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착한 글들

[천천히 사유하기]저 너머 ‘환상의 사실성’을 보다

slowdream 2008. 2. 26. 13:48
 

[천천히 사유하기]저 너머 ‘환상의 사실성’을 보다



지난번 글에서도 썼지만 낭만주의 예술의 주요 특징은 간단히 말해 꿈과 그리움, 무한성과 향수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나 철학이든, 이 모든 것은 지금 여기 없는 것-아득하고 무한하며 끝닿을 데 없는 저 너머를 향해 있다. 그래서 그 인물들은 대개 열린 창밖을 쳐다보거나 평원이나 협곡에서 정처없이 걷고 있거나, 산꼭대기에서 가 없는 지평선을 내려다보고 있다.

 

   터너는 영국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가다. 그의 그림은 낭만적이면서도 ‘현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비, 증기, 속도’(1844)라는 이 작품은 제목부터 신선하다. 낭만주의에서 감정은 특히 중요하지만, 감정에만 빠져있다면 그것은 공허하다. 현실적 바탕이 없다면 낭만적 감정도 오래가지 못한다.


이들이 갈망하는 ‘저 너머’는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그것은 서정적·전원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베토벤의 ‘전원교향곡’에서처럼), 때로는 열정적이고 격정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슈베르트의 현악4중주 ‘죽음과 소녀’에서처럼). 아니면 기괴한 몽상이나 환영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블레이크의 그림들처럼), 광활하게 펼쳐진 산과 바다, 들과 계곡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존 컨스터벌의 풍경화처럼). 먼 곳에 대한 이런 갈망이 극단화되면 죽음에 대한 동경이나 영원성을 향한 신화적·종교적 염원으로 변한다(로세티의 경우). 갈망의 대상이 외면적이냐 내면적이냐의 차이는 있지만, 이 모두는 다 낭만적 감정의 원형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의 대표적 화가인 터너(W. Turner, 1775~1851)의 그림은 낭만주의의 이런 원형적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비, 증기, 속도 : 서쪽을 향한 거대한 철도’(1844)는 좀더 각별해 보인다. 이 그림에서는 여리고 짙은 노란 색과 갈색은 뒤엉켜 있다. 화면을 아래와 위로 나눈다면, 아래는 땅을 보여주고 위는 하늘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리 분명하지는 않다. 자세히 보면, 왼편 아래로 다리가 보이고, 그 강물 위로 희미하게 조각배 한 척 지나간다. 화면 중앙으로부터 오른편 아래로 그어진 선은 아래로 올수록 굵어지면서 선명해진다. 기차의 몸체는 선명하지 않고, 꼬리는 지워져 있다. 머리부분은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특히 검은 연통은 윤곽이 뚜렷하다. 기차는 몇 가지 색들이 교차하는 철길 위로 치닫듯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비, 증기, 속도’에서 모든 것은 떠다니는 듯하다. 비도 기차도 부유한다. 이 효과는 화면을 채우는 안개의 희뿌연 색채로 인해 더 실감난다. 그것은 어쩌면 기차의 속도감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속도가 빠르면 시각의 소실점을 잡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것이 모호해진다. 어딘가에서 달려와 다시 어딘가로, 무한으로 기차는 달려간다. 기계의 힘, 그로 인한 가속도의 증가는 무한정 뻗어갈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에서 속도가 풍경을 압도하고, 기술(과학)이 자연(환경)을 능가함을 본다. 그리하여 사물은 스스로의 틀을 지워버리고 무정형적 혼돈으로 변모한다. 원래 무한성이나 신비는 자연의 속성이었지만, 이제 자연을 벗어나 기술이나 기계 문명의 성격이 되어버린 것이다.


전통적 풍경화가 엄격한 규칙과 공간배분을 강조한다면, 터너의 그림은 이런 질서정연한 공간논리를 포기한다는 점에서 현대성을 선취한다고 흔히 평가된다. 그의 색채는 ‘인상주의적’이라고 할 정도로 대기의 순간적 움직임이나 미묘한 뉘앙스를 잘 포착한 것 같다. 그 방법은 때로는 극히 모호해서 현대회화의 추상적 경향까지도 담고 있다. 대상의 이미지는 빛과 색채 속에서 죄다 분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물의 윤곽을 알아보기 어렵다. 공간적 시간적 경계가 지양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낭만적 풍경화가 지극히 구체적이고 기계적인 질료-기차를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목에 ‘속도’가 있는 것부터 모던하지 않은가.


속도는 분명 기계 문명적 술어다. 사실 낭만주의자들은 고대 신화나 중세 등 이미 가버린 시대를 갈망했지만, 이런 갈망을 채운 환상과 고독은 사회 현실적 정치적 요인을 가지는 것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낭만적 감정은 산업화 이후의 노동소외나 도시화에 따르는 빈부격차에 대한 안티테제로 생겨난 것이다. 그들이 갈망한 세계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기술의 대립이 지양된 곳이다.


이것은 터너에게도 해당된다. 1800년을 전후하여 영국은 이미 수공업에서 노동 분업적 대량생산체제를 뿌리내렸고, 도시는 엄청나게 불어나 사회적 빈곤층의 문제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기차는 현실의 비참을 야기하는 기술과 자본, 시장과 문명의 괴물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터너는 폭풍우 치는 바닷가를 관찰하기 위해 돛대 꼭대기에 서너 시간이나 자기 몸을 묶고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 점에서 이 그림은 오늘의 현실에도 닿아있다.


‘비, 증기, 속도’를 보면, 관찰자는 뿌연 안개와 비(이것은 화면의 오른쪽 아래 어렴풋한 사선으로 표현돼있다) 그리고 기차의 속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 시선을 둘 때가 마땅히 없다. 화면 속 사물들처럼 이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 역시 고정된 점을 잃은 채 이곳저곳 떠다니게 되는 것이다. 오로지 한 곳-기차의 앞부분만 뚜렷해 보인다. 이 무한질주의 몽롱한 세계에서 파괴의 속도만은 확실하다는 것인가. 여기에서 사람과 동물은(기차 앞에는 보일 듯 말 듯 토끼가 지나가고 있다는 설명도 있는데, 잘 모르겠다) 비(자연)와 기차(기술)에 아무렇게나 노출되어 있다. 이들은 스스로 결정할 힘이나 의지도 없는 것 같다.


좋은 그림은 한 시대의 역사적 산물이면서 동시에 이 역사적 제약을 뛰어넘는다. 마치 터너가 낭만주의 화가이면서 그 사실적 밀착으로 인하여 현대성까지 획득하듯이. 그래서 그것은 감정 속에서 감정 이상의 현실을, 삶 속에서 삶 이상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좋은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폐부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 그림에서 낭만적 감정과 현실, 상상과 사실이 만나는 한 지점을 읽는다. 이 둘이 동시에 구비될 때 현실의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그것은 ‘환상의 사실성’이고 ‘논리의 감각’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꿈을 꾸듯 현실을 이 그림에서 보면서, 그림 밖의 현실이 조금은 바뀌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