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을 지키는 일, 혹은 "나"를 지키는 일
박노자 / 오슬로 국립대학 교수
몇 년 전에 국내의 한 지식인과 서면 논쟁을 할 때에 상대방으로부터 "근본주의자"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병역 거부에 대한 내 주장의 종교적인 근거들을 비판한 그 지식인은, "불교의 불살생계(不殺生戒: 죽이지 말라는 계율)를 지킨다는 목적으로 병역 거부를 하는 것이 바로 종교적 근본주의"라고 생각했다. 그 "근본주의"라는 말은 물론 "이슬람 근본주의"와 같은 폭력 이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고 단지 "당신이 상황의 복합성이나 개인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채 특정 종교의 이상주의적 이야기를 무조건 밀어붙인다"는 뜻이었다. 살생을 싫어해도 순수한 애국심으로 군대에 가는 것을 스스로 택하는 경우를 왜 생각해볼 수 없느냐고 그 지식인이 나에게 서면으로 물은 것으로 기억난다.
나는 그 "근본주의"라 말에 적지 않게 놀랐다. 왜 놀랐는가? "근본주의"에 두 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다. 한 조직으로서 그 조직의 이념을 유일한 진리로 여겨 나아가서 남에게까지 강요하는 조직적인 배타적 근본주의가 있는가 하면, 종교에서 말해지는 윤리를 자기 나름대로 내면화하여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의미에서 그 윤리를 지키는 개인적인 근본주의가 있을 수 있다.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한국 역사를 보면 대개 힘이 있는 조직들이 그 힘이 왕성할 때에 아낌없이 조직적인 배타주의로 타자를 누르고 사회를 길들이는 반면, 힘이 없거나 없어져 가는 조직의 일원들이 가끔가다가 천인 (天人)을 감동시킬 만한 영웅다운 개인적인 근본주의의 사례들을 남긴다.
예컨대 16세기 이후, 개화기 이전까지의 성리학이나 1945년 이후의 남한에서의 개신교는 각각 불교나 천주교, 무속, 또는 좌파 사상 등의 수많은 타자들을 힘껏 억누르고 사회 전체를 자기 방식대로 규율화시키는 조직으로서의 근본주의의 본보기를 보였다. 그 근본주의의 효과는, 후기의 조선을 어쩌면 중국보다 더 성리학적인 사회로 만들고, 오늘날의 남한을 유럽보다 더 철저한 기독교 헤게모니의 사회로 만들 만큼 컸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직 프랑스의 외교적인 보호를 받지 못했던 1880년대 중반 이전의 천주교나, 개화를 외치고 열강의 힘에 의존하려 했던 집권층에게 더 이상 쓸모 없어진 1894년 이후의 위정척사형(型)의 성리학은 순교(殉敎)와 같은 형태의 개인적인 지조 사수(死守)의 사례들을 무수히 남겼다. 우리가 의병 투쟁을 보통 "독립 투쟁"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많은 경우에는 거의(擧義)는 "야수에게 잡아먹힌" 세상으로부터 의로운 죽음을 통해 개인적인 독립을 쟁취하려는 힘없는 개인적 근본주의자들의 순교에 가까웠다.
개인적 근본주의자들은 대개 일거수일투족에 그 나름의 종교적, 이념적 의미를 부여해 엄숙함의 모범을 보였지만, 힘이 있는 조직체들이 조직으로서의 근본주의를 자행했을 때에 그 구성원들이 사상과 행동의 일치에 대해 훨씬 덜 까다롭다. 야사, 문집들이나 지배층의 각종의 음행(淫行)에 관한 실록의 기사를 통해 조선의 사대부들이 여색을 멀리하기만 하는 엄숙주의자들이 아니었음을 요즘 강명관 교수가 그 저서에서 재치 있게 잘 보여주었지만[강명관,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한국 기독교에 대한 최근의 고발서들[예컨데, 류상태,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삼인, 2005.]을 굳이 읽지 않아도 가장 많은 부패 사학(私學)들을 낳은 이 사회의 최강의 "주류 세력"의 모양이 어떤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살생의 문제를 이야기하자면, "반전 운동의 두 개의 모체가 바로 교회와 사회주의"라는 서구적인 등식은 한국 교회에 해당되지 않는다. 극소수를 제외한 교회 "어른"들이 태평양 전쟁, 6-25전쟁, 그리고 베트남 파병 등 각각 "성전" (聖戰)이라고 불렀지만 그것에 대해서 참회하는 목회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이다.
사상이 실종되고 도그마만이 남아 있는 강한 조직의 파렴치한 근본주의, 혹은 무력한 조직에 속하는 개인들의 순교, 이것이야말로 한국에서의 근본주의의 얼굴들이다. 그런데, 이 근본주의 이야기는 한국 불교의 과거나 현재와 멀고도 너무 멀다. 불교는 6세기 이후의 백제나 신라, 그 뒤의 고려에서 국교에 가까운 입장에 있었다 해도 그것은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승려가 실권을 잡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승가(僧伽)는 관료 국가의 외호 (外護)에 의존해야 됐고, 또 외호로 국가에 빚진 만큼 역시 국가에 대한 복종과 국가를 위한 기도로 보답을 해야 했다. 국가의 "주니어 파트너"라 할까? 또 헤게모니를 잡은 일까지 없었지만 역시 조선의 초기 천주교의 경우와 달리 국가가 억불(抑佛)을 해도 불교를 박멸할 뜻을 가진 바 없었다.
다소 어렵더라도 국가 밑에서 그나마 생존이 가능했기에 승가의 구성원들이 계율을 비타협적으로 지키는 것보다 대개 스스로 몸을 낮추어 "알아서 잘 하는" 자세를 취하곤 했다. 물론 시기마다 약간의 차이는 날 수밖에 없었는데, 대략 시기가 내려갈수록 국가와의 "유착"이 점차 국가에 대한 "예속"으로 변경해갔다. 한국 불교의 황금기라 할 7세기의 위대한 고승들, 의상(義湘: 625-702)이나 원효(元曉: 617-686)는 군사나 외교 문제에 있어서는 국왕에게 매우 협조적일 수 있었지만 가끔가다 스스럼없이 쓴 소리를 할 수도 있었다. 예컨대 의상만 해도 비록 왕실의 외호로 신라 화엄종의 중심지가 될 부석사 (浮石寺)를 지었지만, 681년에 문무왕이 수도에서 무리한 토건 공사를 일으키자 "정치가 밝지 못하면 아무리 백성을 수고롭게 하여 새로운 성(城)을 지어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대담한 간언을 바쳐 불필요한 공사를 정지하게 했다.
중국이나 한국에서 화엄불교는 대개 귀족적 성격을 지녔지만 7세기 때만 해도 그것은 꼭 국가에 대한 일방적인 "복종"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또 선불교가 꽃을 핀 10세기 같으면 힘이 약한 계보의 선사들이 국왕들에게 적극적으로 외호를 부탁해도 힘이 있었던 문중의 선사는 그 반대로 최고의 권력자에게도 거의 "스승님"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예컨대 명성이 자자한 데다 예천 쪽 호족들에게 후원을 받았던 자적(慈寂)선사 홍준(洪俊: 882-932)에게는 934년에 태조 왕건이 귀의(歸依)하는 예를 올리고 그의 법에 대한 흠앙을 애써 표현했다. 초기 불교가 왕궁에 들락날락하는 것을 좋지 않은 인연이 발생될 수 있는 위험한 일로 생각하여 이를 엄격히 제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신라, 고려 고승들이 보통 별다른 주저 없이 권력자의 부름에 응해 그 처소로 갔는데, 10세기 중반까지는 적어도 고승의 경우 몸을 지나치게 굽힐 필요까지 없었다.
그러나 10세기 중-후반부터는 강화된 중앙 권력 앞에서 승려가 초기 불교의 계율과 정반대로 - "신하"임을 칭하는 것이 관례가 되고, 불교가 "국교"의 위치를 박탈당한 조선왕조 이후로는 "신민" (臣民) 중에서도 가장 비천(卑賤)한 쪽에 속하게 된데다 그저 사대부 국가에서 살아남기 위해 늘 국가 권력에 대한 무한한 충성을 다짐해야 했다. 16세기의 고승이자 순교자라고 할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 ?-1565)는, 어린 명종(재위: 1545-1567) 대신에 국사(國事)를 섭정하여 처리했던 문정대비(文定大妃) 윤씨와의 가까운 관계를 이용하여 기울어진 불교를 다시 한 번 일으켜보려다가 결국 전국 유림의 요구로 유배되어 제주도에서 곤장 밑에서 처참한 죽임을 당했는데, 그 시에서 자주 강조되는 것은 국가와 왕에 대한 충성이다:
군신의 관계는 땅처럼 단단한 것인데,
나는 어찌 임금님의 은혜를 저버렸겠는가?
(君臣之義厚如坤 貧道何嘗負聖恩)
초기 불교에서 계율상 불가했던, 사실 거의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던 심정인데, 조선시대 불교로서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었다. 과연 그러한 상황에 처해진 우리 불교를 놓고 "근본주의"를 논할 수 있겠는가? 생존 그 자체가 가능한 것은 승려들이 천만다행으로 여겨 온 것이고, 관료 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그렇게도 어려운 생존을 위하여 수많은 타협을 해온 것이다. 지금까지 불살생계를 "근본주의적으로" 해석하여 군 입대를 거부한 두 명의 불자(오태양씨와 김도형씨)가 모두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불교에 대한 이상주의적인 애착이 강한 젊은 재가 불자들에게 수많은 외국 법우(法友)들의 선례대로 국가적인 살인 훈련을 거부할 만한 용기는 생길 수 있지만, 계율상 입대는커녕 군대 구경조차도 할 수 없게 돼 있는 승려들은 오히려 국가에의 예속의 전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형국이다.
그런데 위에서 이야기한 온갖 타협들을 "무원칙한 기회주의"라고 폄하하면 안 된다. 기회주의는 맞지만, 그것을 "원칙이 있는 기회주의"로 봐야 할 것이다. 무슨 원칙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한국 불교는 이미 5-6세기부터 근본 불교 계통의 계율 (<오분율>, <사분율> 등)을 출가자 통제의 기반으로 삼았지만, 계율 문제에 있어서는 "엄수"보다 대승 불교 방식의 "방편론"을 훨씬 더 선호했다. 즉, 불교의 목적이 열반을 득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고 계율이란 그 목적 도달을 위한 수단(방편), 강 건너서 버려도 될 "뗏목"이기에 계율을 늘 상대시(相對視)해온 것이다. 예컨대, 본인부터 계율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으로 아주 유명한 원효는 이론상으로도 그의 명저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에서 다음과 같이 못박았다:
"자재승리 (自在勝利)란 교의상의 계율에 얽매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능히 자기 마음으로 도리를 결판(決判)함으로 소연(蕭然)히 하는 일 없는 것 같지만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 경(經)에서 '승복을 입지 않았음에도 나아가서 성인 (聖人)의 반열에 올랐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방편이자 형식일 뿐"인 계율보다 이미 진여(眞如), 즉 깨달음과 열반이 내장돼 있는 "나의 마음"을 위주로 불교의 체계를 잡은 원효는, 계율 문제를 다루는 전문 저서에서는 "근본주의"의 정반대인 극도의 주관주의적 시각을 드러냈다. 그가 " 보살계는 생사의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서 일심(一心)의 본원으로 되돌아가는 큰 나무의 구실을 하며, 삿된 것을 버리고 바른 것을 이루는 요긴한 문이다"라고 하여 방편으로서의 계율을 강조하면서도, 계율 그 자체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에서, "비록 살인하는 것이 중계(重戒 기본 계율)를 범하는 일이지만 남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도저히 건질 수 없는 중생을 죽였을 경우에는 그것이 죄가 아니고 복을 짓는 일 일뿐이고, 비록 자신을 찬양하고 남을 비방하는 것이 큰 죄악이지만 상대방으로 하여금 신심을 일으키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했을 경우 역시 죄가 아니고 복을 짓는 일일 뿐"이라는 주장을 전개했다.
말하자면 원효의 기본 입장은 행위의 객관적인 결과 그 자체(살인, 비방 등)보다 그 행위의 동기, 그리고 그 행위를 발생하게 만든 종합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계율의 형식보다 "그 때 그 사람의 그 마음"을 중시하자는 것이다. 반대로, 본인이 계율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근본주의적으로" - 지키는 것에 대해 자긍심을 느껴 집착을 일으킨다면 이것이 "보살의 넓고도 큰 마음의 계를 어긴 것"이라고 원효는 덧붙인다.
우리에게 원효라는 인물이 단지 한 명의 사상가라기보다는 한국 불교의 상징이자 나아가서는 민족 영웅이기에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어차피 원전으로 읽지 않는 원효의 "넓은 마음"과 "파격적이며 독창적인 해석"을 찬탄하기가 쉬워도 이 "대승적인, 너무나 대승적인" 원효의 견해에 토를 달기가 힘들다. 그런데, 달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남을 크게 해칠 일도 없고, 오로지 깨달음만을 향해 일신의 힘을 쏟는 출가자들의 사회에서는, 계율을 득도(得道)의 방편으로 보는 것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오도(悟道), 깨달음이라는 최고의 목표가 현실 속에서 자나 깨나 인식되기에 계율을 그 목표 밑으로 두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지만, 깨달음을 목적으로 할 만한 여유도 없고, 불교에서 사회의 기본적인 윤리적 틀과 함께 탐진치(貪瞋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늪을 벗어날 만한 방도를 구하는 평범한 선남선녀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로 하여금 불교의 기본인 "제악막작 제선봉행" (諸惡莫作 諸善奉行: 여러 가지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여러 가지 좋은 일을 받들어 함)을 하게 한다면 원효와 같은 고답적인 윤리적 상대주의보다 윤리에 대한 "자율적인 확신"이 필요할 것이다. 꼭 악업을 지어 나중에 나쁜 곳에서 태어날 가능성에 대한 공포에서 기반되는, "타율적인 윤리적 확신"이 아니고 살인이나 비방과 같은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혐오에 기반하는 "나 자신"의 윤리적 확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원효는 물론 윤리 그 자체를 상대화시킬 뿐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이야기하는 일개 도구로서의 윤리는 결국 악에 가득 찬 이 세상에서는 중생들에게 그 악을 물리칠 만한 어떤 정신적 "무기"도 주지 않는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중 불교 선각자로서의 원효의 모습과 사뭇 다른 이야기지만, 원효의 대중 교화 사업 역시 윤리를 상대화시키는 정토신앙(淨土信仰)에 근거를 둔 것은 근본적인 문제다. 그러나 정토 신앙의 문제점들을 다음 기회에 다루고 이번에는 일단 우리 불교에서의 "근본주의 부재"의 상황부터 계속 짚어보자.
고대, 중세의 한국 같은 경우에는, 계율에 대한 "근본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일은 별로 없어도 적어도 계율의 엄연한 존재에 대한 인식은 투철했다. 원효가 계율의 있음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기를 호소하면서도 계율이 인연의 우연한 조합이라고 하여 계율을 없는 것으로 보고 무시하지 말라는 말도 까먹지 않았는가 하면 승가 사회도 계율을 어기는 자가 비록 고승이라 해도 스스럼없이 질책했다. 예컨대 정토 교의에 관한 그 저서로 일본 불교에 큰 영향을 미친 7세기말의 승려 경흥(憬興)은 왕실과 가깝고 "국로"(國老)의 칭호까지 얻었기에 늘 호화스러운 말을 타고 다녔다. 승려로서 무소유와 겸손한 행실을 강조하는 계율상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신라인들이 그가 결국 문수보살(文殊菩薩)로부터 질책을 얻었다는 설화까지 만들었다:
...경흥이 어느 날 대궐에 들어가려 했다. 시종하는 이들이 동문 밖에서 먼저 채비를 차리니 말과 안장은 매우 화려하고 신과 갓도 제대로 갖추었으므로 길 가던 사람들은 길을 비켰다. 그때 거사 한 사람이(사문이라고도 한다) 모습은 몹시 엉성한데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등에는 광주리를 지고 와서는 하마대 위에서 쉬고 있었는데 광주리 속을 보니 마른 물고기가 있었다. 시종하는 이가 이를 꾸짖었다. "너는 중의 옷을 입고 어찌 깨끗하지 못한 물건을 지고 있느냐." 중이 말했다. "산 고기를 두 다리 사이에 끼고 있는 것보다 시장의 마른 고기를 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말을 마치자 일어나 가버렸다. (�) 남산 문수사 문 밖에 이르러 광주리를 버리고 숨었는데 지팡이는 文殊菩薩像(문수보살) 앞에 있고 마른 고기는 바로 소나무 껍질이었다.
결국 문수보살로부터 지적을 당했음을 알게 된 경흥이 크게 탄식하여 더 이상 말을 탄 적이 없었다는 것이 이 설화의 결말인데, 그러한 설화가 생길 정도로 신라 사회가 계율 수지 (受持) 문제에 예민했던 것이다. 승려들이 옛적의 "화려한 안장의 말"에 그대로 해당되는 고급 자동차를 타고 다녀도 사회적으로 문제가 안 되고 종단에서도 별다른 조치 없는 요즘 시대보다 조금 낫지 않았는가? 신라 말기의 선승(禪僧)들이 계율뿐만 아니라 "문자" (文字) 그 자체를 이차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면서도 역시 계율 위반의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예컨대 경문왕(景文王: 재위861-875)과 가까웠던 귀족적인 승려 무염(無染: 801-888)이 죽어가는 경문왕의 궁궐에 부름을 받아 가기는 가는데, "승려의 발이 궁궐에 닿는 것이 한 번도 지나치다"고 스스로 탄식하기도 한다. 그런데 계율뿐만 아니라 경전 체계 전체에 대한 의식이 애매해지고 선사들이 신비적인 "깨달음"에만 매달려도 되는 "도사"로 인식되었던 조선말기에 와서는 계율의 위반은 부끄러운 일이라기보다는 "깨친 자"만의 표시이자 특권이 됐다. 예컨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여겨지는 경허(鏡虛: 1849-1912)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보자:
"해인사 조실(祖室)로 계시던 어느 날 경허스님은 석양에 어떤 만신창이가 된 광녀(狂女)를 데리고 와 조실 방에서 같이 식사하고, 같이 주무시고 하였다. ……만공 스님이 며칠 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경허 스님은 광녀에게 팔을 베게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에게 다리를 턱 걸친 채 코를 골고 주무시는 게 아닌가?"
사찰에서의 성교(性交)란 파계 중에서도 심한 쪽에 속하지만, 이 장면을 본 제자 만공 (滿空: 1871-1946)이 스승의 법력을 찬탄했을 뿐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의 <선가귀감> (禪家龜鑑: 1564)에서 계율을 "지혜의 달의 그림자를 비추어줄 물 (즉, 선정으로 닦아진 마음)을 담을 그릇"이라 하였는데, 지혜의 달과 하나가 된 사람은 그 그릇을 깨버려도 된다는 것은 경허와 만공의 논리인 듯했다.
지금 우리의 불교는 원효나 무염의 중도적인 계율관(戒律觀)보다는 오히려 "도사", "기인" 풍의 조선말기의 풍토를 이어받은 것이다. 승려까지 군에 입대시켜 살생을 익히게 하는 징병제에 의해 불살생계가 그 의미를 잃을 뿐만 아니라, 무소유를 강조하여 금전 사용이나 축재(蓄財)를 엄금하는 계율을 한국 승려들이 아무리 받아 지녀도 그것은 승가의 생활에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돈을 안 쓰기는커녕 쓰지 말아야 할 방법과 방향으로 쓰다 보니 일반사회에서까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원효 같은 대승 불교의 이론가들이 "윤리적 상대주의"로 살짝 열어둔 문은, 이제는 활짝 열려 "근본주의"가 없을 뿐더러 근본 그 자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원효와 같은 대승의 학승(學僧)에 의한 계율의 상대화는 과연 왜 가능했는가? 그 기원까지 따지고 보면 붓다 자신이 계율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주었다. 원효, 그리고 원효보다 훨씬 더 심하게 경허가 계율을 상대화될 수 있는 진여(眞如: 모든 중생에 내재돼 있는 불성 佛性) 내지 "깨달음"의 하위 개념으로 봤다면, 붓다에게는 본인이 제정한 승가의 계율은 비록 상대화하면 절대 안 되었지만 언제든지 "해탈"의 가치에 종속돼 있는 수단이었다. 물론 계율 공부는 수행자에게는 없어서 안 될 삼학(三學: tisso sikkh�) 계율의 공부, 뜻의 공부(참선 등을 통한 수행), 지혜(즉, 교리)의 공부 중의 첫 번째, 즉, 올바른 태도와 행동, 그리고 죄악에 대한 두려운 마음의 익히기이었고, 붓다가 기본적인 실천의 방도로 제시한 팔정도(八正道) 중에 정어(正語: samyak-v�c), 정업(正業: samyak-karm�nta), 그리고 정명(正命: samyak-�jiva)에 해당되는 구도 인생의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정어를 실천하자면 계율이 말하는 대로 망어(妄語: 거짓말), 기어(綺語: 꾸며대는 말), 양설(兩舌: 남을 이간질시키는 말), 악구(惡口: 악담, 나쁜 말)를 멀리해야 되는 것이고, 정업을 실천하자면 남을 죽이거나 남의 것을 훔치거나 음란한 마음을 내면 안 되고, 정명을 실천하자면 옷 입고 먹고 자는 생활은 계율대로 질박해야 한다. 이와 같은 계율적인 행실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팔정법의 궁극적 목표, 즉 탐욕과 번뇌를 떠난 고용한, 참선에 든듯한 마음(정정: 正定, Samyak-sam�dhi)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붓다의 기본적 논리이었다. 수행자에게도 계율이란 모든 수행의 본바탕이 되지만, 재가 신도에게도 믿음과 함께 기본적인 계율(살생, 도둑질, 거짓말, 올바르지 못한 방법의 섹스, 술의 판매와 음주: 기본 오계 五戒)이 없다면 보시하는 데에도 법문(法文)을 듣는 데에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재가자는 자신의 지계(持戒: 계율 지키기)도 철저히 해야 하지만, 나아가서는 남에게도 적극적으로 권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초기 불교는 분명히 "정신적인 규율의 종교"임에 틀림없고, 그 계율을 지키느라 병영 대신에 감옥에 가는 젊은 재가 불자들의 행동은 붓다의 원래 가르침에 그대로 따르는 것뿐이었다. 비록 초기 불교의 경전이 아니고 중국 승려들이 445년에 인도 계통의 자료를 기반으로 해서 만든 설법적인 텍스트지만, <현우경> (賢愚經: "현명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이야기")의 제5권에서 나오는 "사음(邪淫: 깨끗하지 못한 섹스)보다 차라리 자살을 택한 사미(沙彌: 아직 완전한 승려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시험 기간" 중의 젊은 승려)"의 이야기는 초기 불교의 분위기를 잘 전하는 듯하다.
그 이야기에서 한 재가 신자의 집에 공양을 얻으러 간 젊은 사미가 그 집의 16살 짜리 딸의 "불과 같은" 유혹을 뿌리치느라 자살을 택했다는 것은 골자인데, 자살을 택하는 그 순간에 그가 그 전에 계율을 위해 자진해서 죽은 선배 승려들을, 예컨대 배가 조난을 당했을 때에 유일하게 잡을 수 있는 나무판자를 "장자(長者)를 공경하라"는 계율대로 어르신 격의 승려에게 넘겨주고 그대로 익살하고 만 한 젊은 승려를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불교에서는 꼭 정치적 박해로 인한 것은 아니더라도 후배 승려들을 감동시킬 만한 "계율을 위한 순교 (殉敎)"의 전통은 분명히 존재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와 함께 붓다에게 계율이란 목적이 아닌 수단인 만큼 늘 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고 어떤 상황에서는 일시적으로 내지 항시적으로 폐지될 수도 있다는 "유연한" 의식도 분명히 있었다. 예컨대 비록 초기 경전이 아니고 기원후 약 1세기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되는 대승 불교 경전이지만 한국 불교에서도 꽤 영향력이 있는 <열반경>은 붓다가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준다:
"착한 이여, 이런 이유로 비구와 비구니, 남신도, 여신도는 마땅히 불교를 보호해야 한다. 불교를 보호해서 얻는 과보는 광대하여 한량이 없다. 착한 이여, 그러므로 불교를 보호하는 신도라면 불교를 전파하는 비구를 보호하기 위해 칼과 몽둥이라도 들어야 한다. (…) 착한 이여, 그러므로 나는 이제 계율을 지키는 비구, 비구니가 칼과 몽둥이를 든 신도들과 동반하는 것을 허락한다. 만약 국왕이나, 대신, 재력가, 신도 등이 불교를 보호하기 위해서 칼이나 몽둥이를 들었다면, 나는 그들을 ‘계를 지키는 자’라 부를 것이다. 비록 칼과 몽둥이를 들었더라도 목숨을 죽이는 일은 삼가야 하니,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계를 지키는 자라 부를 것이다."
즉, 불법 (佛法)을 위해서라도 속인에게라도 살인까지 허락해줄 수 없지만 착한 마음을 견지하면서 무기를 들 수 있는가를 결국 상황에 따라서 본인들이 스스로 결정하라는 이야기로 봐야 할 듯하다. 실제로 초기 경전에서도 붓다가 자신의 열반 이후에 사소한 계율의 조항을 제자들이 알아서 거쳐도 된다는 말을 남기는데, 마하가섭을 비롯한 보수적인 제자들이 이 허락을 결국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은 경전의 정설이다. 초기 불교의 계율관(戒律觀)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대만의 성운(星雲)스님이 결론을 내린 것처럼, 초기 불교에서 계율 제정과 변경, 그리고 지계(持戒) 엄숙성의 "정도 조절"의 기준이 바로 해탈을 향한, 그리고 계율의 기본을 이미 내면화하여 계율의 정신과 일치가 된 각자의 자비스러운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남에게 해를 입히고 자신의 정진을 방해할 정도로 계율을 변경하거나 소홀히 할 수야 없었지만 본인과 남에게 고통을 덜 주고 이득이 되는 방향이라면 "자비의 마음에 의한 계율의 약간의 조절"이 가능했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자비에 의한, 자비를 위한, 그리고 계율을 자기화한 주체에 의한 약간의 조절의 가능성"은 원효 등의 대승 사상가에 의해서 "계율의 도구화"로 대체됐으며, 또 나아가서 선불교에서 계율을 깨달음으로의 여정의 "초보적인 단계"로 보는 시각으로 더욱더 왜곡됐다. 붓다는 계율을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가져서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재해석할 권리를 후속 세대에 넘겨주었는데, 결국 무책임한 재해석의 결과로 계율이라는 근본 그 자체가 위태롭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붓다의 제자를 자임하는 대승 승려들은 "근본주의"와 정반대인 "계율 편리주의" 쪽으로 간 셈이다.
해탈로의 길인 육바라밀 중의 두 번째는 바로 지계(持戒)다. 남에게 널리 베풀고 욕을 당할 때에 참고 정진에 힘쓰고 참선으로 마음을 닦고 결국 궁극의 지혜를 얻는 것이지만, 이 일은 계율 없이 불가하다는 이야기다. 계율이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 본인이 해탈을 향한 마음으로 도저히 지키지 않을 수가 없어서 지키는 것이다. 이미 나의 일부분이 된 계율을 잘 지켜야 나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줄 알기에 지키는 것이지 지옥에 가지 않고 천당에 가기 위해 지키는 것이 아니다. 원효는 도저히 건질 수 없는 중생을 죽이는 것이 죄가 아닌 복이라 했지만 과연 자비의 계율을 이미 내면화한 마음으로 그 대상이 누구든간에 살인이란 가능하겠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남을 죽이는 일이 극히 곤란한 일이고 정상적인 상황에서 아무리 혐오한다 해도 동류를 죽이지 못하게 만든 자연의 섭리를 넘어 자신을 살인자로 만들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은 심리학에서 잘 알려진 일이다. 즉, 불살생계 등의 계율들이 인위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의 본모습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불살생계를 지키려고 군대에 안 간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세계에서 정상적인 인간다운 생활을 하려는, 극히 자연스러운 행위다.
문제는, 비정상적인 계급 사회가 계율에 관련된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는 데에 있다. 국가에 의해 순치된 사회에서는, 왕궁에 들락날락하여 수탈자 무리의 수장과 "인연"을 쌓는 것이나, 착취자들의 행동대인 군대에 가서 살인 훈련을 받는 것이 당연지사가 되고 계율 해석의 자유를 별 책임 없이 만끽하는 승려들에게 "깨달음"과 별 상관이 없는, "신민" 내지 "국민"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인식된다. 계급사회가 우리의 자비스러운 마음을 파괴하고 잠식하기에 계율을 내면화하여 어떤 외부적인 강제 없이 따를 수 있는 자비로운 자율적 주체를 전제로 하는 붓다의 계율이 파괴되고 만다.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란, 사회에 대한 철저한 비판 의식과 "나와 남에게 무엇이 진정한 이익이 되는가"라는 것에 대한 투철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계율을 실천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계율과 함께 사회를 비판적으로 해부할 수 있는 시각을 내면화한다면 계율에 저촉되는 이 사회의 그렇게도 많은 측면들이 결코 당연하지도 않고 자연스럽지도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
'***풍경소리 > 착한 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한성의 경험 (0) | 2008.01.29 |
---|---|
서설- 그대 삶은 모두 문학의 자궁 (0) | 2008.01.29 |
대승 불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정말로 문제 없는가? (0) | 2008.01.28 |
소멸-사라지는 것, 그 찰나의 아름다움 (0) | 2008.01.28 |
"기돗발"이 정말로 꼭 "세야" 하는가? (0) | 2008.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