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염화실의 향기

[하늘이 감춘 땅/마지막 회] 광주 무등산 석불암

slowdream 2008. 9. 5. 03:31

[하늘이 감춘 땅/마지막 회] 광주 무등산 석불암


우주가 늘어 세운 하늘탑, 등급 없는 무등 품
스님이 어머니 모신지 17년, ‘승’일까 ‘속’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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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불현듯 약사여래부처님이 나타났습니다. 석불암의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바위 속의 부처님이 살아서 나온 것 같았습니다. 몸을 아이스크림처럼 녹일 만큼 부처님의 미소는 따사로웠습니다. 약사여래부처님께서 약이 담긴 함을 건네주었습니다. 몸의 병 뿐 아니라 슬픔과 고통과 무지의 병까지도 치료해줄 약인 듯했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그 약함을 받아드니 부처님의 가슴에서 아름다운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그 빛이 내 가슴의 빛과 맞닿으면서 마치 감전된 듯 스파크가 일어났습니다. 갑작스레 번쩍이는 빛의 분출과 스파크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지만, 나는 감당할 수 없는 환희로 넘쳤습니다.


 



여전히 생각만 해도 가슴을 먹먹케하는 존재

 

광주쪽에서 오른 무등산을 반바퀴 돌아 깊고 깊은 산 속 암자 석불암에서 대정 스님은 객을 보자마자 전날 밤 꿈 애기를 꺼냈습니다. 그래서 “오늘 좋은 분이 올 줄 알았다”는 뜻밖의 환영의 마음을 담아 그가 오래 묵은 송차를 내왔습니다. 깊은 산사에서 송차를 오래 담궈 발효되면 감로주가 됩니다. 약사여래가 전해주는 약인 듯 솔향기가 온 몸에 퍼져갈 때 대정 스님 모자의 인연담이 어머니의 자장가인양 들려왔습니다.

 

그가 아이였을 때 어머니는 곁에 없는 때가 많았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엄마, 엄마!”를 부르며 울다 지쳐서 다시 깨어나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망한 아버지 대신 일곱 자식을 먹여살리기 위해 일하러 나간 어머니는 좀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자라서 소년이 되고 그 소년이 자라 머리를 깎고 출가승이 되었습니다. ‘해탈 성불’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비록 굳은 결심으로 출가한 몸이었지만,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생각만 해도 가슴을 먹먹케하는 존재였습니다.

 

더구나 어머니는 7남매를 낳았지만 장성한 자식들은 모두 제 살길을 찾아 뿔뿔히 흩어져 누구 하나 모실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출가승들이 모여 사는 큰절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겠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해인사에서 모시고 수행했던 해인사 방장 성철 스님이나 부방장 혜암 스님이 이를 용납할 리도 없었습니다.

 

성철 스님은 출가해 금강산에서 정진할 때 자식이 보고 싶어 어머니가 산에 올라오자 산 위에서 어머니쪽으로 돌을 굴려 쫓아보낸 채 수행에만 전념한 분이었습니다. 자식의 그런 모습에 어머니는 “너 보러 안왔다. 금강산 구경하러 왔지”라고 둘러대고 돌아갔다지 않습니까. 더구나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 스님과 혜암 스님은 두 분 다 그를 각별히 아껴서 한 눈 팔지 말고 오직 선방에서 두문불출 수행해 확철대오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어머니 젖무덤 같은 산, 자비와 강인 두 얼굴
 
하지만 그는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한 분 구하지 못하고 어느 누구를 구한다는 말인가?”

 

djs.jpg지장보살은 자신의 성불을 뒤로 미루고 모든 중생을 지옥에서 구원하겠다고 나섰는데,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 한 분도 구하지 못한데서야 될 말이냐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인사 강원을 갓 졸업한 그가 해인사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출가’(出家)란 말 그대로  ‘집을 떠난 것’인데, 다시 ‘귀가’(歸家)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어머니를 모시고 찾아든 곳이 무등산이었습니다. 무등산은 어머니 같은 산입니다. 어머니 젖무덤처럼 둥그렇고 덕스러워서입니다.

 

어머니는 품이 넉넉해서 어느 자식 하나 차별하지 않습니다. 잘 나면 잘 나서 예쁘고 자랑스럽고 못 나면 못 나서 안타깝고 애틋해 더욱 마음이 갑니다.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는 손가락이 없습니다. 그것이 어머니 마음이요, 무등등 무차별의 마음입니다. 무등산이 그렇습니다. ‘무등’은 불교에서 나온 말입니다. 자성의 본래면목은 상(相)이 없기에 너나가 없고, 높낮이도 없습니다. 그러니 등급과 차별이 있을리 없습니다. 

 

어머니는 바다처럼 넓고 자비롭지만 그 모습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때로는 심산유곡이 되고, 기암괴석이 될만큼 무서운 힘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피할 수 없는 재해나 난리통에도 어머니는 자식과 가족을 돌보기 위해 기적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이 무덤덤할 것만 같은 무등산 아래서 일제와 독재의 압제에 숨죽일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났던 광주 학생의거와 5·18 광주 항쟁이 있었습니다.

 

등산 6년만에 우연히 발견하고 “세상 헛살았다”고 한 경치

 

멀리서보면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넉넉하기만 한 무등산은 뒤로 돌아가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드러납니다. 흙밖에 없는 듯한 토산 위에 바위 가운데도 가장 신비스러운 바위를 다 모아놓은 듯한 서석대와 입석대, 규봉을 보지 않고는 무등산을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 빼어남은 육당 최남선이 “금강산도 부분적으로는 여기에 비길 경승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오히려 그리스 신전에 인간이 세운 대리석들이 초라해질 정도로 우주가 일자로 세운 신비한 하늘탑들입니다.

 

무등하지 못한 권력의 칼에도 결코 굴하지않은 기상이 이 바위에서 나온 것만 같습니다. 이성계가 쿠테타를 일으켜 조선을 개국한 뒤 전국의 명산에 기도를 하러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국의 산신들이 하나같이 이성계를 인정하는데, 무등산의 산신만은 이성계를 인정치 않았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방송국 송신탑이 있는 장불재에 이르면 그 입석대와 서석대가 눈에 들어옵니다. 탑 모양의 바위들이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석불암은 규봉암으로 가는 길에 있는데, 만약 푯말이 없다면 찾기 어렵습니다. 꼭꼭 숨어있어서 밖에선 보이지 않는 터입니다.

 

석불암은 얼마전까지도 규봉암에 소속된 산내 암자였습니다. 규봉암과 10분 거리입니다. 규봉암과 석불암 사이엔 인도에서 온 지공대사가 좌선했다는 바위들이 널려있는 지공너덜이 있고, 그 옆에 보조국사 지눌이 수행한 보조석굴이 있습니다. 모두 5~10분 내 거리입니다.

 

실은 20여년 전 무등산을 등산하다 우연히 발견한 규봉암의 선경을 꿈엔들 잊을 수 없어 무등산행을 오매불망하다 온 산행이었습니다. 역시 규봉암과 암자 뒤 규봉은 천하에 비길 데가 없습니다. 규봉암은 등산로에서 바위로 가려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데, 매주 무등산을 돌던 한 등산객이 6년만에 우연히 규봉암을 발견하고, “지금까지 세상 헛 살았다”고 자조했다는 말이 나올 법한 경치입니다. 그 규봉을 안내해준 스님의 법명이 바로 ‘무등’입니다. 산과 승이 어찌 다를 것인가요.

 

그런데 정작 산행 전 뵙기로 약속한 규봉암 암주인 정인 스님은 갑자기 속가 모친이 위독해 가게 돼 오히려 규봉암보다 석불암에 오래 머물게됐으니 이 또한 인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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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들어 말 잃고 울기만 하던 어머니, 화두 붙들고 씨름할 줄이야…  

 

석불암의 대정 스님은 세파와는 도무지 상관 없는 옛 선인의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마주 섞이지 않는 자의 수줍음이 얼굴에 가득합니다.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누구도 찾아오거나 들여다보기 어려운 이 깊은 산골로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17년간을 살았으니, 세상과는 거리가 멀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어머니는 몇 달 전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이제 혼자입니다. 홀로 된 자의 깊은 고독이 그의 눈동자 속에 잠겨 있습니다.  어머니 얘기가 나오면서 그의 눈 속엔 뜻모를 고독과 환희가 교차합니다. 이 깊은 산골로 둘이서만 들어왔지만 어머니가 건강했던 처음 10년은 단꿈을 꾸듯이 행복했습니다. 여름, 겨울 안거철이 되면 해인사 선방으로 가서 석 달씩 참선을 했고, 다시 돌아와 어머니와 서로 의지가 되어 살며 함께 공부했습니다.

 

그는 그동안 갈고 닦고 깨달은 모든 것을 독선생이 되어 어머니께 주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 어머니가 병들어 자리를 보전하고 누웠습니다. 그 이후 어머니가 숨을 거두는 날까지 그는 어머니의 손발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오직 어머니와 살았지만, 어머니를 통해 인간계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죽음을 앞 둔 어머니에게  마지막까지 남는 건 슬픔과 외로움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처음 자리 보전하고 누었을 때 말도 잃어버린 채 시종 울기만 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서 정신을 놓은 채 울기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해, 두 해, 세 해……. 오래도록 어머니는 울기만 했습니다. 지칠 법도 했지만 울음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울음의 의미를 알지 못한 그는 단지 어머니의 업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선승인 아들보다 더 한 투지로 화두를 붙들고 씨름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몸부림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한숨인듯 독백인 듯 “어디로 가려느냐? 어디로 가려는 것이냐?”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누워 있는 쪽에서 한숨인듯 독백인 듯 무슨 말이 들려왔습니다.

 

“어디로 가려느냐? 어디로 가려는 것이냐?”

 

화두선에서 가장 유명한 공안 중 하나가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입니다. 또 우리는 숨이 끊어질 때, ‘갔다’는 표현 대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이 몸뚱이를 벗고 나면 우리는 과연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어머니는 그 화두를 단 한순간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온 곳도 모른 채 왔다가 갈 곳도 모른 채 죽어야 하는 슬픔에 몸부림 치면서 그 화두와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운 지 수 년만에 어머니는 심장마비로 생사의 큰 고비를 맞았습니다. 그 뒤 어머니는 더 이상 울지 않았습니다. 대신 극심한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아들이 선방에 갔다가 몇 달만에 돌아와도 의연하기만 했던 그 어머니는 이제 잠시만 아들이 보이지않아도 ”스님, 없소, 스님 거기 없소?”라며 애타게 찾았습니다. 그렇게 외로워하던 1년 뒤 어머니는 두번째 생사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로부터 어머니는 더 이상 슬퍼하거나 외로워하지 않았습니다. 말똥말똥하게 눈을 뜨고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의식을 잃어버렸는지 물어보면 의식이 또렷했습니다.

 

“어머니, 무슨 생각하세요.”

“아무 생각 안 해.”

“마음이 어떠세요.”

“평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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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한 얼굴로 입적…큰 슬픔 속에서도 지극한 환희 느껴

 

실제 어머니의 얼굴은 평안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어머니 한 분 구제를 위해 일평생을 다 바쳤던 그의 소원을 어머니가 이뤄준 것입니다. 그는 “옳다, 됐다”고 환호작약했습니다. 이제는 어머니가 목숨줄을 놓아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보는 앞에서 크게 숨을 몰아 쉰 뒤 되돌아갔습니다. 그는 큰 슬픔 속에서도 지극한 환희를 느꼈습니다.

 

그런 그의 삶을 뉘라서 출가승의 ‘외유’나 ‘일탈’로 치부만 할 수 있을까요. 석가모니 부처님도 도를 이룬 뒤 자신을 낳은 지 이레만에 몸을 벗은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도리천에 올라가 설법을 했고, 부처님의 10대 제자인 목갈리나는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어머니를 보고 애타하다 부처님의 도움을 받아 구제했습니다. 또 오조 홍인이 육조 혜능을 받아들여 깨우치게 한 오조사에 가면 홍인이 지극히 어머니를 모신 사당인 성모전(聖母殿)이 있고, 이 땅에 온 대도인인 도선국사와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 진묵 대사 등은 어머니를 지성으로 모셨습니다.

 

꼭꼭 숨은 석불암에서 대정 스님과 함께 밖을 엿보니 장불재입니다. 대정 스님은 ‘장불’(長佛), 즉 길게 누운 부처라고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무차별 무등등하게 상처받고, 고통 받는 모든 이를 품어주는 부처님의 넉넉한 모습입니다.

 

나는 어느 아픈 이의 약사여래가 되며, 어느 누구의 ‘어머니’가 될까요. 무등산처럼. 장불재처럼.

 

무등산/글·사진 조현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동영상 이경주 피디, 박종찬 기자
 
출처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