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도들 앞에와서 유일신을 믿는 이교도들이 그런 주장을 한다면, 알고 보면, 탄광마을에 구공탄 구루마를 끌고 와서 팔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입니다. 불교경전을 잘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혹시 귀가 솔깃할지 모르지만, 아는 사람들은 웃고맙니다. 불교에는 무시이래 별처럼 많은 무수한 부처님들이 하늘의 불국정토를 지키고 계시며, 모든 부처님들은 하늘의 불국토에서 지구에 내려오시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욕계 제 4 천(天)인 도솔천(兜率天)에서 흰코끼리 태몽으로 네팔 가비라국 정반왕의 왕비인 마야 왕비를 어머니로 선택하고 탁태(托胎)해 인간계로 내려오셨습니다. 도솔천(兜率天)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이 있는데, 다음 세상에 부처님이 돼 내려오실 미륵 보살도 이곳 내원에 계시며, 여타 천상(天上) 대중(하느님)들의 즐거운 욕락(慾樂)의 거처는 외원이라고 합니다.
부처님들이 묵고계신 곳은 색계 하늘의 최정상인 색구경천(色究竟天)의 불국정토를 비롯해, 사바세계 밖 은하계 서쪽 서방정토(아미타불), 또는 동방정유리(淨琉璃)세계(약사유리광불)등의 무수한 불국정토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타라보살은 관세음보살의 지상정토 보타락와 무색계에 정토를 두고 있고, 바즈라요기니의 색구경천(色究竟天)의 불국정토도 있습니다.
욕계 하늘인 도솔천(兜率天)은, 아미타불이 48 대원(大願)을 서약해 18 번째 대원이 중생들이 서방정토태어나도록 이끌어 안내해 주시는 극락세계와는 달리, 중생들이 스스로 많은 노력을 해야 그곳에 태어날 수 있는 불국토입니다. 이곳에는 미래의 미륵불이 되실 미륵보살 밑에서 설법을 들으며 앞으로 반드시 성불할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특징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중생들이 노력을 계속 정진하지 않으면 다시 퇴전(退轉)할 수도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유일신을 믿는 이교도들의 경우, 대부분 추상적으로 하늘을 이야기하지만, 정교한 천상과 우주의 만달라에 정통하고 자세히 설명돼있는 불교와는 달리, 어느 하늘인지 조차 모르며, 떠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하늘은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천신의 고향이라니까, 필시 욕계의 어느 하늘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욕계 제 1 천은 사천왕천, 제 2 천은 도리천, 제 3 천은 염마천, 제 4 천은 도솔천, 제 5 천은 자화자재천, 욕계 6 천은 타화자재천임.)
부처님의 정토와 달리, 여타 하늘의 중생들(하느님들)은 그곳에서 즐겁게 살 인연이 다하면 다시 지상이나 지하의 중생으로 윤회한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들 하늘 중생들에게도 불법을 닦아 윤회에서 벗어날 것을 늘 강조하시며 설법하시는 분입니다. 부처님을 천중천(하느님의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근간에 한국불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중에서, 계율에 대한 혼동된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운 측면이 많다. 특히, 보살계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는 것이 제일 안타까운 점이다.
비구/비구니/사미/사미니가 받는 계와, 재가불자들이 받는 5 계와 8 계는, 별해탈계라고 하여 자신(개별)의 해탈을 위해서는 받드시 지켜야만 하는 계이다. 이와는 달리 보살계는 '이타행' 즉 '보살행'을 실천하기 위한 계인 것이다.
티벳의 경우, 아티샤스님의 보리도등론 이후로, 이러한 별해탈계와 보살계, 또한 밀교의 계율이 서로 상충되지 않고 수행단계에 따라 필요한 차제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별해탈계는 보살계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 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계 자체를,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수행자에게 주지 않고, 너무나 형식적으로 주는 경우가 다반사가 되다보니, 계를 받고 바로 파하는 것에 대해 너무나 무감각해지고 있다.
특히 보살계의 경우, 위대한 보살의 원력을 낸 수행자가 받는 계라고 인식되어져야 하는데, 오히려 노보살님들의 '기복 행사'정도로 인식되어 버린지 오래다. 그래서 계를 받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신의 수계하는 보살계의 계목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고, 처음부터 아예 지킬 생각은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이는 현대인들이 술을 마시지 않고, 고기와 오신채를 먹지 않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 그것을 어떻게 지키냐고 하면서, 수계받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둔다고도 하지만...... 계는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그것을 목숨같이 실천해 나아가기 위함이니, 스스로가 보살행의 발심이 되지 않으면 받지 않아야만 되는 것이다.
이는 불자로써 오계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오계의 다섯번째가 '술을 마시지 말라'인데, 지금 불교계에서는 오계가 대중화되면서, 계사 스님들이 '이 계목은 술을 아예 마시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취하도록 마시지 말라는 말이다.'라고 멋대로 계를 왜곡하여 해석하는 경우가 참 많다. 그러나 이 계목은 말 그대로 '술을 마시지 말라'이니, 이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예를 들어 술을 판다든지, 영업을 한다든지 등), 오계중에 네 가지의 계율만 받아 지니되, 언젠가는 노력해서 온전한 계율을 받게 될 것을 다짐해야 하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계를 받고, 또한 무감각하게 계를 파하는 것이 습관화되면,
우리의 수행또한 미세하고 정확하게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자각해야 한다.
소위 선방에서 공부한다는 재가 불자들이나 스님들은, '술이나 고기, 오신채'에 대한 아주 비뚤어진 관념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은, 누군가가 이러한 보살계를 세밀하게 지키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찬탄하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계에 걸려있다"고 비아냥거리는 경우가 꽤 많다.
티벳의 경우, 밀교의 행법으로, 자신에게 남아있는 분별심을 철저히 파괴하기 위해, 세간에서 혐오하는 것을 일부러 취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어떤 수행자들은 시체를 베고 자기도 하며, 일부러 동물의 뼈나 화장막의 뼛가루를 자신의 몸에 두루거나 바르기도 한다. 또한 위대한 성취자 중에서는 평생을 쓰레기를 먹었던 분도 계셨고, 생선 내장만을 먹으면서 평생을 지내신 분도 계셨다.(우리나라의 나옹스님도 평생 헌식한 음식들을 탁발해 드셨다.)
수행하는 사람들 중에 혹자는,
세상사람들이 탐욕으로 즐기는 것들, 즉 고기와 술과 오신채를 똑같이 즐기면서,
스스로는 분별심을 넘어섰다고 우기고 있으니...이런 막말을 하는 불자들은,
참으로...... 스스로의 계체를 파할 뿐더러 불법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상반이 하반을 억압하거나, 법랍에 의한 권위주의가 참 많은데 비해, 티벳의 도량은 선지식을 중심으로 너무나 평등한 관계 속에서 율장에 의거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특히 보름에 한 번 씩 포살을 하는 것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고, 심지어 무문관을 수행하는 수행자조차도 유나스님이 직접 찾아가서 포살을 한다고 하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부끄럽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계율만이 능히 수승한 도를 얻으리.
자비심을 갖추어 함께 닦으면
최상의 청정한 지혜로 저절로 허물은 없어지며
최고의 장엄이 되네.
계는 미세한데 까지 지녀야 계체가 온전한 것이니
아무리 털끝만큼이 빈다하더라도 파괴되고 만다.
그러므로, 범하면 대도에 장애가 있고
번뇌를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악업이 증장되어 지옥에 떨어진다.
** 티벳에서는 계를 어겨서 다음의 네 가지가 성립되면 계가 완전히 파했다고 간주한다.
1. 실수로 했다고 여기지 않는 것.
2. 같은 행동을 반복하겠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는 것.
3.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흡족해 하는 것.
4. 부끄러움을 모르고 신중하지 못해서, 자신의 행동의 결과로 타인이 받게 될 결과를 상관
하지 않게 되는 것.
만일 보살계를 받고 하나라도 파하게 되면, 계를 파한 나쁜 과보를 피하기 위해 다음의 네 가지 대치를 하고 나서, 다시 보살계를 수계해야 한다.
** 네 가지 대치
1.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것.
2. 자신의 파한 것을 회복하는 것.(삼보에 귀의하고, 보리심을 낸다)
3.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는 것.
4. 좋은 공덕을 쌓는 것.(수행)
이상의 사항을 살펴볼때 우리 나라의 보살계를 받은 스님들과 불자님들은 다시 한번 계의 진정한 의미를 되살펴 봐야 할 것이다. 모두가 이름뿐인 승려가 되서야 어찌 대승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각하고 자각해야 할 것이다. 특히 구족계를 받는 비구 비구니 스님들은 계를 받기 전에 반드시 보살계를 받는데, 그냥 형식으로 받아서는 안될 것이다.
흔히들 불교의 핵심사상이 '공사상'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 '공사상'을 제대로 증득하지도 않고,
머리로만 이해한 상태에서, '바른 견해'와 '자비심'을 갖추지 못한다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슬픈 일이 벌어지게 된다.
지금까지 여러 수행자들을 만나면서,
생각한 것 보다, 훨씬 심각하게,
우리나라의 수행자들이 '아전인수'격인 공사상에 너무나 익숙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육식을 하는 스님들이 대부분 이렇게 자기 변명을 한다는 것이다.
"먹는 것에 시비심이 있어서, 어찌 도를 깨치겠는가?"
"청정함에 빠져 있고, 계율에 갇혀 있어서,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떤 수행자들은 이렇게도 이야기 한다.
"먹고 싶어도 참아가면서 자신을 속였는데, 이제는 수행을 하면서 알아차림으로 나를 살피게 되니, 그런 억지 행동은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먹고 싶으면 먹고, 또 먹고 싶지 않으면 먹지 않게 되는...그런 자연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다."라고...
이러한 수행자들의 변명은,
술을 마시는 문제, 세속적인 것을 즐기는 문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래서 많은 수행자들이 TV를 보면서도, 자신은 화두를 들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세속적인 욕망대로 살아가면서, 스스로는 공부를 하고 있다고 장담하기도 한다.
<의상조사 법성도>
그러나 이러한 논리들은, 우리가 조금만 깨어있는 의식으로 살펴보면,
너무나 우스운 '자기변명'일뿐,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과는 어긋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청정함에 빠져 있으면 안된다고 하는 스님에게, 똥, 오줌을 주면서 먹어 보라고 해보자. 과연, 모든 분별을 끊고 주는대로 받아 먹는 수행자가 몇이나 될까? 똥, 오줌은 고사하고, 조금 오래된 반찬도 안 먹으려 할 것이다.
또, 드라마를 보면서도 화두가 성성하다고 하거나, 술과 담배도 끊지 못하면서 참선한다고 하는 수행자에게.... 펄펄 끓는 뜨거운 물에 손가락을 담가보라고 해보자.
과연 부처님께서 인욕행을 하셨던 것처럼,
온 몸이 조각조각나는 상황에서도, 화두가 성성하다고 할 수 있을까....
비록 깨달음의 자리가, 선악분별을 초월한 자리라고 해도, 그 자리에 가기 위해서는 지극히 선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털끝만한 악행도 짓지 않는 것이 계이고,
선법을 원만하게 봉행하는 것이 정이고,
자기의 몸과 마음을 원만하게 조복할 줄 아는 것이 혜이다."
정봉 '무무'스님께선 늘 말씀하신다.
"선지식들은 깨달은 사람을 기특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 존재계에서 가장 귀한 사람은 보살행을 하는 이들이다."
생각해 보라. 깨달음이라는 것은, 자신과 타인을 가장 이롭게 하는 일인데....
연기의 법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깨달음을 이루려고 하는 이들이,
마구 행동하고, 마구 먹어대서야, 깨달음에 대한 자격이 주어지겠는가?
이에 대해, 티벳의 8 대 까르마빠는 <불공 회향 기원문>에서 이와 같은 말을 남기셨다.
"불법을 수행할 자유는 부족하면서,
불법에 어긋나는 일에는 자유로운 듯 보이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음에 회향합니다.
깨달음을 성취할 반야는 조금밖에 없으면서,
지옥을 성취할 위대한 반야를 지니고 있는 듯한,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음에 회향합니다."
우리가 이 사바세계, 연기의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자비심이 결여된 '공사상'은 부처님께서 뜻하신 바가 아닌 것이다.
공사상 만큼, 연기법을 제대로 이해한 수행자는,
음식에 대한 분별이 없을지언정, 남의 살을 먹는 일은 피하게 되고,
술을 먹어도 화두가 성성할지언정, 후학을 위해 술을 끊게 되고,
TV를 보면서도 공부가 될지언정, 그 시간에 좀 더 깊이 있는 수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정봉스님께서, 가끔씩 물어보신다.
"우리 나라 불교 전통에서, 선지식들이 선에 대한 게송을 읊은 다음에, 왜 꼭 '나무아미타불'을 하는지 생각해 봤나? 이 도리를 알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게 된다."
선악을 초월한 자리, 계율을 초월한 그 자리는,
선함과 계율이 몸과 마음에 익어서,
악한 행동을 할래야 할 수 없고,
계율에 어긋난 생각을 할래야 할 수 없는,
그런 이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자신의 욕망과 세속심,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수행자에게는,
멀고도 먼 꿈 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출처 http://blog.daum.net/haha723octurne No.1 in Btp://blog.daum.net/haha723. 9, No.1/쇼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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