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혜·고봉의 회상에 들다]4. 천동사(天童寺)
간화-묵조의 대립과 원융 역사 간직한 선찰
‘동남불국(東南佛國)’이란 별칭을 가진 천동사는 17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중국 내에서도 원형이 잘 보존된 몇 안 되는 고찰이다.
고요하고, 고요하다. 산중에 폭 파묻힌 산사의 모습은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긴 어린 아이처럼 한없이 편안해 보였다. 천동사(天童寺)를 본 첫 느낌이다.
저장(浙江)성 닝보(寧波) 아육왕사 동쪽 25㎞ 지점에 위치한 천동사에 도착했다. ‘동남불국(東南佛國)’이란 별칭을 가진 천동사는 17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중국 내에서도 원형이 보존된 몇 안 되는 고찰이다. 저장성 중점문화재로 지정된 이곳은 송나라 때 999동에 달하던 전각 가운데 지금도 730동이나 남아 대찰의 웅장함을 유지하고 있다.
창건 설화에 따르면 서기 300년 의흥이란 스님이 이곳에 절을 세웠으나 워낙 산이 깊어 산짐승만 살았을 뿐,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어 살림이 매우 옹색했다. 그러던 중 한 동자가 찾아와 스님을 시봉하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동자는 “나는 하늘의 옥황상제가 보낸 태백금성(太白金星)이다. 이제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올 것이니 그만 돌아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의흥 스님은 곧 태백금성의 이름을 따 산의 이름을 태백(太白)으로, 절의 이름을 천동(天童)으로 지었다.
그러나 천동사가 주목을 받는 것은 수려한 산세도 1700년 역사의 대찰도 아닌, 묵조선(默照禪)의 주창자 굉지 정각(宏智 正覺, 1091~1157) 선사가 20여 년간 머물며 입적할 때까지 선풍을 드날린 도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 대혜의 선풍이 더해져 유서 깊은 선찰이 되었다.
산시(山西)성 습주(濕州) 출신의 굉지는 11세에 정명사로 출가해 3년 뒤 자운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여러 곳을 참방(參榜)하며 공부하던 그는 23세 되던 해 단하 자순(丹霞 字淳) 선사를 만나 법을 인가받았고, 이후 독각(獨覺)의 위험성을 없애고자 많은 스님을 찾아 선지식(善知識)을 전수받았다. 굉지는 48세 되던 해 천동사에 들어와 줄곧 20여 년을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는데 당시 그의 지도를 받은 학인의 수가 무려 1만에 달했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지금도 천동사 공양간에는 1000명분의 밥을 짓던 ‘천승과(千僧鍋)’라는 무쇠 솥이 걸려있다.
730동 전각에 1700년 역사
굉지는 대혜와 더불어 당시 선계(禪界)를 이끈 양대 산맥이었으나, 화두 없이 면벽좌선을 통해 내면을 관하는 굉지의 묵조선과 대혜의 간화선은 상호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를 대하는 둘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대혜가 묵조선을 향해 맹렬히 공격한 반면, 굉지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대혜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묵조선을 비난했다. 묵조선을 마른나무와 같이 그저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라며 ‘고선(枯禪)’이라 평가절하 했고, 맹목적으로 앉아 있을 뿐 불교에 대해 무지하고 내용이 없는 선이라며 ‘암증선(暗證禪)’, ‘치선(痴禪)’, ‘맹선(盲禪)’이라고 힐난했다.
대혜가 조금의 자비심도 없이 이렇게까지 묵조선을 공격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간화선을 통해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자 했던 대혜에게 굉지의 묵조는 방관적 태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 또한 당시 주전파(主戰波)와 주화파(主和波)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던 사대부들 중에 주전파는 개혁적 성향인 대혜의 간화선을 따르는 반면, 주화파는 묵조선을 지지함으로써 서로 대립하고 배척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상황도 맞물려 있었다. 더욱이 그의 스승인 원오 선사와 동문수학한 준박(遵璞)과 상운(祥雲)마저 묵조선을 선양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기에 자칫 간화선이 위축될 수 있다는 걱정도 앞섰다.
대혜의 거센 공격에 대해 굉지는 “밖에서 흘러 전하는 인연에 집착하지 말고, 일체 모든 만물이 부처임을 받아들여 그 마음이 오묘해지면 만사를 바로잡게 될 것”이라며 “진실로 해야 할 것은 오직 고요히 앉아서 묵묵히 참구하는 것 뿐”이라고 직접적인 대응을 피했다.
도량 안으로 들어선 순례단이 대웅보전 앞에 멈춰 섰다. 조금 이른 시간, 중국 스님들의 저녁예불이 한창 이어지고 있었다. 가사, 장삼을 수한 100여 명의 스님들이 봉행하는 예불 소리는 일순간 순례단의 발길을 멈추게 할 만큼 웅장하고 장엄했다. 두 손을 모으고 부처님께 삼배를 올린다.
천동사 730개 전각 중 방문객이 참배할 수 있는 곳은 대웅전과 천왕전, 법당, 나한전 등으로 제한돼 있다. 그래서인지 곳곳에 ‘출입을 금한다’는 푯말이 서 있다. 또 회랑 여기저기에 스님들을 배치해 참배객을 통제하고 있어, 실제로 천동사에서는 개방된 곳 외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었다. 굉지 선사의 흔적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으나 이번만큼은 접어야 했다.
묵조선풍 드날린 굉지 열반도량
대혜와 굉지가 대립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그렇다고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 같은 사실은 대혜가 굉지를 찾아간 일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혜의 나이 68세 굉지 선사가 입적하기 1년 전인 1156년, 대혜는 굉지를 찾아 천동사를 불쑥 방문한다. 그리고 굉지에게 “오랜 유배에서 풀려나 아육왕사(阿育王寺)의 주지 소임을 맡게 됐는데 개당법회(開堂法會)의 백추사(白鎚師)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백추사는 주지가 처음 법석에 올라 법좌를 펼 때, 주지의 상당이 원만하게 이뤄졌음을 증명하는 법사를 칭하는 말이다.
굉지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토록 자신을 비난하던 대혜의 부탁을 주저 없이 승낙한 것이다. 굉지가 백추사를 수락했다는 것은 대혜가 주지될 자격이 있음은 물론이고, 그의 선풍까지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혜 또한 그토록 맹렬히 비난하고 부정했으면서도 자신의 개당에 굉지를 찾아가 백추사로 청한 것은 그 역시 굉지를 인정하고 있었음을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1년 뒤, 원적에 든 굉지는 묵조선을 따르는 후학들을 젖혀두고, 간화선을 주창한 대혜에게 후사를 당부했다.
“바야흐로 깃발은 꺾이고 대들보가 부러져 법의 강은 마르고 법안(法眼)은 없어지리라. 그렇다 하더라도 진정 천동(=굉지)의 진실한 말이 무엇인지 서슴지 말고 말하라. 지음(知音)을 안 뒤에 또 누가 아는가.”
대혜가 굉지의 입적을 깊이 슬퍼하며 대중에게 남긴 말이다. 두 선사는 시대적 배경에 따라 겉으로는 서로 대립해야 했지만 사실은 서로 믿고 의지하며 공감하는 사이였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두 선사를 선문(禪門)의 이대감로문(二大甘露門)이라 칭송했다.
호수엔 대혜·굉지의 그림자가
도량 가장 위에 위치한 나한전을 찾았다. 굉지를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탁 트인 전망으로 보상받으려 했건만 보이는 것은 촘촘히 겹쳐진 전각의 지붕뿐이다. 그런데 나한전이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나한전은 폭이 족히 100m는 될 만큼 길고, 특별히 보호되고 있기 때문이다. 연유를 물으니 나한전에 얽힌 설화를 들려준다.
“천동사가 위치한 천동산은 장마철만 되면 산사태가 일어나고 계곡이 범람해 사찰은 물론 민가의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8명의 스님이 나타나 천동산 옆으로 커다란 도랑을 팠는데, 이후 비 피해가 사라졌어요. 이 18명의 스님은 바로 나한이었고, 천동사는 이를 기리기 위해 나한전을 세워 극진히 모시게 된 것입니다.”
실제 나한전에는 18명의 나한이 커다란 대리석에 선각으로 조각돼 있었고 한 분씩 개별 불단에 정성스레 봉안돼 있다.
들어올 때의 길로 발길을 돌렸을 때, 들어올 때 무심코 지나쳤던 일주문 앞 거대한 벽돌 벽이 길을 막아섰다.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니 천동사의 아름다운 모습이 호수 위에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화두를 타파해야 하는 간화와 마음을 반조하는 묵조를 상징하듯, 벽과 호수는 그렇게 한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방법은 달랐어도 마음 속 깊이 서로를 품어 안았던 대혜와 굉지처럼 결국은 모두가 하나의 목표로 가기 위한 길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출처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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