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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목소리로]만물과 교감하는 ‘여명의 지식’

slowdream 2009. 6. 7. 03:53

[낮은 목소리로]만물과 교감하는 ‘여명의 지식’

 고진하 숭실대 문창과 겸임교수·시인
  • 고 진 하
    숭실대 문창과
    겸임교수·시인
    아침 산책을 다녀와 내 블로그를 열었더니, 벌써 어떤 손님이 다녀가며 어여쁜 발자국을 남겨놓았다. 시인 존 래임 디어의 ‘국냄비에 대한 명상’이란 시이다. 더러는 자기 고민을 털어놓는 손님도 있고, 아침부터 심각한 세태 이야기를 늘어놓는, 별로 반갑지 않은 손님들도 있는데, 이렇게 청량한 시를 배달해주는 손님은 무조건 반갑다.

    “나는 인디언이다. 지금 불 위에서 끓고 있는 이 국냄비처럼 평범한 것들에 대해 나는 생각한다. 냄비 속에서 끓고 있는 물은 비구름에서 내려온 것, 그것은 하늘을 상징한다. 불은 태양으로부터 온 것, 사람과 동물과 나무, 우리 모두를 따뜻하게 해주는 태양으로부터. 냄비 속의 고기는 네 발 가진 동물을 상징한다. 우리의 형제인 동물들, 그들은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했다. 냄비에서 나오는 뜨거운 김은 살아 있는 숨결, 그것은 원래 물이었다. 이제 그것은 하늘로 올라가 다시 구름이 된다. 이 모든 게 성스럽지 않은가. 맛있는 국이 끓고 있는 냄비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이 단순한 것들 속에서도 위대한 정령이 얼마나 나를 돌봐주고 있는가를.”

    풀 한포기에도 허락을 구하라

    사물과 존재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이런 시인의 가슴이 아니면, 누가 부엌에서 끓고 있는 국냄비를 보고 우주와 그것을 돌보시는 ‘위대한 정령’에게까지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영적 삶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라면, 이 시인처럼 확장된 의식이 요청되는 것이 아닐까. 아주 사소한 사물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는 신의 지문(指紋)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낱알 한 알에 하늘과 땅과 사람이 다 들어 있음을 아는 옛 농부의 통찰처럼 풀잎 하나, 돌멩이 하나에서도 자기 존재의 근원과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지식을 일컬어 중세의 수도승인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여명(黎明)의 지식’이라 했다. 눈앞의 피조물을 그것 자체로만 인식하는 앎이 ‘황혼의 지식’이라면, 피조물을 대할 때 그것을 지으신 이 안에서 인식하는 앎은 ‘여명의 지식’이라는 것이다. 황혼의 지식이 파편화된 앎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여명의 지식은 통합적, 전체적 앎을 가리킨다.

    국냄비 안에 끓고 있는 것들―그것이 식물이든 동물이든―은 단지 내 목구멍의 필요에만 소용되는 물건이 아니라, 그것들은 존재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것들이라는 말이다. 시인은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식물과 동물에서 땅과 태양과 구름과 하늘을 본다.

    이제는 지구별 위에서 그 아름다운 관습이 거의 사라졌지만, 인디언들은 자기가 뜯어먹으려는 약초 한 뿌리, 사냥해 먹으려는 동물에게도 ‘허락’을 구한다고 하지 않던가. 이렇게 허락을 구하는 마음, 그것은 우리가 먹는 식물이나 동물을 우리 욕구에 따라 마구 사용하는 그런 사고방식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엄청나게 다르다. 허락을 구하는 이의 삶의 태도는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개 한 마리라도 나와 다름이 없는, 살아 있는 생명으로 존중하는 태도이다.

    지금 우리의 산하(山河)는 ‘녹색성장’ 운운하며 경제를 살린다는 미명하에 또 다시 유린되고 있다. 우리 살림의 원천인 산하가 유린당해 죽는다면, 경제가 좀 나아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산과 들에 벌, 나비가 사라지고 강에 사는 물고기가 씨가 마른다면, 인간인들 생존할 수 있겠는가.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별 위의 모든 생명이 성스러운 신의 피조물이다.

    녹색성장으로 유린되는 자연

    우리가 만물을 ‘성스럽게’ 여긴다면, 다른 이가 지닌 ‘인권’을 존중하듯이 사물이 지닌 ‘물권’(物權)도 존중해야 할 것이다. 물권이라니?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조차 인간 못지않게 존중받아야 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입 없어서 말 못하는 사물들의 성스러운 ‘물권’마저 염두에 두는 삶, 이런 여명의 지식을 우리가 지니고 살 때 비로소 우리는 만물의 영장이란 이름에 걸맞은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고진하 숭실대 문창과 겸임교수·시인>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