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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목소리로]연꽃과 십자가

slowdream 2008. 9. 28. 12:52

[낮은 목소리로]연꽃과 십자가
입력: 2008년 09월 26일 17:55:37
 
서울의 어느 교회의 대학생들이 주최한 문학의 밤 행사에 초대 손님으로 참석하여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 질문은 젊은이들답게 생기발랄하였고 거침이 없었다.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한 학생이 당돌한 질문을 던져왔다.

“시인께서는 기독교 목사님이기도 하신데, 시 속에 연꽃이나 불상 등의 불교적 이미지를 그렇게 자주 사용하십니까?”

그 당시 내 시집 속에 수록된 시들이 불교적인 세계관에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꽃이나 불상, 또는 불두화 같은 불교적 상징이 강한 언어들을 이따금 사용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제도종교의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았고, 내가 스승으로 모시는 예수도 종교의 외피에서 자유로운 분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우회적으로 답변할 요량으로 질문을 던진 학생에게 되물었다.

“연꽃과 불교 가운데 무엇이 먼저 생겨났다고 생각하지요?”

학생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연꽃’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연꽃을 꼭 불교에 속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느냐? 시는 자유롭고 활달한 상상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기독교인이라고 왜 연꽃을 시적 제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느냐?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하느님의 연인’이라면, 연꽃 또한 신이 어여삐 여기는 사랑스러운 연인이 아니겠냐? 이렇게 거듭 되묻자 질문을 던진 학생은 납득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처와 예수는 둘이 아닌데…

지금도 이런 생각엔 변함이 없다. 연꽃이 불교적 상징인 것은 틀림없지만, 연꽃은 불교를 넘어 누구에게나 그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꽃이 아니던가. 전라도 무주의 아름다운 백연지를 가본 적이 있지만, 거기 흐드러지게 핀 연꽃들이 예수가문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자기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지 않던가. 나는 예수가문에 속한 사람이지만, 왜소한 나를 넘어서 우주적 자아로 거듭나기를 꿈꿀 때 진흙탕에 핀 연꽃을 떠올리곤 하는데, 이런 지극한 관상의 자유를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종교를 ‘으뜸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하지만 으뜸의 가르침을 받은 모든 이가 그 으뜸의 가르침을 공경하고 사는 것 같지는 않다. 더러는 으뜸의 가르침을 제멋대로 왜곡하여 사사로운 자기 이익을 취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왜 목사시인이 연꽃 같은 상징을 취하느냐고 황당한 질문을 던진 학생을 가르친 종교 지도자가 예수의 종지를 제대로 받드는 사람이었다면, 그 학생이 그처럼 사유의 부피가 작은 존재로 자라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어떤 종교, 어떤 교리보다 사람이 더 귀하고 크다고 선언했다. 말하자면 어떤 종교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가 속한 종교를 넓히는 것이다. 예수의 종지가 좁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이들이 왜소해지고 편협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왜소함이 그들이 따르는 분의 종지를 왜소하고 편협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부단한 마음공부를 통해 자기를 확장하여 자비와 관용의 정신을 지닌다면, 그런 정신으로 사는 이들의 삶이 기독교를 자비와 관용의 종교로 드높여 줄 수 있지 않겠는가. 몇 년 전 나는 스님과 신부님이 상대방의 사원을 방문하며 진리의 법을 아름답게 나누는 것을 보고 ‘연꽃과 십자가’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발표한 적이 있었다.

“자기보다 크고 둥근 원(圓)에/ 눈동자를 밀어 넣고 보면/ 연꽃은 눈흘김을 모른다는 것,/ 십자가는 헐뜯음을 모른다는 것,/ 연꽃보다 십자가보다 크신 분 앞에서는/ 연꽃과 십자가는 둘이 아니라는 것,/ 하나도 아니지만 둘도 아니라는 것.”

종교를 왜곡하기에 편협해져

지금도 늦지 않았다. 늦은 깨달음이라도 깨달음은 귀하고, 늦은 어울림이라도 어울림은 향기로운 법. 우리가 연꽃보다 십자가보다 크신 분 앞에서 좀더 너그러워지고 서로를 품어 안을 수 있다면, 우리보다 앞선 선각자들이 나란히 나란히 앉아 진리의 법을 나누던 대화와 관용과 협력의 전통을 아름답게 이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드높은 진리의 산봉우리를 함께 오르다가 이쪽에서 ‘야호!’ 소리치면 저쪽에서 ‘야호!’ 화답하는 산울림처럼 종교간의 그런 어울림의 목소리가 이 산 저 산에 두루 메아리쳐 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고진하 | 시인·숭실대 겸임교수>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