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가능 시간 밖 따로 실유하는 존재 없다”
20세기 인간의 정신적 삶에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가 세상을 떠난 지 사반세기가 훨씬 지났지만, 현대의 정신에 미치는 그의 사상적인 영향력은 여전하다.
그의 사유의 크기와 넓이가 어떠한지는 철학을 위시해서 신학, 사회학, 심리학, 정치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활약한 여러 사상가들에게 끼친 영향력에서 가늠해볼 수 있다. 사실 철학 하나만을 놓고 보더라도, 가다머, 아렌트, 마르쿠제, 하버마스,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푸코, 데리다, 로티, 드레퓌스 등 독일 안팎의 유수한 철학자들이 그의 사상의 자장(磁場)에서 철학의 길을 걸어갔다.
주지하다시피 하이데거가 평생 동안 화두로 삼은 사유의 문젯거리는 “존재물음(die Frage nach dem Sein)”이었다. 이미 김나지움 시절부터 그를 사로잡은 문젯거리였지만,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신학부에 진학한 이후 후설의 『논리연구』 등 그의 현상학적 저작들을 연구하고 그 성과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적용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존재물음의 길로 들어섰다. 후설의 현상학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으로 갱신된 것은 의식의 체험작용에서 자기 자신을 현시(顯示)하는 것이 존재자의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이다.
‘존재물음’ 평생 화두 삼아
그러나 존재자의 존재가 은폐성에서 벗어나서 환히 드러난다는 것은 옛 그리스인들의 존재경험이다. 존재물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탐구가 그리스 사유 이래로 줄곧 흘러온 “서양 사유의 역사에 대한 성찰”과 함께 전개된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물론 이것은 서양 사유의 전통에 대한 한갓된 회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서양 사유의 역사적 행로에서 존재사유의 길을 떠나되, 신과 같은 최고 존재자의 그늘 아래에서 망각되어온 “존재 자체(Sein selbst)”의 “어떻게(das Wie)”를 밝히고자 한다는 점에서 서양 사유의 새로운 시원을 개창하고자 하였다. 그 당당한 포부가 “존재물음”이라는 말 한마디에 배어 있다.
동양 사유에 보인 그의 관심이 어떤지를 알려면, 하이데거가 1958년 5월 19일 일본인 철학자 히사마츠와 나눈 대담에서 던진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동양과 서양 사이의 그러한 만남이 경제적‧정치적 접촉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정치적 접촉”과는 격이 다른 “그러한 만남”은 “더욱더 깊은 자리”에서 비롯하는 만남이다. 한마디로 “동양적-서양적 사유”의 만남이다.
그렇다면 과연 하이데거는 동양과 서양이 사유의 더욱더 깊은 자리에서 서로 만날 수 있도록 어떤 기여를 했을까? 굳이 그의 인생이력을 들여다보자면, 1946년 노자의 『도덕경』을 중국인 유학생 폴 쉬 이 샤오와 함께 독일어로 번역하고자 하다가 그만둔 일화가 떠오른다. 또한 그가 일본인 학자들과 교분을 나누면서 선불교를 알게 되고, 스즈키의 『선불교에 관한 에세이』를 읽었다는 것도 빠뜨릴 수 없는 이력이기는 하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쇼펜하우어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사유 속으로 불교와 같은 동양의 사유를 흡수했다는 증거는 없다. 존재, 무, 개방성, 언어, 비은폐성 등과 같은 하이데거의 근본개념들에 아로새겨진 선불교나 도가사상의 영향을 찾으려는 연구자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오히려 불교와 그의 존재사유 사이에서 일어난 “동양적-서양적 사유”의 만남을 추적하려면, 하이데거가 평생 동안 추구한 사유의 문젯거리가, 즉 존재 자체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존재 자체는 마음과 다름없다. 다만 그는 마음을 서양 사유의 형이상학적 전통에 충실하게 존재 자체로 달리 부른다.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불교와 하이데거는 마음이라는 동일한 문젯거리를 놓고 각각 종교적 해탈의 길과 철학적 사유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그 만남의 접점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1927년에 출간된 『존재와 시간』에서 그는 존재 자체를 후설의 현상학의 그늘 아래에서 “존재의미”로, 또 “존재의미”를 “근원적 시간”으로 묘사한다. 시간을 떠올리면 누구라도 흐름을 연상하듯이, 시간을 실체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간이 (실)체가 아니라 (작)용이라는 점에서 그는 시간을 시간화(時間化, Zeitigung)로 규정한다.
요컨대 시간은 시간화한다는 말이다. 시간은 그때마다 시간화하되, 인간 현존재(Dasein)의 실존 등 존재자의 존재가 환히 드러나도록 세계의 열린 공간을 조성한다. 시간을 시간화의 작용으로 본 점에서 이미 하이데거가 서양 사유를 오랫동안 물들이고 있던 실체론, 본질주의, 실재론 등을 벗어났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도덕경’ 읽고 선불교에 심취
우선 하이데거가 어떻게 반(反)본질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는지를 살펴보자. 본질은 플라톤의 이데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으로 소급되는 중세스콜라철학의 근본개념이다. 설계도가 제품의 특정한 기능을 미리 규정하듯이, 본질은 어떤 사물을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그러한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하도록 시종일관 규정한다. 인간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지성적 영혼이 인간을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즉 동식물과는 다른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하도록 미리부터 규정한다.
달리 말해서 인간의 본질은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미리부터 제한하고 한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볼 때, 인간은 지성적 영혼과 같은 본질이나 실체적 자아가 없다. 오히려 무아(無我)이기에, 그저 인간은 시간의 열린 지평 또는 세계의 열린 공간에서 현존재답게 그때마다 매번 다른 여러 가지 방식들로 실존하곤 한다. 실존의 “어떻게”를 특정한 한 가지 방식이 되도록 옭아매는 본질이 없기에, 가령 저 학생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그가 어떻게 세계에서 실존하는가를 관찰해야 한다.
만약 그가 학교를 떠나서 들판에서 씨앗을 뿌리고 있다면, 그는 학생이기 이전에 농부로 실존하는 셈이다. 그를 처음부터 학생의 존재방식으로만 존재하도록 규정하는 그러한 본질은 없다.
이것은 “출생에 따라 바라문이 됩니까? 행위에 따라 바라문이 됩니까?”라는 바쎗타의 질문을 두고 붓다가 펼치는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다. 예컨대 “인간 가운데서 소를 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바쎗타여, 그는 농부이지 바라문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라는 붓다의 가르침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이 어떻게 행위하는가에 준해서 농부가 되기도 한다면, 바라문도 태생이 바라문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쾌락, 갈애, 분노, 적의, 집착, 거짓 등을 버리고 계행과 의무를 지키며 윤회의 삶을 끝내기 위해서 그렇게 행위하는 한에서, 그는 비로소 바라문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를 태어날 때부터 바라문이 되도록 규정하는 그러한 본질이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인간을 비롯해서 만법의 실체적 본질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와 불교는 서로 소통한다.
마음의 문제로 돌아가자면, 시간의 기능이 마음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간은 근원적 힘답게 스스로 작용하되, 시간화의 방식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시간이 근원적 힘답게 저절로 시간화할 때마다, 현-존재와 세계의 열린 공간이 시간의 시간화작용에서 생기한다. 현존재가 실존하는 것도, 그 밖의 존재자가 존재하는 것도 시간의 시간화에서 그때마다 생기하곤 하는 현-존재와 세계의 열린 공간 안에서이다.
달리 말해서 현존재의 실존 등 온갖 존재자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세계의 열린 공간인 한편, 세계의 공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시간의 시간화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온갖 존재자가 마치 실체인 양 시간의 열린 지평 바깥에서 미리부터 따로 실유(實有)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지평이 마음인 한에서, 존재자가 마음 바깥에서 따로 실체적으로 실유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하이데거와 불교는 다시 반실재론의 지점에서 조우한다.
사실 시간을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마음에서 우주만법이 나오는 것처럼, 시간이 현-존재와 세계가 생기하도록 그렇게 시간화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시간의 시간화작용에 견줄 만한 마음의 작용으로는 유식불교의 아뢰야식을 들 수 있다. 아뢰야식은 종자(種子)를 인연으로 해서 인간과 기세간(器世間)을 지어낸다. 말하자면 이 식은 온갖 종자를 유실되지 않게끔 보존하면서 적절한 연(緣)과 함께 종자의 현행(現行)을 일으킴으로써 “종자생(生)현행”의 방식으로 만법을 짓는다.
해탈 위한 실천 사유 없어 한계
현존재를 비롯해서 온갖 존재자가 존재하는 열린 공간으로서 현-존재와 세계가 그때마다 시간화작용에서 생기하는 것처럼, 인간도, 그가 머무는 기세간도 애초부터 아뢰야식의 능변(能變)작용 이전부터 따로 실체인 양 실유하는 것은 아니다. 뿐더러 하이데거와 불교가 반실체론의 지점에서 어떻게 회동하는지를 알려면, 시간의 시간화작용의 “어떻게”가 아뢰야식의 상속(相續)과 전전(展轉)의 “어떻게”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살필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아뢰야식은 등무간연(等無間緣)을 따라서 매 찰나마다 원인(전 찰나의 아뢰야식)과 결과(후 찰나의 아뢰야식)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점에서는 상속하는 한편 전멸후생(前滅後生)의 방식으로 자신의 양상을 달리한다는 점에서는 전전한다. 그렇기에 이 식은 찰나마다 상속함으로써 연속성을 이루는 반면에 전후 찰나에 걸쳐서 전전함으로써 불연속성을 이룬다. 이 식은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상호교직(相互交織)에서 찰나마다 차이성이 일어나도록 상속하고 전전한다. 이것은 시간의 시간화작용의 경우에도 다를 바가 없다.
시간은 한 순간 시간화작용을 완결한 다음에 근원적 힘답게 다시 시간화작용을 펼친다는 점에서 아뢰야식처럼 연속성을 취한다. 그러나 시간은 이전 순간의 시간화작용의 소멸과 함께 다음 순간의 시간화작용이 생기함으로써 전멸후생하되, 이전 순간의 시간화의 양상과 다음 순간의 시간화의 양상 사이에 차이성이 가로놓여 있다는 점에서는 역시 그 식처럼 불연속성을 취한다. 요컨대 시간이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상호교직에서 차이성이 일어나도록 시간화한다는 말이다.
삼법인으로 총괄하자면, 시간과 아뢰야식이 죄다 실체가 아니고 또 실체적 본질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 각각 시간화와 능변의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제법무아(諸法無我)에 해당한다. 시간으로 불리든지 아뢰야식으로 불리든지 간에, 동일한 마음의 텍스트를 하이데거와 유식불교가 반본질주의나 반실체론의 맥락에서 체(體)가 아닌 용(用)으로 해독한 것은 제법무아의 가르침에 잘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시간과 아뢰야식이 용으로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두고 매 찰나마다 차이성이 일어나도록 그렇게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상호교직에서 생기하는 것으로 밝힌 것은, 무상이 전후 찰나에 걸친 차이화나 변화의 사건을 가리키는 한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가르침과도 잘 합치한다.
그러나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을 놓고 불교와 하이데거는 서로 갈라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이데거의 존재사유에는 열반과 같은 종교적 구경으로 난 해탈의 길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팔정도와 같은 종교적 실천이 그의 사유 어디에도 놓일 만한 자리가 없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존재사유는 철학적 사유의 길이지 종교적 해탈의 길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권순홍 군산대 철학과 교수
권순홍 교수는
연세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군산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존재와 탈근거 : 하이데거의 빛의 형이상학』, 『유식불교의 거울로 본 하이데거』 등이 있고, 역서로는 『서양철학사』, 『사유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또 논문으로는 「하이데거와 타인의 문제」, 「현대 기술과 도시적인 삶의 일상성」 등이 있다.
출처 법보신문 1007호 [2009년 07월 20일 1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