(3) 참회의 길
집을, 고뇌의 집을 벗어난 마음은 날듯이 가벼웠다. 이로부터 삼년 동안 스님은 엿판 하나 메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북(北)에서 남(南)으로 또 동(東)에서 서(西)로 종횡무진 방랑(放浪)생활을 시작한다. 어제의 영화와 신분을 헌신짝처럼 팽개치고 인간(人間) 재구성(再構成)을 위해 고행(苦行)의 길에 오른 것이다. 입고 나선 옷을 팔아 엿판과 한복 두벌을 서울 남대문(南大門) 거리에서 바꾸었다. 이 옷으로 삼 년을 지내는 동안 깁고 꿰매어 오색 누더기가 되었다고 한다. 더러는 귀찮은 눈을 피해 바보짓도 해보이고, 아무 목적도 없이 하루에 백칠십 리 길을 환상(幻想)을 쫓아 간 적도 있었다. 장마철에는 서당에 들러 글을 가르쳐 주는가 하면 시집가는 색시의 농짝을 밤새워 져다주고 푸짐한 대접을 받은 때도 있었다.
누더기 엿장수의 뒤를 따르는 시골 아이들에게 엿을 거저 나눠주다가 밑천이 떨어지기도 했다. 먼 길을 갈 때엔 굶기가 일쑤여서 한때는 엿판에 콩을 넣고 다니다가 시장하면 솔잎과 물에 불린 콩을 씹으며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산길을 잘못 들어 비를 맞아가면서 밤을 지새운 일도 있었고, 술에 취해 얼음 위에서 하룻밤을 잔 일도 있었다.
한번은 울산(蔚山)을 지나는 길이었는데 방어진(方漁津) 바닷가에 가니 깔끔한 바둑돌이 하도 좋아 그걸 줍기에 정신이 없었다. 뒤늦게야 주위에 물이 들어온 걸 알고 허둥지둥 뛰어나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엿 장사를 않고 바둑돌 장사를 하오?"“엿을 팔 때는 엿장수요 바둑돌을 팔 때는 바둑돌장수지요" 이렇듯 겪기 어려운 갖은 고생을 달게 받으며 자신(自身)을 가누기에 전념(專念)했다. 스스로가 선택한 고행(苦行), 그것은 참회의 길인 동시에 안심입명(安心立命)의 세계를 찾아 헤맨 구도(求道)의 행각(行脚)이기도 했다.
(4) 해후(邂逅)
1925년 여름, 정처 없던 나그네의 발길은 마침내 금강산(金剛山)에 이르렀다. 유점사(楡岾寺)에 들러 모시고 공부할 만한 스승을 찾으니, 신계사(神溪寺) 보운암(普雲庵)에 <금강산 도인(道人)>이라는 석두(石頭)스님이 계시다고 했다. 그 길로 하룻길이 창창한 신계사(神溪寺)를 찾아갔다.
큰 방에 스님 세분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절을 하며,
“석두(石頭)스님을 찾아 뵈러 왔습니다" 하니,
풍채가 좋은 한 스님이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이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몇 걸음에 왔는고?"하고 다그쳐 물었다.
스님은 벌떡 일어나 큰방을 한바퀴 빙 돌고 앉으면서,
“이렇게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석두(石頭)스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곁에 앉아 있던 노장은 껄껄 웃으면서,
“십 년 공부한 수좌(首座)보다 낫네"라고 감탄하였다.
이렇게 만난 것이다. 만날 사람끼리 만난 것이다. 스승을 찾아 헤매던 나그네와 제자를 기다리던 스승은 이때 서로가 말은 없어도 두 마음은 하나로 맺어진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본질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결합(結合)은 이와 같은 만남(邂逅)으로 이루어진다. 만남에 의해서 인간은 비로소 <나>를 자각(自覺)하게 되는 것이다. 스님은 내 갈 길이 여기 있었구나 하고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날로 머리를 깎아 계(戒)를 받고 법명(法名)을 원명(元明)이라 불렀다(효봉(曉峰)이란 이름은 뒷날에 지은 스님의 법호(法號)다). 음력 칠월 초여드레 스님의 나이 서른여덟. 그 뒤 스님은 이 날만 되면 옷을 갈아입었다. 여느때 같으면 갈아입을 때가 아니기로 그 까닭을 물으면 ‘오늘은 내 생일이야’라고 하였다. 그날 스님은 새로 탄생한 것이다.
(5) 용맹정진(勇猛精進)
서른여덟에 중이 된다는 것은 불가(佛家)에서 흔히 말하는 <늦깎이>이다. 스님은 남보다 늦게 출가(出家)한 사실을 자각하고, 남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잠잘 시간에도 자지 않고 분발하여 일로정진(一路精進)에만 애썼다. 그 후 여름과 겨울을 보운암(普雲庵)에서 지내고 나서 이듬해 여름에는 제력(諸力)의 선지식(善知識)을 친견(親見)키 위해 걸망 하나를 메고 행각의 길에 나섰다. 남(南)과 북(北)으로 두루 다녀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결국 불가(佛家)의 공부는 남의 말에 팔릴 게 아니라 내 스스로가 실참실오(實參實悟)해야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이듬해 다시 금강산(金剛山)으로 돌아왔다.
아무런 미련도 없이 얽힌 세정(世情)을 끊고 뛰쳐나온 스님에겐 생사(生死)의 고뇌에서 해탈하는 일만이 지상(至上)의 과제였다. 용맹심을 일으켜 화두(話頭)를 타파해야겠다는 일념(一念) 뿐이었다. 화두(話頭)란 옛 조사(祖師)들의 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참선하는 이가 참구(參究)해야 할 과제를 말한다. 스님은 <趙主無字(조주무자)>로서 평생 화두를 삼았다. 그리고 남에게 화두를 일러 줄 때에도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이 무자(無字) 화두를 일러주곤 하였다. 중국과 우리나라를 통해서 이 무자(無字) 화두만큼 공부하는 이의 눈을 많이 띄워준 화두가 없다고 하였다.
1927년 여름 신계사(神溪寺) 미륵암(彌勒庵)에서 안거(安居)에 들어갈 때 스님은 미리 대중(大衆)에게 알렸다. “저는 반야(般若)에 인연이 짧은데다가 늦게 중이 되었으니 한가한 정진은 할 수가 없습니다. 입방선(入放禪)도 경행(經行)도 하지 않고 줄곧 앉아서 배기겠습니다" 이렇게 대중에게 통고하고 나서 스님은 꼬박 한철(석달) 동안을 하판(아랫목) 뜨거운 자리에 앉아 정진했다. 한번은 공양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엉덩이에 무언가가 달라붙는 게 있어 돌아보니 엉덩이 살이 헐어서 그 진물이 흘러 중의와 방석이 달라붙어 있었다. 살이 허무는 줄도 모르고 화두일념(話頭一念)에 미동(微動)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히 위법망구(爲法妄軀)의 정진이었다. 목욕할 때면 그때의 흉터가 커다랗게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스님은 그 뒤부터 더운 방을 싫어하였다. 스님과 함께 방을 쓰면 우리는 늘 추워서 골탕을 먹었다.
(6) 개오(開悟)
스님은 금강산에 있는 선원(禪院)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용맹스럽게 정진을 계속했다. 밤에는 눕지 않고 앉은 채 공부하고, 오후엔 먹지 않았다[불가(佛家)에서는 원칙적으로 하루 두 끼만 먹고 오후엔 불식(不食)이다]. 한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때부터 <절구통 수좌(首座)>라고 별명이 생겼다. 중이 된 지 다섯 해, 아직도 깨달음을 맺지 못한 스님은 초조했다. 자신(自身)의 두터운 숙세(宿世)의 업장(業障)과 무능을 한탄했다. 대중이 여럿이 거처하는 처소에서는 마음껏 정진(精進)하기가 어려웠다. 스님은 생각던 끝에 토굴(土窟)을 짓기로 했다. 곳은 금강산 법기암(法起庵) 뒤. 구조는 단칸방. 한구석에 대소변을 볼 수 있는 구멍을 뚫어 밖으로 내고, 밥이 들어올 수 있는 조그만 창문 하나만을 내었다. 그리고 스님이 방에 들어앉은 뒤 밖에서 벽을 발라버리도록 일렀다.
1930년 늦은 봄, 스님의 나이 마흔세 살 때, 깨닫기 전에는 죽어도 다시는 토굴 밖에 나오지 않으리라 맹세를 하고 토굴에 들어갔다. 그것은 결사적인 각오였다. 그때 가지고 들어간 것은 입은 옷에 방석 석 장뿐. 하루 한 끼씩 공양을 들여보내 줄 것을 당부했다. 이제 스님에겐 기쁨도 슬픔도 편하고 괴로움도, 먹고 입고 자는 일도 다 아랑곳 없었다. 오로지 무자 화두(無字 話頭)를 타파하기 위한 용맹정진이 있을 뿐이다. 일체 인간의 풍속권(風俗圈) 밖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암자(法起庵)와 토굴과의 법래(法來)는 하루 한 끼씩 공양을 토굴 안으로 들여 주는 일, 그날 빈 그릇을 챙기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주는 일뿐이었다. 인기척 없는 토굴 안, 그 전날 밥그릇이 비어 있는 걸 보고 살아 있다는 것을 짐작할 따름, 밖에서는 토굴 안의 동정(動靜)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갔다. 그리고 새봄. 하루는 시자가 공양(供養)을 가지고 가니 그 전날 놓아둔 공양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스님, 왜 공양을 안 드셨습니까?" 이 소리에 스님은 비로소 어제의 공양이 창구(窓口)에 있는 것을 의식했다. 그 전날부터 공양이 온 줄도 모르고 선정삼매(禪定三味)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1931년 여름, 비가 개인 어느 날 아침. 드디어 토굴 벽이 무너졌다. 일년 육개월만에 토굴에 들었던 스님이 벽을 발로 차 무너뜨리고 나온 것이다. 필사적인 정진 끝에 열린 바가 있었다. 더 의심할 것 없이 이만하면 나가도 되겠다는 신념(信念)이 생긴 것이다. 스님은 발을 떼 놓지 못했다. 일년 반만에 걷는 걸음이라 어린애처럼 비틀비틀 걸음마를 해서 나왔다. 머리와 수염은 덥수룩하게 길었고 손톱과 발톱은 일년 반을 자랐다. 그 사이 세수 한번 하지 않았는데도 얼굴만은 환하게 빛났었다고 한다. 그때의 심정을 글로 읊었다. 그것은 오도송(悟道頌)이었다.
바다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속 거미집엔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7) 판사(判事) 중 탄로
스님은 출가(出家)한 뒤 자신의 전신(前身)을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의지할 데 없어 엿장수로 떠돌다가 입산(入山)한 엿장수 중이라고 자처했다. 집을 나온 지 칠년째 되던 해 유점사(楡粘寺)에 있을 시절, 점심공양을 마치고 뜰을 거닐고 있을 때 뜻밖에 평양 法院에서 함께 지내던 일본인(日本人) 판사(判事)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깜짝 놀라 이게 어찌된 일이냐고 붙들고 늘어졌다. “아무리 그렇기로 사표도 내지 않고 떠날 수가 있소?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기에 내가 대신 사표를 써 냈소" 라고 말했다.
스님은 옛날의 그 동료에게 자기 일을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아 달라고 신신 당부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절 주지(住持)스님에게 발설을 하여 그때부터 <판사 중>이란 별명이 하나 늘게 된 것이다. 그 뒤 유점사에서 임야(林野)관계로 소송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심(二審)에 가서는 승소(勝訴)케 하였다. 이처럼 자기의 전신(前身)이 드러났어도 가족에게는 거처를 알리지 않았다. 속명(俗名)을 대야 할 일이 있어도 감쪽같이 숨기고 원명(元明)으로 통했다. 찬형(燦享)이란 이름은 입적(入寂)하기 사흘 전에야 친지(親知)를 통해서 밝혀진 것이다.
금강산(金剛山) 여여원(如如院)에 있을 때 스님의 부동(不動)하던 좌정(坐定)에 돌연변이가 있었다. 정진 도중 갑자기 돌아앉은 것이다. 전에 없던 일이므로 대중들은 그 사실을 두고 궁금히 여겼다. 뒤에 알려진 일로, 그때 스님이 마주 보이는 문밖에 갓 결혼한 듯한 아가씨를 동반하고 그 절을 구경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아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돌아 앉았다는 것이다. 혈육(血肉)의 모습을 본 것은 이때가 마지막이 되었다. 도심(道心)이 인정(人情)을 등진 것인가.
(8) 교화군생(敎化群生)
판사 중이란 정체가 드러나게 되자 스님은 금강산(金剛山)도 이제는 자신과 인연이 다한 것으로 알고, 행운유수(行雲流水)의 길을 南으로 돌렸다. 설악산의 봉정(鳳頂), 오대산의 상원사(上院寺), 정선의 정암사(淨岩寺), 덕숭산 정혜사(定慧寺) 등 이름 있는 선도장(禪道場)을 찾아 이 산에서 한철 저 골짜기에서 한철 더러는 선지식을 만나 법(法)을 이야기하고 혹은 후학(後學)들에게 납자(衲子)의 본분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 시절도 줄곧 오후(午後)에는 먹지 않았다.
1937년, 스님의 나이 쉰 살이 되던 해 운수(雲水)의 발길은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에 이르게 되었다. 이 절은 고려시대 보조(普照)스님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세운 도장(道場)으로, 스님이 가장 오래 머문 곳이기도 하지만 늘 좋아하던 곳이다. 처음 찾아간 절인데도 옛집처럼 아주 익숙했다. 틀림없이 전생(前生)에 많이 살던 곳이었을 거라고 가끔 말하였다. 선방(禪房)인 삼일암(三日庵)에 조실(祖室)로 십년을 머물면서 찾아온 수많은 후학(後學)들의 눈을 띄워주고 길을 열어 보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정혜 쌍수(定慧 雙修)에 대한 확고한 구도관(求道觀)이 설정되었다. 이때 대종사(大宗師)의 법계(法階)를 받았다.
1946년부터 오년 동안은 해인사(海印寺)의 가야총림(伽倻叢林)에 방장화상(方丈和尙)으로 추대받아 본격적인 도제(徒弟)양성에 힘써 알찬 인재(人材)를 길러냈다. 가야총림은 현재 한국 고승(高僧)의 온상(溫床)이었고, 뒷날 교단(敎團) 정화(淨化)운동의 역군(役軍)들도 이곳에서 수행한 인재들이었다.
(9) 가풍(家風)-수행이념(修行理念)
계(戒) · 정(定) · 혜(彗) 삼학(三學)은 불도수행(佛道修行)의 근본이념이다. 스님은 자신이 이를 갖추어 닦았고 후학들에게도 이 삼학(三學)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였다. 삼학(三學)으로 공부하는 것을 곧잘 집 짓는 일에 비유하였다. 계(戒)는 집 지을 터와 같고, 정(定)은 그 재료(材料)이고, 혜(彗)는 그 기술과 같다고.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터가 시원찮으면 집을 세울 수 없고, 또 기술이 없으면 터와 재료도 쓸모가 없게 된다고 하였다. 세 가지를 두루 갖추어야 집을 지을 수 있듯이, 삼학(三學)을 함께 닦아야만 생사(生死)를 면하고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잇는다고 하였다.
털끝만한 것도 부처님 계율에 어긋난 일은 하지 않으려 했다. 시간관념은 너무도 엄격했다. 지리산(智異山) 탑전(塔殿)에서 안거(安居)할 때 동구(洞口)에 찬거리를 구하러 내려갔다가 공양 지을 시간 단 십분이 늦어 돌아오니, “오늘은 공양을 짓지 말라, 단식(斷食)이다. 수행자가 그렇게 시간관념이 없어 되겠니?"하며 용납하지 않았다. 그날 준엄하게 시간에 대한 교훈을 받은 이래 시봉으로서의 필자는 시간을 어기는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스님은 또 시물(施物)에 대해서도 인색할 만큼 아끼었고 시은(施恩)을 무섭게 생각했다. 우물가에 어쩌다 밥알 하나만 흘려도 평소에 그토록 자비하신 분이 화를 내곤 하였다. 초 심지가 다 타서 내려앉기 전에 새 초를 갈아 끼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생활은 지극히 검박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인은 가난하게 사는 게 부자(富者)살림이라고 말씀하였다.
참선(參禪)은 스님이 닦아야 할 업(業)인 양했다.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하는 일이라고는 한결같이 참선뿐이었다. 따라서 결제(結制)(공부기간)에 대한 관념은 철저했다. 다른 절에 있다가 정초(正初) 같은 때 스님을 찾아뵈러 가면, 뭣하러 살림중(결제중)에 왔느냐고 달갑지 않게 여기었다. “어디 가 있든지 정진 잘하면 내 곁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나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늘 함께 있다." 몇해 전 스님은 영양실조에다 신장이 약해져 대구 대학병원(大學病院)에 삼주일 가까이 입원한 적이 있었다. 겨울 결제일(結制日)을 하루 앞두고, 공부하는 중이 어찌 병원에서 결제를 할까 보냐고 며칠만 더 머물라는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굳이 퇴원하고 말았다.
(10) 생불생 사불사(生不生 死不死)
1954년 정화운동(淨化運動)으로 인해서 스님은 발딛기를 그토록 꺼려하던 시정(市井)에 나와 머물렀다[安國洞 禪學院에서]. 어지러운 종단 일을 수습하기 위해 수도인(修道人)의 신분에는 당치도 않은 감투를 쓰기도 했다. 종회의장과 총무원장, 그리고 宗正의 자리에도. 1956년에는 네팔에서 열린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했었다. 스님은 평소에 국가원수(國家元首)나 관리들에 대해서 경원하였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대했을 때 하고 싶은 말을 주저하지도 않았다.
서울에 머물러 있을 무렵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李承晩)박사의 생일 초대를 받고 종단을 대표해서 경무대(景武臺)로 축하인사를 가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즐비하게 옹위한 가운데서 고관대작들이 드리는 인사를 턱 끝으로 받고 있던 李박사는 스님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벌떡 일어나 손을 마주 잡고 앉을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李박사가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의 생일은 언제입니까?"
이때 스님은 李박사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生不生 死不死(생불생 사불사)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데 생일(生日)이 어디 있겠소?"
이 말을 들은 老대통령은 정색을 하고 입안으로 ‘生不生 死不死(생불생 사불사)’를 거듭거듭 뇌었다. 그리고는 스님이 나오는데 따라 나오면서 귓전에 대고 “우리나라에 도인(道人)이 많이 나오게 해주시오”라고 했다.
(11) 장엄(莊嚴)한 낙조(落照)
스님은 이년 전부터 극도로 노쇠(老衰)해 갔다. 이때부터는 규칙적인 대중생활을 하지 못했다. 치통(齒痛)으로 고생할 때에는 전생의 업보(業報)일 거라고 하였다. 스님의 성격은 천진한 어린애처럼 풀려버려 시봉들과 장난도 곧잘 쳤다. 육신의 노쇠에는 어쩔 수 없는 것, 무상(無常)하다는 것은 육신의 노쇠를 두고 하는 말인가. 스님은 가끔 ‘파거 불행(破車 不行)이야’라고 독백을 하였다.
지난 五월 十四일 거처(居處)를 대구 동화사(桐華寺)에서 밀양 표충사 표충사 서래각(表忠寺 西來閣)으로 옮겼다. 한동안 건강이 좋아졌다가 다시 기울기 시작했다. 곁에서 보기에도 이 세상 인연(因緣)이 다해 가는 듯 싶었다. 누워 있으면서도 가끔 입버릇처럼 “무(無)라 무(無)라....."고 외마디 소리를 하였다. 무(無)란 허무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공부한 무자 화두(無字 話頭)인 것이다. 이와 같이 노환(老患)으로 누워 지내면서도 참구하는 일만은 쉬지 않았다.
입적(入寂)하기 며칠 전, 곁에서 시봉들이 청을 드렸다. “스님, 마지막으로 한 말 씀 안하시렵니까?" “나는 그런 군더더기 소리 안 할란다 지금껏 한 말들도 다 그런 소린데" 하며 어린애처럼 티없이 웃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읊었다.
내가 말한 모든 법은
그거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천강(千江)에 비치니라.
이것이 스님의 열반송(涅槃頌)이다.
1966년 10월 15일. 새벽 세시, 예불(禮佛)을 모실 시각에 스님은 “얘 나 좀 일으켜 달라”고 하였다. 부축해 드리니 평소에 공부하던 자세로 앉았다. “나 오늘 갈란다" 라고 말하였다. 얼마 못 사실 것을 곁에서도 예견한 터라 태연하게 물었다. “언제쯤 가시렵니까?" “오전에 가지." 이 말을 마치자 지그시 눈을 감고 바른손에 호두알을 굴렸다. 가끔 “무(無)라 무(無)라....." 소리를 하시면서. 이렇게 잠잠히 앉아 있는 것을 지켜보고, “스님, 화두 들립니까, 지금도 성성(惺惺)하십니까?" 라고 묻자, “응, 응....." 라고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었다.
오전(午前) 열시, 맑게 개인 가을날. 굴리던 호두알이 문득 멈추었다. 표정(表情)이 굳어졌다. 마침내 입적(入寂)! 일흔 아홉 해 한 수도인(修道人)의 생애가 조용히 막을 내린 것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가? 재악산(載樂山) 기슭에 은은히 열반종(鐘) 소리가 메아리쳤다. 물든 잎이 뚝 뚝 지고 있었다.
하처래(何處來) 하처거(何處去).
'***풍경소리 > 옛스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상 인터뷰 27 혜각존자 신미 스님 (0) | 2008.01.22 |
---|---|
46. 운허(耘虛) 용하(龍夏)대사 (0) | 2008.01.21 |
가상 인터뷰 26 함허당 득통 기화 스님 (0) | 2008.01.20 |
가상 인터뷰 25 무학자초 대사 (0) | 2008.01.20 |
44. 한암(漢嚴) 선사 (0) | 2008.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