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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지성] ⑫ 예이츠

slowdream 2009. 7. 3. 03:52

[불교와 지성] ⑫ 예이츠
우파니샤드·선불교 수용한 위대한 시인
기사등록일 [2009년 06월 22일 15:49 월요일]
 

철학적 종교인 … 셸리 영문학 전통 이어
성자이며 마법사 혹은 시인으로 삶 맹세
업에 따라 운명 결정 … 해탈과 윤회 주장

 

 
에이츠의 생전모습.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1865년에 태어나서, 1939년까지 살다 간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다. 그와 더불어 이십세기영시의 거장인 엘리엇이 1940년 예이츠의 1주기 추모강연에서 그에 대해 평하기를 “현대에 있어서 최대의 시인-확실히 영어로 쓴 최대의 시인-아니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말, 그 말을 사용해서 시를 쓴 시인 가운데서 최대의 시인”이라는 최상급의 찬사를 보낸바 있다.

 

말년까지 인도인과 각별한 친분

 

그 최상급의 찬사는 생의 최후까지 왕성한 창작욕과 투지로 일관한 열광적이고도, 다양한 면모를 지닌 예이츠의 적극적인 삶의 산물이다. 그는 낭만주의적인 요소를 다분히 지닌 신비학자인가 하면, 아일랜드의 통일을 위해 분투한 민족주의자이며, 현실정치에 참여한 정치인인가 하면, 접신술·장미십자회의주의·신플라톤주의· 신비주의 그리고 우파니샤드와 일본의 노극을 통하여 선불교를 수용한 철학적인 종교인이자, 블체크나 셸리의 영문학 전통을 이어받은 위대한 시인이다.

 

1798년에 워즈워스와 콜리지가『서정민요집』을 발표하면서 낭만주의를 선언한 것처럼, 거의 백년 뒤인 1899년에 예이츠는 『갈대숲의 바람』을 발표하면서 현대문학의 방법을 확립한다. 워즈워스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결속을 회복시키려하나, 예이츠는 모든 외면적인 현상이 내면적인 특징을 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해 내서 표현하려고 한다. ‘위대한 존재’, ‘위대하게 존재함’이 워즈워스에게는 인간의 밖에 있으나, 예이츠에게는 인간의 내면에 있다.

 

예이츠는 그의 나이 17세에 “성자로 마법사 혹은 시인으로 삶”을 맹세하고, 그 약속을 평생 동안 진지하게 실천해 나간다. 예술가로서 자신을 계발하기 위한 예이츠의 탐구는 신비학뿐만 아니라 인도의 우파니샤드 철학이나 일본의 선불교로 그 폭이 넓다. 예이츠는 1913년과 1914년에 걸쳐서 페놀로사(Ernest Fenollosa)가 수집한 일본문화에 대한 자료의 출판을 도왔던 파운드(Ezra Pound)와 함께 일본 노(Noh)극을 공부하면서 선불교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또한 청년기부터 인생의 말년까지 인도인들과 각별한 친분을 맺는다. 러셀(George Russell(AE))과 존스턴(Charles Johnston)과 더불어 인도의 채터지(Mohini Chatterjee)와 친분을 맺고, 1912년에는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기탄잘리』(Gitanjali )의 서문을 쓰고, 그리고 1932년에 스와미(Purohit Swami)의 전기 『인도의 승려』(An Indian Monk), 1934년에 함사(Bhagwan Shri Hamsa)의 『성스러운 산』(The Holy Mountain), 1938년에 파탄잘리(Bhagwan Shri Patanjali)의 『요가』(Aphorisms of Yoga)의 서문을 쓴다. 그리고 『10편의 중요한 우파니샤드』(The Ten Principal Upanishads)를 스와미와 더불어 영역하고 그 책의 서문을 써서 1937년에 발간한다.

 

그러나 그 책의 서문에서 예이츠는 약 40년 동안 친구 러셀과 함께 우파니샤드의 구절에 관심이 있어 왔음을 밝히고 있다. 결국 1937년에 쓴 「내 작품을 위한 전반적인 소개」(“A General Introduction for My Work”)에서 자신의 예수는 옴(AUM)으로 아트만이라고 한다.

예술가는 시적 영감을 가져다주는 그의 다이몬을 끌어내기 위해서 자신의 일상적 자아와는 반대되는 반자아를 초환해야 하는데, 예이츠는 그 일을 위해 순수하게 주관적인 상태인 명상 방법을 택한다. 고삐 풀린 말처럼 우리의 감각이나 지각이나 생각이 객관적인 대상으로 달려 나가는 것을 잘 다스려서 완전히 정지된 상태에서 비로소 청정한 자성이 된다는 것을 노래한다.

 

‘기탄잘리’ ‘파탄잘리’ 서문 작성

 

시인은 「마이클 로바티즈의 이중 환상」에서 지성을 상징하는 스핑크스와 자비를 상징하는 붓다와 그 사이에서 춤을 추는 소녀를 본다. 그러나 지(知)와 자비를 겸비한 붓다는 앞의 대상에 전혀 개의하지 않고 삼매에 들었고, 춤을 추는 소녀도 사념을 넘어 춤을 춘다는 생각도 누가 바라본다는 생각도 끊어진 채 삼매에 들어 있다. 그리고 시인도 보름달빛 아래 좌선에 잠겨 있다.

 

카셀의 잿빛 바위 위에서 나는 문득 보았다. / 여자의 가슴과 사자의 다리를 가진 스핑크스와 / 한 손은 내려놓고, 또 한 손은 치켜든  / 자비로운 붓다의 모습을 / 그리고 이들 한가운데서 놀고 있는 한 소녀를 / 마치 그녀의 삶을 벗어던지는 춤을 추는 듯하다. / 지금은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마치 / 그녀는 춤추는 것을 꿈꾸는 듯하다. / 나는 이 모든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았지만, / 죽는 날까지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을 거다. / 지금 보름날 밤에 / 나는 달빛 아래 보았다.

 

이 시는 예이츠가 1917년 황금새벽단과 결별이 있고 난 뒤 2년 후 1919년에 발표된다. 지성을 상징하는 서양의 스핑크스와 자비를 상징하는 동양의 붓다 사이에서 무념의 상태로 완벽하게 춤추는 소녀는 예술을 형상화 하고 있다. 완벽한 예술을 이룬 완벽한 예술가의 이미지인 그 춤추는 소녀는 다름 아닌 예이츠의 반자아이다.

 

완전한 주관인 보름날 밤에 명상에 잠겨 자신의 예술의 현현을 체험하는 시인 예이츠도 ‘육체와 뼈를 지닌’ 현실에서 자신의 반자아인 그 춤추는 소녀와 일체가 된다. 스핑크스와 붓다, 춤추는 소녀 그리고 시인 예이츠는 한 순간 명상에 잠겨 사념과 시간을 잊는다. 모두 일체가 되어 본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이 때 마음은 돌고 있는 팽이 꼭지처럼 멈추어져 있다.

 

시적영감 얻기위해 명상

 

“존재의 통합(Unity of Being)”이나 ‘미의 완성’을 상징하고 있는 그 춤추는 소녀는 자신의 개별적인 자아를 벗어나, 개인적 집착을 멸했기 때문에 죽은 상태가 되는 것이고, 집착과 소유욕을 멸했기 때문에 법열의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 자아가 죽은 상태에서 모든 생명은 하나라는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이 니르바나이다. 그것은 절대자유를 뜻하는 해탈과 동의어이다. 그것은 모든 지적인 개념을 넘어선 의식 상태이며 그것은 그 이상의 설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아가 ‘멸’의 상태에 이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본래적인 마음 즉 불성의 현현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 일본 등지에서는 주의 역법에 따라 붓다의 성도일(成道日)을 음력 12월 8일로 보고 있으나, 인도의 제이 비샤야카의 달인 대보름날이라고 한다. 이 날짜는 남방불교 소전(所傳)에 따르면 태양력으로 오월의 만월에 해당한다. 시인 예이츠도 보름의 달빛 아래 마음의 눈으로 평생 잊지 못할 기쁨의 순간을 체험한 것이다. 보름달은 깨달음을 상징한다.

 

그가 할 숙제는 이미 윤회를 벗어난 성자를 노래의 스승으로 삼아 예술의 완성과 함께 “존재의 통합”을 성취하는 일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요정 이야기를 듣고 자라서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실재를 믿었고, 켈트의 정신이 담겨 있는 민담, 신화, 전설을 수집하고 편집하고 분류하고, 그것을 묶어 주를 달아 『아일랜드 농부의 요정담과 민담』을 출판하고, 그 일의 연속작업으로 철학서인『비전』을 발표한다.

 

『비전』에서 역사상 “존재의 통합”을 이룬 예로 신성의 화현인 석가모니 부처나 예수 그리고 니르바나를 성취한 인도의 성자나 일본의 스님을 든다. 예이츠는 『비전』에서 태음과 태양의 관계를 통해 인간과 역사의 운명성과 그것을 벗어 날 수 있는 자유를 통찰한다. 영혼의 사후나 운명에 대해서도 업에 따라 <운명체>가 결정되고, 이원성을 떠난 반야공의 실상을 깨달아 자유와 해탈에 이르러 윤회를 벗어 날 수 있다는 불교적인 견해를 보인다.

 

붓다 스승 삼아 법열 노래

 

이율배반이 완전히 해소되는 그 해탈의 순간은 “제13 구체”, “제13 순환” 그리고 “제13 원추”라고 불린다. 그것은 궁극적 실체로서 하나도 여러 개도 아니고, 조화도 부조화도 아니기 때문에 ‘상이 없는 구체(a phaseless sphere)’라고 한다. 인간의 참된 본성은 나고 죽는 자연물인 우리에게 영원히 속해 있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예이츠는 자신의 예술과 삶을 통해서 고통과 슬픔과 연민 등으로 위축된 현대인의 삶에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영원한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영원히 위대한 예술가로 그리고 예언자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서혜숙 건국대 영어영문학부 교수


서혜숙 교수는
건국대 인문과학대학 영어영문학부 교수로 한국예이츠학회 회장과 동화와 번역연구소장을 역임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시 연구: 동양적 접근」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예이츠와 의상: 화엄세계에 비춰본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 「예이츠의 “자아와 영혼의 대화”와 곽암의 “십우도”」, 「예이츠와 노자: 『비전』과 『도덕경』에 나타난 존재의 통합과 도」, 「우파니샤드와 선불교의 관점에서 본 예이츠의 반자아」등 다수의 논문과 저서 『예이츠-존재의 완성을 향하여』, 『아일랜드 요정의 세계』, 번역서로는 켈트 동화『벌거숭이 왕자 덜신』,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켈트의 여명: 신화와 민담과 판타지』, 예이츠 총서 4권 『예이츠 시전집』이 있다.


출처 법보신문 1003호 [2009년 06월 22일 1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