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착한 글들

절망-힘겨울 때 ‘그래도 살아보라’

slowdream 2008. 1. 31. 15:07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2)절망-힘겨울 때 ‘그래도 살아보라’




겨울 오대산에 오르고 싶어 진부 가는 차표를 예매하다가 포기하고 눌러앉았다. 몇 차례 오대산은 절망에 빠진 나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지금 이 자리에서 견뎌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절망을 말해보기로 했다. 침묵으로 서 있는 겨울 숲이 잘 보이도록 창문을 열고, ‘귀촉도’로 시작하는 김두수의 노래가 흘러나오도록 했다. 대선이 끝난 뒤 정치면 기사를 훑어보며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학원가에 있는 선배의 전화번호를 생각하며 전화기를 조물락거렸다. 마지막으로 박지원의 허생(許生)을 생각했다.


남산 아래 가난한 마을 낡은 초가에서 허생은 7년이나 글을 읽었다. 바느질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아내의 원망어린 시선과 한숨을 애써 외면했지만, 마음 한편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도둑질도 못하냐는 아내의 말 한마디에 허생의 마음은 일거에 무너져버렸다. 그는 책을 덮고 거리로 나와 거부 변승업에게 만금을 빌려 일국을 좌우할 만한 재부를 얻었다. 정승 이완이 찾아와 대업의 방책을 물으면서 관습과 예법에서 한 치도 벗어나려 하지 않자, 분기를 이기지 못해 죽여 버린다며 칼을 찾았다.


이 짧은 이야기에서 내게 먼저 다가오는 것은 허생의 눈물이다. 책을 덮을 때, 나라 경제의 허약함을 확인했을 때, 나라에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발견했을 때, 허생은 절망에 갇혀 만강의 눈물을 흘렸다. ‘허생전’은 그 눈물의 바다 위에 떠있는 조각배인 것이다.


입술을 깨물며 참고 있다고 숨겨진 눈물을 느끼지 못하거나, 말끔히 씻어냈다고 해서 눈물자국을 보지 못한다면 삶의 어느 지점에서 ‘너’와 만날 수 있을까?


그런 ‘특별한 만남’을 전제로 한다면, ‘허생전’에 관한 이런저런 정보는 그야말로 부질없다. 신비롭고 의연한 허생의 행적에는 뜨거운 눈물이 감추어져 있고, 그 뜨거운 눈물을 따라가 보면 시대와 자기 삶에 절망한 지식인 박지원이 서있다. ‘허생전’은 이 절망에서 태어난 것이다. 박지원은 절망의 상황을 피하거나 푸념하거나 냉소하지 않고, 끝까지 그 위에 발 딛고 서서 통찰하고 품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간추리면 아마도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될 것이다. 혹 아직도 ‘허생전’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존재라면, 그 이유는 모두 그 탄생의 내력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어떤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내 삶을 위협할 때가 있다. 더 이상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순간이 있으며, 아니면 살아야 하는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절이 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상황에 직면한다. 상처투성이의 몸이다. 마음인들 그렇지 않을까? 누구나 다 덮고 살 뿐이다. 성한 부분으로 상처를 덮고, 웃음으로 번민을 얼버무린다. 해야 할 일도 있고 책임도 있다. 그러다가 작은 균열로 삶의 일각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두 손을 놓아버리고 싶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소 경중의 차이가 있지만, 절망의 무게는 언제나 균질하게 다가온다.



北關에 게집은 튼튼하다


北關에 게집은 아름답다


아름답고 튼튼한 게집은 있어서


힌저고리에 붉은 길동을 달어


검정치마에 어입은 것은


나의 꼭하나 즐거운 꿈이였드니


어늬아츰 게집은


머리에 묵어운 동이를 이고


손에 어린것의 손을끌고


가펴러운 언덕길을


숨이차서 올라갔다


나는 한종일 서러웠다.



백석(1912~1995)의 시 ‘절망’(1938)이다. 소년은 아름답고 튼튼한,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함경도 소녀를 혼자서 사랑했다. 마음속에 그녀의 자리를 만들어두었다. 너무도 순결하고 아름다워서, 흠이 갈라 생각만 해도 괜히 안타깝고 걱정이 앞선다. 그 마음을 나는 안다. 그러다가 소년은 (아마도 학업을 위해) 집을 떠나게 되었다. 몇 해 만에 집에 돌아오는데, 글쎄 그 소녀가 무거운 항아리를 이고 한 손에는 아이의 손을 잡고 게다가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지 않은가!


이 광경을 보는 순간 그는 문득 설움에 사로잡혔다. 사랑해서가 아니다. 자기가 그토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고운 모습이 여지없이 깨졌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속에서는 일 점 때도 묻히지 않았는데, 현실에서 그 환상이 무참하게 일그러진 것이다. 동시에 자기 삶의 순수함도 산산조각이 났다. 이 시는 막 소년티를 벗어나는 청년의 절망에서 태어났다.


백석의 절망이 맑은 슬픔의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것에 반해, 시대와 격렬하게 대결하고 지지 않기 위해 고심했던 김수영(1921~1968)의 ‘절망’(1965)은 또 다르다.



風景이 風景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速度가 速度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拙劣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서 오고


救援은 예기치 않는 순간에 오고


絶望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여기 나오는 풍경과 곰팡과 여름과 속도와 졸렬과 수치는 모두 독자의 시선을 현혹시키는, 야구로 비유하면 일종의 유인구다. 말에 휘둘리면 영락없이 헛스윙이다. 이 말들은 이렇게 바꿔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부패는 부패를 반성하지 않고, 비열은 비열을 반성하지 않는다.” 돌아보지 않으면 잘못을 알 수가 없고, 잘못을 알지 못하면 개선하지 못한다. 세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결정구는 마지막 한 구절,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이것이다. 한복판에 들어오는 155㎞짜리 돌직구다.


세상이 달라지지 않으면, 나의 절망도 그치지 않는다. 세상이 부조리하다면 나는 순응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절망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전혀 예기치 않은 시간과 방향에서 불쑥 나타나는 구원의 바람을 나는 인정할 수 없다. 이는 바로 시인의 비장한 자기 다짐이다. 시인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기 영혼을 잠재우지 못하게 했던 김수영이다. 이 시는 절망에서 태어나 비장하게 절망을 다짐하고 있는데도, 문득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여 대충 자리 잡고 누우려는 몸에 새로운 긴장을 주입한다. 묘한 일이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와중에서 모스크바를 떠나 멀리 우랄 지역으로 쫓겨간 닥터 지바고는 감자 농사를 지으며 배춧국 한 그릇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그리고 밤에는 늑대들이 우는 가운데 삶의 희열을 느끼며 시를 썼다.


1953년 이반 제니소비치는 벌써 8년째 혹독한 라게리 수용소 생활을 견디는 중이다. 하지만 이 악명 높은 수용소에도 삶의 본능과 기쁨이 있다. 영하 30도에 이르는 추운 겨울 노역을 마치고 돌아온 뒤 받는 한 그릇의 뜨뜻한 국, 말도 못하고 군침을 삼키며 바라보다가 얻어 피운 한 모금의 담배연기는, 그에게 자유나 전생애보다도 귀중하다. 밤 10시 이반 제니소비치는 행운의 연속이었던 하루에 감사하며 잠자리에 든다.


‘닥터 지바고’와 ‘이반 제니소비치의 하루’는 모두 처절한 절망에서 어떻게 삶을 길어 올리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그러한 절망 속에서 잉태되고 탄생한 것이다.


누구의 삶인들 절망의 연속이 아니며, 누구의 사연인들 슬프지 않으며, 따지고 보면 살아있는 것치고 허무하지 않은 게 어디 있을까? 이런저런 이유로 더 이상 삶을 버티기가 힘겨울 때, 어디선가 멀고도 깊은 곳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그래도 살아보아야 하지 않겠냐고. 우리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간다.


문학이란 자기 삶을 사막에서 건져내는, 아니면 자기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한데 그것이 때때로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 상처를 치유해주기도 한다. 놀라운 건, 아주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도 약효를 발휘하고, 지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삶의 몫이 신에게서 인간으로 넘어온 뒤, 사람들은 삶의 무게에 시달려야 했고, 살아야 하는 이유도 스스로 발견해야 했다. 그리고 커다란 약속이 비워진 휑한 자리를 사람들은 오랜 세월의 체험과 견디기 힘든 고통에서 얻은 작은 발견과 지혜로 채워야 했다.


이미 님이 떠나갔는데도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한용운, ‘님의 침묵’)라고 되뇌며 정신을 벼리는 것이나, 삶이 아무리 서러워도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조지훈, ‘승무’)며 춤사위를 가다듬는 것이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떼를 바라보며 “그는 그의 몸짓이 슬픔을 넘어서려는 것임을 알까”(이성복, ‘상류로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떼처럼’)라며 가슴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 그리고 난로 위의 주전자를 보며 “극에 달한 고통만이, 영혼을 건져 올릴 수 있다”(이윤학, ‘난로 위의 주전자’)며 삶의 고통을 달래는 것, 이는 모두 왜소한 인간이 스스로 삶의 이유를 내놓는 산고의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태어난 작은 발견과 지혜들은 밤하늘의 별들처럼 반짝인다.


모든 신화와 의례는 죽음과 재생의 과정을 상징의 형식으로 품고 있다. 하지만 신과 영웅들의 삶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 일상은 심리적으로 ‘죽음(소멸, 혼돈) →태어남(생성, 질서)’의 연속이다. 한줄의 시를 쓰거나, 한편의 이야기를 보는 것은 모두 작은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는 행위이거나, 아니면 자기 삶의 부정을 씻어내는 씻김굿을 펼치는 것과 같다. 이를 통해 아주 미세하게 부활과 갱신을 체험하거나, 아니면 마음의 오욕을 씻어내기 때문이다. 애초에 구원은 문학의 몫이 아니었다.


오대산은 겨울이 가기 전에 찾아볼 생각이다. 겨울 산은 한마디 말도 없이 나를 비장하면서도 의연하게 한다. 선배한테는 전화를 하지 않기로 했다. 절망이 희망을 낳는 것이 아니라, 견뎌냄 그 자체가 희망이 되는 것이다. 세 번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종적을 감춰 아직도 행방을 알 수 없는 허생을 찾아야 한다. 허생과 같은 인물을 그렇게 사라지게 해서는 안된다. 허생을 찾는 것이 바로 나의 일이 아닌가! 김두수의 노래 가락은 잔잔해졌다. 가만히 아래 시구를 읊조려본다.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일과이거니… -신석정, ‘들길에 서서’


〈이승수|한양대 강사〉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