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착한 글들

열망적 삶의 좌절, 쓸쓸함

slowdream 2008. 2. 4. 00:35
 

[천천히 사유하기]열망적 삶의 좌절, 쓸쓸함



줄리 : 당신은 절 믿나요?


당통 : 글쎄, 우리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해. 우린 두꺼운 피부를 가진 후피류(厚皮類) 동물이지. 서로에게 손을 뻗어보지만 부질없는 짓이야. 우린 그저 거친 가죽을 서로 비벼댈 뿐이지. 우리는 참으로 고독해.

 

 


24세로 죽은 작가 뷔히너(G Buechner)가 쓴 ‘당통의 죽음’(1835), 그 첫 장면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당통의 대답은 혁명 현실에 대한 그의 비관주의를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 삶의 간단할 수 없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많은 것이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이렇게 ‘말해진 정의가 참으로 정의로운 것인지’는 묻지 않는다. 그래서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간주된다. 당통 역시 프랑스혁명 당시 급진파와 온건파 사이에서 처형되고 만다.


프랑스혁명을 전후로 하여 서구 사회가 삶의 모든 차원에서 격렬한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변화는 문학과 회화를 비롯한 예술 분야에도 해당된다. 인간은 이 무렵 자신과 현실 그리고 신을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이해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은 사회적 영향력을 상당부분 상실하게 되었고, 종교적 모티프도 점차 줄어들게 된다. 신화적 소재도 역사 속의 소재로 옮아가게 되고, 이 역사성도 과거가 아닌 현재의 현실과 밀접하게 이어진다. 예술의 사회성에 대한 고민은 이즈음 등장한다. 자크 루이 다비드(J L David)의 그림 ‘살해된 마라’(1793)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마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 싸웠던 급진적 민중지도자이자 언론인이었다. 왕의 죽음을 주장했던 그는 자코뱅당의 당수로 활동하다가 그 뒤에 암살된다. 이런 마라의 죽음을 다비드는 혁명적 이념을 선전하기 위해 이용한다. 그러나 이 선전적 기능은 고대 그리스 로마에의 관심에 의해-다비드는 프랑스 고전주의 회화를 대표한다-완화되어 나타난다. 즉 정치적 변화에 대한 화가의 관심은 고전적 형식미에 의해 제어되면서 절도 있게 변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살해된 마라’는 현실도피적 순수예술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한 참여예술도 아닌 그보다 긴 여운-어떤 감동을 준다.


‘살해된 마라’에는 흔히 말하듯 영웅적 파토스-민중의 삶을 위해 헌신하다가 죽어간 한 도덕적 인간의 비참한 최후가 잘 묘사되어 있다. 간결한 구성이나 차분한 색채, 이 색채에 담긴 정적 분위기가 이에 한몫한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내가 보는 것은 열망적 인간의 좌절이다. 또는 넓게 말하여 표현적 인간의 그리 장엄할 수는 없는, 차라리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죽음이다. 혁명의 영웅성이나 숭고한 성스러움이 없지는 않지만, 그 이상으로 이 그림을 지배하는 것은 쓸쓸함으로 보인다. 몇 가지의 소도구들-나무 상자나 그 위의 잉크병 그리고 펜은 이를 잘 보여준다. 수건의 꿰맨 자국이나 장식 없는 벽의 단조로움은 또 어떤가. 이런 구성의 명료성은 절제나 금욕처럼 고전주의적 이념의 특성이다.


마라는 신문을 제작하고 글을 쓰면서 서민들의 불행에 주목했고, 실제로 검소한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살해되기 전에 그는 이미 중병을 앓고 있었다. 피부 종기로 국민회의 모임에도 나갈 수 없었던 그는 죽던 날에도 치료를 위해 욕실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그림 속 나무상자는 책상 대신 사용하던 거였다. 그 위 쪽지엔 이렇게 적혀 있다. “남편이 조국을 수호하다 죽은, 다섯 아이의 어머니에게 이 지폐를 보내 달라.” 이것은 마라의 민중성을 강조하기 위해 다비드가 일부러 그려 넣은 것이라고 한다. 왼쪽 이마와 눈 밑에는 피부병을 암시하듯 버짐 같은 게 피어있다. 이런 비극성은 젖혀진 머리, 늘어뜨려진 팔, 가슴의 칼자국으로 더 고조되는 듯하다.


인간의 이념은 찬란하다. 그러나 현실은 늘 그에 못 미친다. 간극은 그래서 생겨난다. 삶의 간극과 균열은 불가피해 보인다. 그것은 인간 능력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고, 이 한계 이상으로 현실 자체의 모순성에서 오기도 한다. 이 모순 가운데 어떤 것은 부조리하고, 어떤 것은 제도로, 또 더 주의하면 피할 수 있기도 하다. 한 초등학교에서 안전사고 예방교육을 받다가 두 명이 목숨을 잃은 최근의 사건은 이 뒤에 해당할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현장에서 본 열 살 아이는 지금도 무서워 자면서 오줌을 싼다고 한다.


나는 ‘살해된 마라’에서 숭고한 영웅주의가 아니라 사실로서의 죽음을, 성스러운 순교자가 아니라 너나 다를 것 없는 사람의 최후를 본다. 혁명의 이상도, 애국주의적 정열도, 심지어 선의의 덕성마저 죽음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다. 죽음은 절대적 무화(無化)이자 무차별성인 까닭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무로 균질화한다. 영웅의 죽음마저 이러할진대 보통사람들의 죽음이란 어떠할 것인가. 대부분의 생애는 기록되지 않는다.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살지 않았던 것처럼 그것은 깡그리 잊혀지고 만다. 이 같은 현실에 눈을 돌리면 숭고나 영웅성, 순교자와 같은 온갖 찬란한 술어도 표백돼버린다. 그러나 이같은 죽음에서 무의미를 도출하는 것은 진부하다. 삶은 무너지기 쉬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함부로 할 무엇은 아니다. 마라의 죽음이 하찮을 수 없는 것은 그가 혁명가여서가 아니라 인간인 까닭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의 목적성 속에서 고귀하지만, 이 고귀성은 언제 어떤 식으로든 손상될 수 있다. 그 점에서 그는 초라하다. 우리는 두꺼운 각피질로 서로의 몸을 비벼대는 무감각하고 가련한 존재지만, 이런 무감각을 가끔은 자각하는, 그래서 조금 다를 수도 있는 삶을 생각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삶이 죽음만큼 불행해선 안 된다. 우리는 인간 조건의 근원적 허약성을 인정함으로써, 그러나 이런 인정에도 불구하고 하찮지 않을 삶의 다른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는가. 어깨의 힘을 조금 더 빼고, 더 유연하고 탄력적인 성찰로 현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가. 삶의 배후와 속살은 그때야 조금씩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예술과 철학, 학문과 문화도 이 방향으로 나아간다.


〈문광훈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