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착한 글들

무한성의 경험

slowdream 2008. 1. 29. 17:58
 

                      [천천히 사유하기]무한성의 경험



주말이면 등산 가는 사람들을 흔히 본다. 바닷가로 나들이 가는 사람도 많다. 왜 우리는 산에 오르고 바닷가로 나가는가? 이유는 많다. 그 하나는 기분전환을 위해서일 것이다. 산이나 바다에서 우리는 제약되지 않은 느낌-모든 것이 트여오는 듯한 체험을 한다. 심신이 트이는 것, 그것은 다른 말로 무한성의 체험이다. 내가 사는 공간이 내게 속하면서도 나를 넘어 저 먼곳까지 이른다는 느낌은 광활함의 감각이다. 낭만주의는 가장 간단히 말해 이 무한성의 경험이고 그 그리움이다.


낭만주의도 물론 예술장르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또 나라나 시기, 개인의 성향에 따라 종류도 많다. 그러나 ‘무한한 것의 열망’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모두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인 프리드리히(C. D. Friedrich, 1774~1840)의 그림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바닷가의 수도사’(1809~10)는 대표적이다.


 

 

  독일 낭만주의 화가인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바닷가의 수도사’.

하늘(공기)과 바다(물)와 땅(모래)이라는 자연의 근본요소를 단순한 풍경묘사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

 밀도있게 그려내 무한성의 경험을 선사한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하늘(공기)과 바다(물)와 땅(모래)을 본다. 이것은 자연의 기본요소다. 지구가 생명의 요람이 된 것은 물과 대기 덕분이다. 땅이 인간의 토대라면 바다는 그가 유래한 곳이다. 인간은 하늘의 대기를 매순간 들이켜고 내쉰다. 그림 속 인물은 한 점처럼 서 있다. 그는 이쪽-관찰자가 아닌 저쪽을 향해 있다. 낭만주의 회화의 인물에는 이처럼 등을 돌린 채 있는 경우가 많다. 이때 관찰자는 인물과 같은 시점을 갖게 된다. 그래서 우리도 자기 내면으로부터 외부의 현실로 시선을 돌린다.


그림 속 수도사는 땅의 끝에 서 있다. 이 모래언덕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 대기와 땅과 바다뿐. 이 광대한 우주에서 인간은 하나의 얼룩처럼 자리한다. 그래서 외롭다. 황량함과 고독은 자연의 전체-우주 앞에 선 인간의 필연적 조건이다. 이것은 화면의 5분의 4를 채운 하늘에서 잘 암시된다. 물과 땅과 대기는 그가 오기 전처럼 그가 떠나간 후에도 남을 것이다. 그래서 근원적이다.


근원적인 것은 이렇듯 단조롭고 무한하다. 그러면서 순환한다. 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이 구름이 농축되어 비로 된다. 그 사이에 어떤 것은 굳어져 물질이 되고, 이 물질은 바람에 날려 모래가 되며, 모래는 먼지로 떠돌다가 물에 씻겨 내려간다. 이것은 자신을 쉼없이 비워내는 과정-탈물질화의 과정이다. 인간의 생애는, 그 육체는 먼지와 바람과 물 그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뭉쳐있는 고체가 모래언덕이라면, 모여있는 이 물질도 바람으로 물로 언젠가 소진될 것이다. 쉼 없이 출렁이는 바닷물결이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자연의 근본요소는 인간의 성취를 무시한다.


대지의 선은 바다의 수평선처럼 양옆으로 뻗어간다. 그림 위의 모든 선은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론가 흘러든다. 화면 위의 모습은 ‘드러난 공간’의 크기일 뿐. 안 드러난 것은 더 크고 그 한계는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이 무한한 선들의 연속성 가운데 한 지점이다. 전통적 회화가 그렇듯이 깊이에 대한 묘사보다는 공간의 무한성-가없는 바다와 대기의 우주적 넓이가 강조되어 나타난다. 바로 이 무제한성이 낭만적 표상의 지향점이다. 아마도 자연의 근본요소를 이처럼 선명하면서도 밀도있게, 생생하면서도 형이상학적으로 그린 그림은 드물 것이다.


자연의 무한한 모습은 우리의 정서를 압도한다. 이것은 두 가지 모순된 정서적 효과-절망과 활력을 동시에 일으킨다. 절망은 자연의 파괴적 힘에서 온다. 가늠할 길 없는 자연 앞에서 우리는 자기 몸이 보잘것 없으며 그 삶도 하찮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이 무기력은, 무시간적 우주에서 우리가 그 나름의 삶을 꾸려간다는 사실로 하여, 활력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버크(E. Burke)의 ‘유쾌한 공포(delightful horror)’란 이것이다. 숭고함은 여기에서 나온다. 인간은 물리적 조건에 제약되면서도 그 노예가 아니다. 그는 한계 속에서 그 너머를 추구한다. 이 그림에서 수직으로 서 있는 것은 인간뿐이지 않는가. 인간은 존재론적 고양 속에서 자연에 거스르는 용기-도덕적 저항력을 갖는다. 사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그림이 단순한 풍경 모사가 아니라 진실에 대한 욕구의 표현이길, 그래서 이지러진 시대의 영혼을 정화하길 바랐다.


하늘은 경계를 모른 채 여기에 있으면서도 저기에 닿아있다. 바다는 출렁거리며 그 너머로 흘러들고, 모래언덕도 저편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저 어두운 바다와 회색 구름의 층 너머 다른 세계는 있는가. 물과 하늘 너머, 땅과 역사와 세상살이의 저편에 좀더 정화된 세계가 있는 것인가? 세계의 지평은 무한의 지평이다. 이 지평에서 우리는 무한의 어떤 끝자락을 섬광처럼 떠올린다. 그 경험은 놀라움을 지나 전율에 가깝다. 그래서 신성하다. 자연체험을 어떤 문예이론가가 ‘영적 친교(communion)’와 비교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낭만주의 풍경화는 무엇보다 무한성의 경험이다. 이 무한성은 진실하고 영원하며 신적이다. 그러므로 좋은 풍경화는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다. 그것은 명상이면서 꿈꾸기이며, 기도이고, 비전이다. 참된 자연의 체험은 성스럽고도 장엄한 종교의식과 같다. 그래서 믿음은 회의와 만나고, 우울은 희망과 짝한다. 세계의 전체를 어루만지게 된다고나 할까. 삶의 이곳은 그 둘레와 너머까지 가늠할 때 온전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여분을 허용하고 그 나머지를 돌볼 때 본래성에 다가선다.


풍경화를 제대로 보려면 우리는 홀로 있어야 한다. 수도사처럼 혼자 서서 느끼고 생각하며 돌아보아야 한다. 정신의 내면적 눈은 이때 생긴다. 생명은 지워지고 있는 하나의 점이면서 무한의 우주로 이어진 고리다. 이 무한성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아왔던 세계가 세계의 일부일 뿐이며, 이 일부의 세계 너머에 알 수 없는 무엇이, 또 다른 광활함이 있음을 감지한다. 그러면서 여기 이곳이 저편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 부분은 어떻게 전체로 이어지는지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늘의 삶에서 이런 생각은 하기 어렵다.


〈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