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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毒蛇)와 같은 위험한 존재: 불교와 국가, 그리고 국가 폭력

slowdream 2008. 2. 3. 23:05
 


 독사(毒蛇)와 같은 위험한 존재:  불교와 국가, 그리고 국가 폭력


박노자 / 오슬로 국립대학 교수




"표적이 오르고 통제관의 명령이 내리자 불을 뿜는 총구… 사선 (射線)에 엎드려 총신을 힘껏 쥔 손들은 여승(女僧), 2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부녀자, 그리고 건장한 남자들… 서울의 향토 예비군들이 예정(5월1일)보다 앞당겨 20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간 것이다. 서울 근교 모 사단이 토요일인 이 날 실시한 사격 훈련에 참가한 예비군은 서울 성북구 대대 소속 남자 44명, 여자 지원자 25명, 남승 5명, 여승 2명이었다.


장삼의 법의를 걸친 송(宋)도진 스님(20)은 사격 자세를 잠시 쉬고 '대의를 위해서는 살생할 수 있는 것이 법가의 진리'라고 말하고는 다시 카르빈의 방아쇠를 당겼다. 명중률은 2등 사수 정도. 송(宋)스님은 임진란의 승군대장 사명(四溟)대사의 고사를 펼치며 국토방위에 앞장서겠다고 기염이 대단하다. 검은 바지에 원색의 자케트를 입은 여성지원자도 구급법 간첩 식별법 및 간첩 출현 전달 요령을 배우며 사격에 열중. (…)" (<경향신문>, 1968년03월23일) 선우도량 한국불교근현대사 연구회 엮음, <신문으로 본 한국 불교 근현대사>, 하권, 1995, 76쪽..


"나라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살생을 하지요"라고 하면서 사격과 간첩 식별법 공부에 열중하는 37년 전의 남녀 승려의 모습…태평양 전쟁 이후로는 근현대 한국 사상 거의 일찍이 본 일이 없었던 최강도의 군사주의로 흘러갔던 1968년1월의 북한 특공대의 청와대 습격 시도 직후의 전시(戰時)에 준하는 분위기에서 "국방열"에 휩쓸린 기자가 여승의 말을 제대로 전달했는지, 승려들의 "애국심"을 과장되게 보도하지 않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승려들이 사격 훈련과 방첩 훈련을 받았을 때 그 내면의  그 당시로서 남에게 쉽게 이야기할 수 없었던 - 진실된 생각이 무엇인지도 지금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개별적인 승려들이 적지 않은 경우에는 많은 고심을 안고 있는 채 불가피한 군사주의적 총동원의 상황을 그저 어쩔 수없이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박정희 독재 시절의 조직으로서의 제도권 불교가 군사주의적 애국주의에 거의 완전하게 포섭됐다는 것은 오늘날의 불자의 입장에서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반에 대처측과 치열한 갈등을 치르고 종단 등록, 사찰의 소유지 등의 여러 건으로 법정 싸움을 하고 있는 만큼 국가의 후원이 아주 절실했던 조계종 종단은, 박정희가 주도한 병영 국가 건설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반공주의적 개신교도에 의해 "반공 성전 (聖戰)"으로 인식됐던 한국 전쟁 때 이미 실시된 바 있었던 군목(軍牧) 제도를 본따 1968년에 군승(軍僧)제도가  실시되고, 바로 1968년부터 군승의 베트남 파견은 시작됐다. 1969년 1월에 베투남에 파견된 한 한국 부대의 부지에서 군승 박홍수 소령에 의해서 한국 사찰 불광사(佛光寺)가 열려 "파월 한국군 무운 장구"와 "한-베트남 친선"을 위한다는 기도 도량이 됐다. "월남국민의 8할 이상이 불교도이므로 군승의 월남파견은 국군의 대민관계 작전을 보다 호전시킴에 유익할 것으로 확신한다"는 그 당시 한 국회 의원의 발언을 들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군승제도를 제정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불교 열의"가 미 제국의 베트남 침략에의 동참과 직결된 것이었다. 1966년에 베트남에서의 한 부대 안에서 이미 건립된 작은 사찰 대한사(大韓寺)의 명칭을 봐도,  그 당시의 제도권 불교와 병영 국가 사이의 "조화로운" (?) 관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즐겁게(?) 사격 훈련 받는 여승, 미 제국 주도의 침략의 "무운 장구"를 비는 군복 입은 군승… 이 부끄러운 모습이 단순히 국가의 폭압에 의해 연출됐다고 이야기하면 마음이 가벼워질는지도 모른다. 고문이 자행되고 김지하 선생과 같은 재야 문인들마저도 자신이 공산주의자  즉, 고문해도 좋고 살해해도 좋을 "비국민"이자 "비인간"이  아니라고 항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암흑의 시절에, 함석헌처럼 국가주의와 군사주의를 비판하려면 말 그대로 본인과 휘하 조직의 끔찍한 최후를 각오하고 해야 했을 것인데, 종단 조직과 한국 불교의 장래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1945년 이전의 일본 불교의 전쟁 등 국가 범죄에의 협력이 상당 부분은 국가에 대한 기독교와의 "충성 경쟁", 제도권 속에서의 위상과 신자, 재정 확보 차원에서 저질러졌던 "자발성이 강한" 행각인 것처럼, 한국 불교의 군사화를 단순히 박 정권의 폭압만으로 역시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사실, 군대와 종교를 제도적으로 연결시킬 군승제도만 해도, 불교를 도외시하고 기독교에 편향적이었던 이승만 정권이 안하려고 한 것이지 불교의 지도부는 오히려 전쟁에서의 살생과 불교를 "둘이 아닌 하나"로 생각하는 경향은 애당초부터 있었다. 이미 1951년3월에 임시 수도 부산에서 기존 불교 종단 내의 최고 학승, 권승(權僧)들을 망라한 "불교종군포교사회"가 출범됐는데, 그 취지문은  다음과 같았다:


"(�) 불교도는 세계의 불교도와 더불어 타종교와도 보조를 일치(一致)하여, 공산주의를 무찔러야 할 것이며, 성전완수(聖戰完遂)에 적극 협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건데 일선에서 피흘리고 용전하는 용사들이 오히려 원광(圓光) 법사의 오계(五戒)를 지켜 화랑(花郞)의 정신으로 싸우되, (�) 이 때에 교단이 속수무책 방관하고 있으니, 불교를 위하여 피흘려 돌아가신 선사(先師)들을 무슨 낯으로 뵈옵고, 후세 국민에 무슨 면목이 있어 대할 것이냐. (�) 성전(聖戰)에 이바지하기 위해 교계를 대표하여 무고히 돌아가신 영령(英靈)들을 위로하고 도탄에 헤매는 국민의 정신적 위안자가 되어 싸우는 조국의 멸공통일(滅共統一)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 나아가서는 대한불교를 부흥하여 세계 불화(佛化)운동의 굳센 걸음을 내딛고자 조직하노라" "군승제도 제정운동: 1", - <불교신문>, 2069호, 2004년10월20일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 대한 북한 정권의 탄압 정책 등의 여러 상황을 고려해보면 임시 수도에서 피난 중이었던 불교계 지도자들이 반공주의적 기독교계 지도자가 써온 "성전" (聖戰)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빌려 쓴다든가, "멸공통일"을 들먹이는 것은 어디까지 이해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여기에서도 문제되는 것은, "성전에의 기여"를 하려는 열의에 불타는 불교계 지도자들이, 해방 이전에 종교 탄압을 전혀 안하는 상대자, 즉 미국과 영국 등과의 전쟁을 이미 극구 찬양한 바 있었다는 데에 있다. 그 당시의 일각의 친일 권승(權僧)들의 전쟁 찬양 행각이 벌써 한 저서[임혜봉, <친일불교론>, 상, 하권, 민족사, 1993.]에서 전문적으로 다루어졌으니 여기에서 자세한 언급을 굳이 안해도 되지만, "불교종군포교사회"의 핵심 멤버이며 해방 이후 불교계의 권위자 (동국대학교 초대총장,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원장) 권상로(權相老: 1879-1965)가 일제의 침략 전쟁을 찬미하면서 불교와 전쟁의 관계를 언급한 이야기를 한 번 인용해보자:


"(…) 아무리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부처님이라도 자비를 감추시고 분노를 외면적으로 표현하시고 질책도 하시고 벌도 주시는 것이, 이와 같은 자그마한 해충이라도 이를 구태여 퇴치하고 박멸하려는 것은 해충이 사람의 안에 있으면서 사람의 신체를 해치기 때문이다.

(…) 불교에서 진속(眞俗: 출세간과 세간)이 둘이 아니오 이사(理事: 형이상적인 것들과 형이하적인 것들)가 융합하여 개인의 하루하루 생활의 미세한 부분부터 국가의 입정치민 (立政治民: 정치)의 거대한 부분까지 모두 불교다. 전체가 성현의 법으로 다스려지는 (일본) 제국이 바로 불교 그 자체다. (…) 순전히 불국(佛國)인 (일본) 제국이 제국을 향해 폭력을 자행하고 멸시하는 저들을 (…) 응징하는 것이 천토(天討: 천벌)을 행하는 것이고, (…) 실로 민중을 도탄에서 구제하시려는 위 없이 심심(甚深)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운용 (運用)이시다. (…) 대동아의 공존공영을 도모하는 것은 (일본) 제국이 아니고는 다시 감행할 자 없으니 이것이 곧 여래의 사명(使命)이다. 팔굉일우 (八紘一宇)의 목표는 (…) 곧 부처의 주의를 그대로 실현하는 것이다. (…) 이번 대동아 성전(聖戰)은 틀림없는 여래의 사명인 것이 분명하다" ("대동아 성전과 불교", - <(신)불교>, 제43집, 1942년12월호, 6-11쪽. 현대어로 번역했음) <한국근현대불교자료전집>, 권22, 민족사, 1996.


이 글을 그 뒤에 계속 읽어 "우리 제국이 바로 부처님의 나라다, 우리 제국을 위해 멸사봉공하는 것이 바로 보살행(菩薩行)이다"라는 대목이 나올 때마다, 해방 이후에 똑같은 어투로 쓰여졌던 "성전(聖戰), 멸공, 보국(報國)"에 대한 불교 지도층의  군사주의적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가? 친일 행각이든 해방 이후의 군사적 국가주의든 저들의 국가 담론에의 "경쟁적 충성"은 물론 저들의 현실적인 이권 획득의 문제로부터, 기득권 보존 및 확대에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승려로서 "천황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전쟁은 바로 불교적 실천이다"라는 말을 쓰고도 나중에 부처님과 중생 앞에서 한 점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정도라면 어디까지나 마음의 깊은 내면까지도 국가를 신성시(神聖視)하고 전쟁을 근본적으로 긍정시하지 않으면 안됐을 것이다.


즉, "대동아 전쟁"의 표어이었던 "팔굉일우" ("전세계를 대일본 제국의 지붕 밑으로 두자")에 대한 찬양이야 현실적 질서에 적응하기 위해 하는 아부라고 치더라도, 불교와 군주의 정치를 둘이 아닌 하나로 본 것이나, 군주의 전쟁을 "여래의 사명"쯤으로 여기는 것은 거짓이 아닌 권상로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일제의 반미 전쟁이든 대한민국의 친미반공 전쟁이든 국가 권력이 자행하는 폭력을 "부처의 사명"으로 보는 것은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권상로뿐인가? 일제의 암흑의 시절이나 광적인 반공주의의 1950-70년대에 제도권의 불교가 국가주의와 전쟁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못해온 것은 이미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요즘은 과연 크게 좋아진 부분은 있는가? "국가와 통치자의 신성함"이야 불자든 아니든 이제 와서 아무도 안 믿지만 일체 승속(僧俗) 남성의 군복무, 즉 국가에 의한 살인 훈련의 "신성함"  적어도 절대적 필요성  정도는 아직도 불교 공동체 안팎에서 충분히 통하는 이야기다.


불교적 신앙으로 양심적 병역 거부를 단행한 불자로서 아직은 오태양 법우(法友)는 유일하고, 그에 대한 종단 차원의 지원이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즉, 비구니스님이 신문 기자 앞에서 카르빈 총을 "즐겁게" (?) 잡아 사격훈련을 받았던 광란의 시대는 가더라도, 불교의 산 생명인 불살생계(不殺生戒)를 분명히 위반하는 남자 승려의 군 입대에 대해 아직도 "파계"라 하지 않는다. 군사주의적 광기가 가라앉았음에도, 불교에 훈습된 군사주의 그 자체는 그대로 건재(?)한다.


국가와 국가적 살생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는 과연 어떻게 형성된 것이고 초기 불교의 원래 가르침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물론 근대 한국 불교의 국가주의의 직접적인 뿌리를 찾으려면 일차적으로 1900년대부터 권상로와 같은 소장파 학승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메이지 일본의 국가주의적, 군사주의적 불교부터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메이지 시대부터의 일본 불교의 군국화에 대해 일본 불교의 파쇼화가, 한때 혁신 운동과 노동 운동에 몸담았다가 1930년대 초반부터 전향하여 극우화된 아카마쓰 가쓰마로(赤松克?: 1894-1955)와 같은 다재다능의 운동가형(型) 학승들에 의해  1930년대에 적극적으로 추진됐는데, "천황의 도덕적 교화하의 몰아적(沒我的), 유기적 국민 공동체"와 그 "공동체"를 위한 "전장에서의 멸사봉공"을 찬미한 아카마쓰의 <신국민 운동의 기초> (1932) 등의 서적들은 조선에도 유입되어 큰 영향을 미쳤다.


사실, 권상로 등 조선의 군국주의적 승려들이 쓰는 표현들이나 그들이 취하는 전반적인 논리는 아카마쓰 등의 일본의 "불교적 국가주의"의 냄새를 다분히 풍긴다. 그러면, 조선 불교의 근대적인 왜색화 이전의 사정은 과연 어땠는가? 14세기말부터 억불 정책을 주장했던 유생(儒生)들이 승려들을 으레 "국가를 보필할 줄 모르는" (無補國家), "아버지와 임금을 섬기라는 가르침을 갖고 있지 않는" (無父君之敎), "충효가 없는" (不忠不孝) 존재로 묘사하여 비난했지만, 한국의 불교는 결코 국가에 대한 충성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화랑들에게 "살생유택" (殺生有擇)의 계를 줌으로써 속인들의 "조건부 살생"을 긍정한 것으로 유명해진 원광(圓光: 542-630)은, 직접적인 살생을 할 수 없는 승려인 자신에게 608년에 왕이 수나라 군사를 고구려 치는 데에 끌어들이는 걸사표 (乞師表)를 쓰라고 강요하기에 "자기가 살기를 구해서 남을 멸망시키는 것은 승려가 할 일은 아니지만 내가 대왕의 땅에서 살면서 대왕의 물과 풀을 먹고 있으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여 "간접적 살생"에 해당되는 걸사표 작성 행각을 그대로 벌이지 않았던가?


원광이 대표했던 한국 고대의 불교는 살생의 악업을 정확하게 인식했으며 국가적인 살생을 "성전" (聖戰)으로 보는 독신적(瀆神的) 시각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한 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는 한 그 국가가 행하는 살생에의 최소한의 간접적 동참 정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 최악의 살생의 업, 즉 전쟁의 와중에서 원광이 한 번 군인의 횡포로 목숨을 잃을 뻔했던 중국 유학 시절에 원광이 수나라(581-618)의 국가 불교를 직접 목격하고 많은 시사를 받은 듯했는데, 수나라에서 지윤(智閏)과 같이 학승들이 고구려 원정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불교와 국가의 "정상적인 관계"로 돼 있었다.


환속되지 않는 이상 승려는 군대에 끌려가지는 않았지만 "전승을 위한 기도"라는 형태로 불교가 국가적인 살생에 정신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국가에 예속돼 있었던 중국 불교의 실상이었다. "임금의 땅에서 살면서 부처님의 해를 이고 있는" (居王土而載佛日: "쌍계사진감선사탑비") 상황이다 보니 당나라 때부터 승려가 "보살"  그리고 가끔은 아예 "이 시대의 부처"를 자칭하는 황제에게 절하는 것은 법률이 됐으며, 약 8세기 중반부터 승려가 황제 앞에서 신하임을 칭하기(칭신: 稱臣)시작했다. 준거 국가인 중국에서의 상황이 그렇기에 원래 고승을 왕의 스승으로 받들었던 한반도에서도 약 10세기 중반부터 고려의 왕 앞에서 승려가 단지 한 명의 "신하"를 칭하기 시작한다.


중앙 집권적 농업 관료 국가인 당나라나 송나라, 고려, 그리고 조선에서 한낱 신하인 승려가  임진왜란과 같은 예외적 비상기만 아니라면 전쟁터에 내몰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국가에 의한 살생을 "감히" 비판할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그런데 중앙 집권적 구조가 가마쿠라 (鎌倉) 시대(1185-1333)에 이르러 거의 망가져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상황이 연출된 일본 같으면 아예 커다란 농장을 보유했던 여러 요새화된 사찰의 승병(僧兵)들 사이에서 몇 세기 동안 혈투가 계속 벌어지곤 했다. 중국이나 조선처럼 불살생계가 국가에 대한 예속 관계의 맥락에서 상대화된 것도 아니고 완전히 무너지고 만 것이다.


동아시아라는, 국가가 일찌감치 사회를 강력하게 장악한 공간에서는, 14세기의 고려, 조선 유생(儒生)들의 비난과 정반대로 불교가  매우 아쉽게도 - "아버지와 임금을 섬기라는 가르침을 갖고 있지 않는", 즉 세간을 초월하는 종교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자진해서 왕자의 자리를 물러난 붓다의 대(對)왕권, 대(對)국가 관계의 원래 구상이란 과연 무엇이었던가? 초기 불교의 국가 이해부터 이야기해보자면, 국가나 국왕의 존재는 기본적으로 중생 악업의 결과로 인식됐다. 토지에 대한 사유가 생기고 그 사유에 의한 소유욕이 발달되고 이와 같은 깨끗하지 못한 욕망들에 의해 분쟁들이 생기다 보니 결국 그 조절자로서의 국왕이 불가피하게 나타나게 된다는 이야기다. 413년에 이루어진 Digha (長部)-nik�ya의 한역 (漢譯)인 장아함(長阿含)의 제22권의 그 유명한 "세기경" (世記經)의 본연품(本緣品)을 보면 국왕을 출현케 한 인류의 악연은 다음과 같다:


" 천지가 개벽한 후에 인류가 발생하여 곡식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차 인구가 증대해 갔다. (…) 각자 자기의 논과 남의 논을 구별하게 됐다. 그런데 어느 때에 어떤 사람이 (…) 남의 논에 있는 곡물을 훔치는 일이 일어났다. 이러한 일이 거듭되자 다른 사람들이 그를 여러 사람 앞에 끌어다 놓고 비난하면서 손과 몽둥이로 때렸다.  논밭에 경계의 구별이 생기자 이와 같은 다툼과 소송이 일어나고 사람들의 근심거리가 됐다. 그런데 이 일을 해결하고 판정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통된 주(平等主)를 세워 인민을 보호하고 선에는 상을 주고 악에는 벌을 내리도록 하자고 했다. 그들은 각자의 수익 중에서 일부를 떼어 그것을'공통된 주'에게 공급하기로 했다. 이때 군중 속에 신체가 건강하고 그 모습이 단정하며 위엄을 갖춘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우리들은 이제 그대를 세워 주(主)를 삼으려고 한다'라고 했다. 그는 이 청을 받아들여 인민의 주가 되어 상을 줄만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벌을 내릴 만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렸다. 그를 가리켜 민의 주(民主)라고 한다. 그의 자손이 대대로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어리석음과 탐욕으로 인한 악업의 결과로, 다툼에 지친 사람들은 차악(次惡)으로 조절자로서의 권력자를 세우게 됐다는 이야기다. 권력이란 사회적 합의의 결과라는 차원에서는 이 이야기가 서양 근대의 장 자크 루소(1712-1778) 이후의 사회계약설과 매우 흡사하고 근대적 "인권" 개념과도 잘 어울리기도 하지만, 중요한 특징이라면 권력의 출현이 합의의 결과라 하더라도 일단 인류의 "타락의 조짐", 즉 본원적으로 어떤 악업이 내포되는 현상으로 묘사돼 있는 것이다. 악(惡)의 만연으로 인해서 생기게 된 권력이란 선(善)이 될 수는 없다. 물론 붓다와 그 제자들이 국왕의 순기능이라 할 "조절자"로서의 기능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국왕들에게 "법으로 다스리고 비법(비법: 非法, 즉 폭력)으로 다스리지 마시오, 이치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비(非)이성으로 다스리지 마시오, 정법(正法)으로서 백성을 다스렸던 사람이 죽어서 하늘에서 태어난다" (<증일아함>, 제51권, 대애도반열반분품: 大愛道般涅槃分品第五十二)라고 설법하기도 했다.


그런데 붓다가 살았던 열국(列國) 패권 싸움 시대에 과연 붓다의 조언대로 인도주의적 통치를 베풀고, 세금을 최소한으로 감세시켜주고 세금으로 얻은 재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눔으로써 범죄와 재판, 형벌의 필요성까지 없애는 재분배를 통해 가난을 없애는 붓다의 이상적 군주상에 대해 군주들이 그토록 많았던가? 지금도 착취의 기회를 "자진 반납"하여 긁어모은 재물을 가난뱅이에게 모조리 나누어주는 착취자 계급의 구성원을 찾아보기가 어렵지만, 붓다가 상대해야 하는 그 당시의 군주들도 대부분은 붓다의 이상과 사이가 멀었다. 예컨대 중인도 코살라(Ko�ala)국의 프라세나지트(Prasenajit: 전통 한역은 파사닉, 波斯匿)왕은 재물에 대해 다소의 욕심을 갖고 통치에 있어서는 가끔 오류도 범했지만 붓다의 설법을 열심히 청해 들었고 불법(佛法)을 외호하고 붓다와 그 제자에게 그 유명한 기원정사(祇園精舍)라는 거처를 지어 바치기까지 했다.


승가의 내부 생활에의 일절의 간섭 없이 단지 붓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승가 생활의 물리적 기반을 제공해준다면 종교와 국가의 이상적 관계일지도 모르는데, "착한 군주" 프라세나지트 대신에 그의 아들 비두다바(Vid�dabha: 전통 한역은 유리왕, 琉璃王)가 등극하자마자 행복한 시기가 끝나고 말았다. 붓다의 속가(俗家) 친족이었던 사캬(釋迦)족에게 아버지가 한 번 모욕을 당했다는 것을 핑계 삼은 폭군 비두다바가 대군을 이끌고 붓다의 고향인 카빌라바스투(迦毘羅城)를 향해 출정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의 스승인 붓다가 그를 몇 번 (경전에 따라 두 번 내지 세 번으로 나온다)이나 설득해 말렸지만 결국 다 과거의 악연 (惡緣)인 줄 알고 내버려두자 그의 고향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그 속가는 섬멸 당하고 말았다. 인류에게 자비와 비폭력을 가르친 뭇중생의 영원한 스승, 붓다도 결국 국가 폭력의 피해자가 된 셈이다.


그러한 환경에서는 붓다의 승가가 과연 국가와의 어떤 관계를 지향할 수 있었던가? 폭군 비두다바가 붓다의 친족을 미워해도 붓다 자신을 해칠 마음을 내기는커녕 붓다의 설득에 몇 번이나 전쟁을 중단하고, 붓다 자신도 역시 고국이 전쟁에서 사라져도 직접 가서 싸울 "호국불교적" (?) 생각이라고 추호도 없었던 것으로 봐도 알 수 있듯이, 아직도 중앙집권화가 진척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인도에서 출가자가 일종의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었다. 수나라의 고구려 정벌처럼 출가자들이 군주의 전승을 위해 기도하거나 임진왜란처럼 출가자들이 군인이 된다는 것은, 그 시대의 풍토로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통치자들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가 있었던 붓다는, 이와 같은 상황을 적절히 이용해서 철저한 "정교분리" (政敎分離), 즉 국가로부터의 완전한 독립과 국가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의 중립의 원칙을 세웠다. 예컨대 신라의 유명한 자장(慈藏: ?-658)스님에게 스승 격이 되었던 당나라의 도선(道宣: 596-667)율사가 많이 의존하고, 자장 자신도 열심히 연구했던 불교 초기의 계율 지침서가 바로 <사분율> (四分律)인데, 이 <사분율>에 의하면 비구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군주의 군대가 있는 데에 가서 구경이라도 할 수 없는 것이고, 부득이한 사정으로 병영에 가더라도 일정한 기한을 넘어 거기에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병영에 있더라도 전쟁의 참혹한 모습을 구경할 수 없다. 국가의 폭력을 멀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대궐에 들어가는 것도 비구로서 죄가 되는 등 국가 권력 그 자체를 되도록 멀리해야 했다.


비구 자신도 당연히 폭력을 절대적으로 멀리해야 했지만 막대기나 칼, 창 등 무기를 가진 이에게 설법할 권리도 없었다. 만약 그 계율을 성실히 지켰던 초기 승가의 구성원들이 예비군 군복이 걸려 있는 오늘날의 승방을 구경이라도 했으면 뭐라고 했을까? 당나라 이후의 중국, 한국 승려들이 자신을 임금의 "신하"로 칭하는 등 군신(君臣) 관계의 형식을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임금의 봉록을 받는 신하에게 득도시켜 출가시킬 수 없었던 초기 불교의 계율로 봐서는 그 당시의 "비구 되기"의 의미는 바로 어떤 국가와의 신민(臣民)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군주와의 복무 관계 아닌 일반민이라면 그 당시의 상식으로서 비구가 되어서 국가 통치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복무 중의 관료, 군인 등이 비구가 되어 국가와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는 것이 군주의 노여움을 살 수 있는 행위이었기에 붓다가 이와 같은 상황을 피하려 했다.


흥미로운 것은, 비구가 군대에 구경이라도 가지 말라는 위의 계율들은 군주의 군대뿐만 아니라 "도적의 군대", 즉 "국가"라는 딱지가 붙어 있지 않았던 "비공식적인 권력자"의 폭력 기구에도 그대로 적용됐고, 초기 계율 지침서에서 군주와 도적이 "독사(毒蛇)처럼 피해야 할 위험하고 부정 (不淨)한 존재"로 자주 같이 언급된다는 것이다.  국가를 인류 악업의 결실이자 폭력이라는 최악의 악업의 생산자, "조절"의 순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권력층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 늘 악용되는 폭력 기구, 그리고 수행자가 피해야 하는 만악(萬惡)의 온상이라는 붓다의 "국가관"은 국가와의 타협이 많이 진행된 대승 불교의 시대에도 상당부분 유지됐다. 대승의 기본적인 계율 지침서인 <범망경 보살계본> (梵網經 菩薩戒本)의 "가벼운 계율" (경계: 輕戒) 중의 11번째는, 나라 사이의 군사 사절이 되어서 싸움과 살생을 부추기지 말라는 계율(通國入軍戒)인데, "호국 불교의 창시자"로 받들어지는 원광은 "대왕의 땅에서 살면서 대왕의 물과 풀을 먹는" 이유로 수나라 황제에게 걸사표를 써서 바로 이 계율을 범한 것이었다.


로마제국에서의 기독교가 박해 받는 종교에서 제국의 국교(國敎)된 것과 같은 극적인 전환은 아니었지만 권력자를 멀리하면서 불가피할 때에만 그들에게 자비스러운 통치에 대한 조언을 주었던 붓다와 그 제자 시대의 "국가 밖의 불교"가 역시 점차 국가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마우리아 왕조의 3대 아쇼카왕(阿育王: 기원전 272~232년) 재세에 불교에 대한 대규모의 국가적인 지원이 행해졌는데, 지원이 후한 만큼 승가의 내부 문제들에 대한 국가의 간섭도 강해졌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미 상류층에서 다소의 지지를 확보하여 상당히 "주류화"된 교단으로서 "불자 황제"의 출현은 거의 역사 최대의 경사로 인식됐다.


붓다와 그 직후의 시대에 국왕이란 잘 해봐야 "주민 사이 분쟁의 좋은 조절자", "피치자의 합의에 의해 재분배를 잘하고 치안 유지를 잘하는 전(全)사회의 최고의 공복(公僕)" 정도로 인식됐으며 대개는 "피해야 할 독사(毒蛇)"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마우리아 왕조의 인도 통일과 아쇼카의 불교 숭배 등에 감회 받은 승가는 대략 3세기나 그 이후에 아쇼카가 제시한 "도덕적 통치"의 이념에 따라 힘이 아닌 감화력으로 전세계를 정복하여 지배하는 chakravartin, 즉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신화를 만든다. 아쇼카가 자신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지만, 국가의 지원에 의존하는 승가의 입장에서는 봉불(奉佛)에 성실하고 표면적으로나마 불교의 도덕적 이념에 동조하는 군주라면 이제 전륜성왕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국가와 군주의 이상화(理想化)는 왜 위험했던가? 아쇼카 자신도 아무리 불교에 귀의했다 해도 인도의 통일을 대대적인 전쟁을 통해 수행했으며 통일왕국의 통치를 수많은 밀고자와 사찰(査察) 관료 등을 포함한 관료 기구를 통해 실시했으며, 불교를 후대하고 승려들의 보좌를 받아 자신을 "전륜성왕"으로 인식한 신라의 진흥왕(眞興王: 540-576)도 역시 "도덕"이 아닌 고구려, 백제 등과의 처참한 전쟁을 통해서 국토를 넓히고 중앙 집권적 관료 체제의 기본틀을 잡은 것이었다. 결국 국가가 "절대선"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한 승가는, 폭력적 국가와의 예속적인 공존 관계에 들어간 것이었다.


초기 불교의 탈(脫)국가적 정신을 기억하고 있던 승려로서 이러한 관계가 사실 매우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원광도 파계인 줄 알면서 걸사표를 지은 것이었고, 중국 유학 떠나기 전의 자장도 산에서 나와서 재상이 되지 않으면 처형하겠다는 왕명을 듣고 "차라리 하루 동안 계율을 지키다 죽을지언정 백년 동안 계율을 어기면서 살지 않겠다"는 명답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도 계율에 밝은 자장은, 중국에서 돌아온 뒤에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 중의 신라를 "불국토", 즉 부처님의 땅으로 선전하는 등 국가의 이념가 역할을 과연 자청하지 않았는가? 그가 모델로 삼았던 당나라에서 국가가 이미 승가를 철저하게 통제했던 만큼 그도 국가를 멀리할 생각을 하기가 힘들었다.


승가가 국가의 기능을 맡았던 전통 시대의 티베트와 같은 형태든, 국가가 승가의 종교적 권위에 의존하면서도 승가를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스리랑카나 버마, 태국 등의 남방 불교의 형태든, 승려가 결국 "신민", "백성"의 신분 안에 갇히게 된 전통적 중국, 한국의 형태든, 어디를 가도 아쇼카 시대를 전후해서 불교가 지배계급의 종교가 되어 "주류화"된 뒤에 승가가 국가를 제대로 벗어난 경우는 없다. 승려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무기를 들 수 없는 남방 불교의 철저한 계율 실천이야 일제 시대의 불교 군사화의 잔재가 지금 제대로 청산되지 않아 승려의 군복무가 파계로 인식조차 되지 않는 한국으로서 참고할 만 하지만, 남방 불교만 해도 불교의 담론이 민족주의적 국민 세뇌의 뒷받침이 되는 등 승가가 국가적 폭력을 완벽하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결국 붓다 시대의 비판적인 국가관을 회복하여 나아가서는 국가와 자본의 시대를 인류가 빨리 종식시킬 수 있도록 하려면 불교가 우선 지배계급과의 거리부터 두어야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불교와 현대 세계의 사회 비판적인 이념들이 우선 결합돼야 되지 않을까? 나의 생각으로는 현 상황에서 초기 불교의 탈(脫)국가적 성향과 평화, 비폭력주의를 회복하여 발전하려면 전반적인 "불교의 진보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진보적 불교, 그리고 불교 사회주의 등의 이야기를 여기에서 지면상으로 더 이상 할 수 없기에 다음 기회에 보다 자세히 하기로 하자.


출처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