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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도교, 대립과 투쟁 그리고 융합 / 최일범

slowdream 2009. 7. 28. 01:37

불교와 도교, 대립과 투쟁 그리고 융합 / 최일범
특집 - 불교와 도교의 대립과 융합
[39호] 2009년 06월 10일 (수) 최일범 cib424@naver.com

1. 서론

불교와 도교는 유교와 함께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전통 사상 문화의 주류를 형성하여 소위 유불도 삼교라고 지칭된다. 그중에서 유교가 윤리도덕과 경세(經世)라는 현실적 사상 문화를 주도하였다면, 상대적으로 도교와 불교는 종교와 현학적 사유(여기에서 말하는 현학적 사유란 중국 위진 도가의 현학이라는 좁은 의미가 아니라 불교와 도가의 일종의 초월적이고 비분별적인 사유체계를 지칭한다.

물론 뒤에서 말할 도가의 현학은 단지 ‘현학’이라고 표현하여 여기서 말한 ‘현학적 사유’와 구별할 것이다.)라는 초월적 사상 문화의 주류를 대표한다. 따라서 도교와 불교를 서술한다는 것은 바로 동아시아 전통 사상 문화에서 현학적 사유와 종교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된다. 물론 유교 속에도 종교의 의미가 있고, 도교와 불교 속에도 세속적인 의미가 없지 않지만 그 사상적 특성을 대표하는 것이 그렇다는 말이다.

현학적 사유와 종교라는 두 가지 범주로써 불교와 도교를 대표한다고 할 때, 여기에서 말하는 종교와 현학적 사유라는 것은 오늘의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적인 의미와는 다르다. 곧 서양의 철학과 종교가 갖는 의미와는 다른 독특한 의미가 전제된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종교라고 할 때, 기독교가 절대 유일신에 대한 경외나 신앙을 종교라고 한다면, 불교와 도교는 인간이 선(禪)이나 명상(冥想) 혹은 내단(內丹)의 실수(實修)를 통해서 획득하는 신통(神通)의 의미가 보다 중요하게 부각된다.

예컨대 붓다에게 명상과 정신 통일은 바로 올바른 이법(理法)을 보고 명지(明知)를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원시불교의 기본원리라고 여겨지는 사제(四諦)나 12연기(緣起)의 설도 결국은 그러한 명상의 실수(實修)에 의해서 비로소 생생한 진리가 된다. 유명한 12연기의 관찰 등도, 근대의 학자가 이해하는 것처럼 단순한 논리적인 존재의 근거를 말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선(四禪)의 실수(實修)를 통해서 얻어지는 신통(神通)이라고 하는 특수한 능력에 의해서 과거와 현재 및 미래의 자신과 생생하게 살아가는 생명의 모든 생성의 모습들을 아는 일이었다.

서양의 경우 종교와 결별한 근대적 사유 또는 유다이즘과 만나기 이전의 헬레니즘의 이성적 사유 체계를 철학적 사유라고 한다면, 불교와 도교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현학적 사유가 종교적 명상과 선의 실수와 직접적 관련이 있다는 것이 독특하다. 다시 말하면 동아시아에 있어서(물론 인도를 포함하여) 현학적 사유는 종교적 명상과 선의 실수를 통해서 획득되는 일종의 지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는 적어도 도교와 불교가 유교와의 융합을 통해 지극히 세속적인 관점에 매몰되는 형태를 이루기 전에는 항상 그러하다. 곧 유교와 융합한 후의 불교와 도교, 특히 선종은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일상생활의 마음이 곧 도’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도의 실상(實相)이라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평상심이란 다름 아닌 ‘추우면 춥다고 알고, 더우면 덥다고 아는’ 지극히 평범한 마음으로서, 불교나 도교의 독특한 신통(神通)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더우면 덥고 추우면 춥다고 아는 마음은 단지 세속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초월과 결별한 세속, 종교와 대립하는 윤리적 관점이 아니라, 유교가 이룩한 소위 세속 속에 초월이 내재한 일종의 체용론적 세계관, 본체론의 극도로 발전된 표현의 형태인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유교와 관련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도록 한다.

불교와 도교의 사상 문화적 특징을 또 달리 표현한다면 심리(心理)와 생리(生理)라는 범주로서 개괄할 수 있을 것이다. 곧 불교가 심리적 종교요 철학이라면 도교는 생리적 종교요 철학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의 철학이 중관과 함께 유식(唯識)이라는 일종의 심리 철학으로 발전한 반면, 도교는 기(氣) 중심의 음양오행론의 세계관과 철학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교와 도교를 동아시아 전통의 정신문화와 물질문화의 관점에서도 대비할 수 있다. 예컨대 의학, 천문학, 지리학 등 동아시아 전통 과학 사상은 거의 도교적 배경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도교와 불교는 종교와 현학적 사유라는 공통된 범주의 사상 문화이기 때문에,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먼저 도교와의 융합을 이룬다. 아니 융합이라기보다는 불교가 도교에 의지해서 자신을 중국이라는 새로운 토양에 뿌리내리는 것이다. 중국 전통 사상 문화는 유, 불, 도 삼교의 상호 교섭과 보완에 기초해서 형성되었다. 삼교는 각각의 사상적 정체성의 차이로 말미암아 충돌하고 갈등하였지만 동시에 상대방의 장점을 흡수하여 각각의 약점을 보완함으로써 자신의 사상내용을 충실하게 발전시켰다.

중국 위진 사상 연구의 대가 탕용동(湯用?)은 외래 사상문화와 본토사상문화의 교류가 대체로 다음 세 단계를 거친다고 하였다. 곧 교류의 첫 번째 단계는 상호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같은 점만 보고 조화하는 단계’, 두 번째 단계는, 상호 교류가 진행함에 따라 각자의 특성이 점차 드러나서 ‘서로 다른 점을 보고 충돌하는 단계’, 세 번째 단계는, 상호 간에 깊이 이해함으로써 다른 점은 물론 같은 점도 보게 되어 더욱 높은 차원에서 ‘진실하게 만나서 조화될 수 있는 단계’라는 것이다.

불교가 중국에서 전파하여 유교와 도교와 만나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이런 단계를 거쳤다. 한대(漢代)에 전래된 불교는 동진(東晋) 시대까지 유교와 도교에 의지하는 상태였다.

곧 한대의 불교는 종교 관념상에서는 신선방술에, 정치 윤리 관념상에서는 유교에 영합하였다. 위진(魏晉) 시대에 이르러 불교는 사상 내용과 방법상에서 도가의 현학(玄學)에 의지하면서 내용적으로 더욱 충실해져서 점차 널리 유포되었고 마침내 거꾸로 현학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동진 시대부터 남북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유교, 도교와 갈등의 관계를 형성하였다. 불교가 점차 발전하면서 중국의 전통 사상들과 다른 점이 점차 분명해지고, 불교의 중국사회에 대한 영향 역시 점차 확대되면서 유교와 도교의 불교에 대한 관점도 투쟁적으로 변화하였다.

이렇게 유교와 도교와의 충돌 과정에서 불교는 진일보 발전하게 되었다. 마침내 수당(隋唐) 시기에 이르러 삼교융합, 삼교일치 사상을 도출하였고, 불교는 유교와 도교를 흡수하여 중국화된 불교, 천태종, 화엄종 및 선종을 형성하게 되었다. 동시에 불교의 사상적 특징 또한 유교와 도교에 흡수되어 새로운 유교로서 송명(宋明) 시대의 신유학(新儒學)과 새로운 도교로서 내단(內丹) 도교를 형성하였다.

이 글에서는 도교와 불교의 양면, 곧 종교와 현학적 사유가 어떻게 갈등하고 융합하였는지 시대적인 추이에 따라 그 사상적 특징을 서술하고자 한다. 초기 단계로서 불교와 도교의 종교적 만남을, 중간 단계로서 도가의 현학과 불교의 반야사상의 만남 곧 격의불교의 문제를,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계로서 불교의 선종과 노장 사상의 문제와 불성(佛性) 사상에 영향 받은 도교의 내단 사상의 문제를 다룰 것이다.

2. 불교의 전래와 초기 도교: 신비주의의 조우

도교의 내용에 대해서 남조(南朝) 양(梁)의 유협(劉?)은 멸혹론(滅惑論)서 “가장 높은 경지는 노자(老子)를 표방하는 것이고, 다음은 신선(神仙)이며, 가장 낮은 것은 장릉(張陵)이다.”라고 하였다. 노자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춘추전국 시기의 제자백가에 속하는 도가(道家)의 노자와 장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신선이란 단법(丹法)에 의해 선화(仙化)한다는 일종의 방술(方術)이며, 마지막으로 장릉이란 후한(後漢) 이래 불교의 영향으로 수립된 민중 종교로서의 도교로서 태평도(太平道), 또는 오두미도(五斗米道)를 가리킨다. 도교 경전의 집대성인 명대의 정통도장(正統道藏)과 만력(萬曆)의 속도장(續道藏)은 모두 1,476종(種), 5,485권(卷)으로 그중에는 경계(經戒), 과의(科儀), 부록(符?), 연양(煉養) 등의 서적과 도가(道家), 유가(儒家), 음양가, 의(醫), 병(兵) 등 제자백가의 서적 역시 포함하고 있다.

도교의 정체성에 대해서 우리는 《도교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민족사 간, 최준식 역)에 보이는 일본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를 참고할 수 있다. 그중에서 “도가(道家)와 도교(道敎)는 일반적으로, 특히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동일하게 사용된다.

엄격히 구분한다면 도가는 철학적 도교(Philosophical Taoism)이고 도교는 종교적 도교(Religious Taoism)이다. 도교는 노자를 신격화하여 태상노군, 현원황제(玄元皇帝)라고 부르며 숭배하였고, 그것을 중심으로 많은 신들에게 제사 드리고 기복하는 묘관(廟觀)과 교단을 가진 종교이다.”라는 분석과 “도교는 중국의 오랜 민간신앙에서 발달한 것으로 그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도관(道觀), 도사(道士)의 교단 조직을 가진 성립도교(교회도교, 혹은 교단도교라고도 한다.)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 사이에서 행해졌던 모든 도교 신앙을 포함하여 총칭하는 민중도교이다. 도교의 내용에는 노장의 철학, 참위(讖緯), 무축(巫祝), 음양(陰陽), 신선(神仙), 복서(卜筮) 등의 수술(數術)적 부문, 벽곡(?穀), 복이(服餌), 외단(外丹), 내단(內丹) 등이 포함된다.”라는 분석은 대체로 도교의 복잡한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도교가 종교적인 체계를 완비한 것은 4세기 이후이다. 고대 중국의 《노자》, 《장자》, 《추연(鄒衍)》,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 《회남자(淮南子)》 및 점성가, 의방가(醫方家), 참위가(讖緯家)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사회에 대한 인간들의 사유의 성과물을 흡수했으며, 아울러 도가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자연과 사회 그리고 인간이 합일되는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고대 중국, 특히 초나라에 유전되어 온 여러 가지 신화를 수용하여, 그것을 개조, 안배하여 법도가 엄정하고 명목이 다양한 신의 계보를 만들었다. 또한 이를 앞에서 서술한 철리적 요소와 상호 결합시켜 종교적 형태로 전화시켰다. 그리고 고대 중국, 특히 초나라 문화권에서 성행하던 산천, 일월성신, 귀신들에 대한 제사의식을 재초과의(齋醮科儀)의 형식으로 규정화시키고 무의(巫醫)의 주술과 고약 등을 통한 의술 행위, 민간에서 복숭아나무로 만든 도장이나 부적으로 사악한 기운을 다스리고 귀신을 몰아내는 방식을 금주(禁呪), 부록(符?) 등의 법술로 발전시켰다.

당시의 자연과학의 성과를 흡수하고, 도인(導引) 등의 건신술(健身術)을 상호 결합하는 한편 신화(神化), 단연(丹鉛), 방약(方藥) 등으로 이른바 내단(內丹)과 외단(外丹)의 학설을 이루었다. 도교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유교로 대표되는 인문주의의 이성적 태도와 다른 비이성주의적 일면, 곧 강력한 생존 욕망과 향락에 대한 욕구를 엿볼 수 있다.

양한 시기에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황로학(黃老學)과 신선방술(神仙方術)로부터 발전한 황로도(黃老道)와 결합되어 불도(佛道)라고 불리게 되었다. 황로도는 한 무제 이후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했는데 소위 황로(黃老)란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신격화한 것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초기에 어떻게 중국인들에게 인식되었는지 알려 주는 설화가 있다. 후한의 명제(明帝)가 꿈에서 궁전으로 날아온 붓다의 자유로운 공중비행과 찬란한 금빛에 감동되어 마침내 칙사를 인도에 파견하여 불교를 찾은 것이 불교가 중국에 전래한 최초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설화는 당시 중국인들이 불교를 일종의 도술로 인식했음을 알려 준다.

중국의 초기 불교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헌으로 혜교(慧皎, 497~554)의 《고승전(高僧傳)》 14권이 있다. 이 책은 후한부터 책의 편찬 시기에 이르는 대표적인 고승 259인의 전기인데, 그 속에는 신이(神異) 20인과 습선(習禪) 21인이 나온다. 신이(神異)는 신통(神通)이라고 불리는 초인간적인 능력으로서 명상의 실수(實修)에 의해서 얻어지는 기적적 영감에 의한 것이다. 팔리어로 된 《사문과경(沙門果經)》에 의하면, 사선(四禪)의 단계를 서술한 후 신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마음이 고요하고 깨끗해져 번뇌가 없고, 번뇌라는 이름마저 떠나서 유연하게 되어, 항상 활동하면서도 평안한 상태에 이를 때, 수행자는 여러 가지 신통에 마음을 기울여 여러 가지 신통을 실증할 수 있다.(南傳藏經 6)

여기서 신통은 일신(一身)을 다신(多身)으로 되게 하고, 어떤 때는 몸을 감추고 어떤 때는 감추며, 공중에 가부좌를 한 채 마치 새처럼 돌아다니며, 범천(梵天)의 세계까지도 도달하는 것이라고 한다. 곧 인도불교의 소위 육신통(六神通)인 신족통(神足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천안통(天眼通), 누진통(漏盡通) 등 기적적인 능력인 것이다.

중국에 처음 소개된 불교의 경전 가운데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이나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 역시 당시의 중국인들이 관심이 명상에 의한 신비로운 불교였음을 시사한다. 안반이란 산스크리트어 아나 파나의 음역(音譯)으로서 초보적 명상법인 수식관(數息觀)이며, 반주삼매란 명상 속에서 모든 부처가 수행자 앞에 나타나 뚜렷이 볼 수 있다는 신비로운 명상이다.

2세기 중엽에 안세고(安世高)가 번역한 《안반수의경》의 서문에서 강승회(康僧會. ?~280)는 “호흡의 조화를 얻은 사람은 그 마음이 명료하여 약간 눈을 드는 것만으로도 아무리 깊은 곳도 꿰뚫어 보며, 무한히 먼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살아온 경력과 현세 국가의 모든 사건 등 어떤 것도 모르는 것이 없다.”(大正藏 권 15)고 하였다. 역시 《안반수의경》에 서문을 지은 도안(道安. 312~385) 역시 “이 명상의 고요함을 얻으면, 그가 발을 움직이면 곧 대천세계가 진동하고, 그가 손을 올리면 곧 해와 달을 한줌에 쥐고 ……. 그가 숨을 쉬면 곧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이 춤추며 따라온다.

그러한 것은 모두 사선(四禪)의 불가사의한 정신통일의 힘에 의한다.”(大正藏 권 55)라고 하였다. 《고승전》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안세고(安世高)는 “칠요(七曜), 오행(五行), 의방(醫方), 이술(異術) 등에 달통하였고, 심지어 새소리 짐승 소리까지 정통하지 못한 것이 없다고 한다”(大正藏 권 50, 323쪽)고 한다.

담가가라(曇柯迦羅)도 풍운(風雲), 성수(星宿), 도참(圖讖), 운변(雲變)에 달통하였으며(대정장 권 50, 324쪽), 강승회 역시 도술(道術)로써 이적(異蹟)을 행했다고 한다(대정장 권 50, 326쪽). 이런 문헌을 통해서 우리는 불교의 이론 중에서 먼저 중국인에게 소개된 것은 소승선학(小乘禪學)의 일종이며, 당시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불교와 도교를 구분하지 않고 단지 신비주의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3. 현학(玄學)과 격의(格義) 불교 : 신비주의의 이성화

2세기 말부터 4, 5세기에 걸쳐서 인도로부터 속속 전해진 대승경전 가운데 중국의 지식인이 가장 매력을 느꼈던 것의 하나가 반야계의 경전이었다. 그러나 매력은 동시에 용이하지 않은 난해함과 표리를 이룬다. 대체로 당시의 중국에서는 한제국(漢帝國)의 관학(官學)이었던 유학(儒學)이 오래 지켜온 현실주의적인 권위가 약화되고 노장 계통의 새로운 형이상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 경향을 결정적으로 만든 것은 3세기 초의 한(漢)의 멸망과 이어진 3국 대립의 정치적 현실이었다. 사상 면에서의 추이를 말해 주는 것은 유명한 왕필(王弼, 226~249), 하안(何晏, ?~249), 곽상(郭象, ?~312) 등에 의한 현학이며, 이에 뒤이어 출현한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대표되는 청담(淸談)이다.

현학과 청담은 당시 중국에서 한대(漢代)의 음양오행의 기계론적 우주관을 극복한 새로운 철학의 출발을 의미한다. 그들은 모두 표면적으로는 유교를 표방하면서도 무(無)의 형이상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으로 《주역》, 《노자》, 《장자》를 해석하였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이 현학의 유무론(有無論)으로 해석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형세였다. 곧 반야사상의 공(空)의 개념을 노장의 무(無)에 빗대어 이해하였으니 이러한 방법을 전반적으로 격의(格義)라고 부른다.

위진 현학의 발전은 기본적으로 도가사상의 부활이다. 그 발전 과정은 대체로 두 단계로 구분된다. 첫 번째 단계에서 중시한 경전은 노자로서 현학을 무(無)에 기초해서 수립하였고, 둘째 단계에서 중시한 것은 장자로서 현학을 유(有)와 무(無)의 융화를 통해서 수립하였다. 첫째 단계를 대표하는 인물과 사상은 하안(何晏)과 왕필(王弼)의 귀무론(貴無論)으로서 주로 《노자》 해석을 통해서 드러났다. 둘째 단계의 발전 과정 또한 두 개의 단계로 나눌 수 있는바, 첫째 단계의 사상과 인물은 죽림칠현(竹林七賢), 특히 혜강(?康)과 완적(阮籍), 향수(向秀)로서 ‘명교(名敎)를 초월하여 자연(自然)에 맡긴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들은 당시 사상의 근거를 《노자》로부터 《장자》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향수가 《장자》를 새롭게 해석하는 학문적 작업에 집중한 외에 다른 사람들은 《장자》 사상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체현하는 실천적 태도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현학 발전의 둘째 단계는 서진(西晉) 시기에 이르러 곽상(郭象)의 《장자주(莊子注)》와 배위(裵퐯)의 《숭유론(崇有論)》이 출현함으로써 완결된다.

위진의 현학이 출현한 배경으로 우리는 진한(秦漢) 시대의 황로사상에 대해서 먼저 언급해야 한다. 황로사상은, 유가 못지않게 도가사상이 중시함으로써, 도가와 유가를 결합하는 경향이 짙었는데 《여씨춘추(呂氏春秋)》, 육가(陸賈)의 《신어(新語)》, 가의(賈誼)의 《신서(新書)》, 《회남자(淮南子)》 등이 모두 그러했다.

그러나 한무제가 독존유술(獨存儒術)을 선언한 후 《노자》를 말하는 학자는 점차 줄어들게 되었는데, 동한(東漢) 말기에 다시 도가의 경전들이 중시되기 시작했다. 하안과 왕필은 이때 《노자》의 무(無)의 형이상학을 주장한 것이다. 무(無)는 만유(萬有)의 존재론적 본체인 도(道)로서 형상도 없고 따라서 이름 지을 수도 없다. 이에 대해서 왕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유(有)는 다 무(無)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는 때가 곧 만물의 시작으로서 형체도 있고 이름도 있는 때에 이르러 그것을 생장시킨다. 도(道)가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이 만물을 형성한다는 것은 만물이 도에 근거해서 시작되고 형성되지만 그 근원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니 현묘하고 또 현묘하다.”
(《노자》 제1장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에 대한 왕필주)

이러한 무(無)의 형이상학은 소위 ‘언의지변(言意之辨)’의 문제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장자(莊子)》 〈외물(外物)〉 편에 보이는 “득어망전(得魚忘筌)” 곧 “고기를 잡았으면 통발은 잊는다.”는 의미에서 발전한 것이다. 왕필은 언(言), 상(象), 의(意)의 세 가지 범주를 제시하였다. 곧 언(言)의 작용은 상(象)을 아는 데 있고 상(象)의 목적은 의(意)를 아는 데 있으므로, 언(言)과 상(象)을 잊어야 의(意)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실은 한대(漢代)에 유행했던 상수역학(象數易學)과 음양오행에 기초한 우주론(宇宙論)을 비판하고 새로운 관념적 형이상학을 수립한 것이었다. 또한 현학의 성행은 불교의 반야(般若)사상을 수용하는 데 결정적인 환경을 조성하였다. 노장의 무(無)는 불교 반야사상의 공(空) 개념을 해석하고, 언의지변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선종의 종지(宗旨)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위진의 현학 시대를 수당의 불교, 특히 선종이 계승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가 되었다.

왕필의 소위 무의 형이상학이란 형이상자인 무가 만물을 낳는다는 발생론은 결코 아니다. 왕필은 《노자》 제10장 주(注)에서 “그 근원을 막지 않으면 만물은 스스로 생하니 무슨 공이 있겠는가? ……만물은 저절로 자라니 내가 주재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덕은 있되 주재함은 없으니 현묘하지 않은가?”라고 하여 만물을 주재하는 초월적 형이상자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그는 “천지는 자연에 맡겨 무위하며 조작이 없다. 만물은 자연스럽게 서로 다스리니 (천지는) 불인(不仁)하다.

 천지는 짐승을 위해 풀을 낳은 것이 아니건만 짐승은 풀을 먹고, 사람을 위해 개를 낳은 것이 아니건만 사람은 개를 먹는다.”(《노자》 제5장 注)고 말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한 “무위하며 조작이 없다”는 것이 곧 그가 말하는 ‘무(無)’이다. 즉 인위조작이 없는 자연(自然)의 무위의 덕이야말로 만물을 생장하게 하는 근본이라는 것이다. 왕필이 말한 “모든 유는 무에서 시작한다.……도는 무형무명으로써 만물을 시작하고 이룬다”(《노자》 제1장 注)는 ‘무’의 형이상학은 기실 ‘인위조작이 없는 덕’의 형이상학적 표현일 뿐이다.

따라서 왕필의 ‘생(生)’은 형이상자인 도(道=無)가 만물을 발생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만물은 인위조작에 의해 억압되지 않을 때 만물이 자신의 본성에 따라 생명의 자연스러움을 발휘할 수 있다는 ‘불생지생(不生之生)’1)이다. 따라서 왕필의 형이상학은 무위(無爲)의 덕(德)을 체득한 성인(聖人), 지인(至人), 신인(神人)의 정신 경계를 드러내는 경계 형태의 형이상학일 뿐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2) 그렇다면 왕필의 형이상학이 성립하는 논리적 토대는 무엇인가?

왕필의 형이상학은 체용론(體用論)이기도 하다3). 그의 ‘대연의(大衍義)’에 의하면 태극(太極)과 만물은 체용의 관계로 해석된다. 《주역》 〈계사〉의 ‘대연 수는 50인데 쓰기는 49만 쓴다.(大衍之數五十,其用四十有九)’에 대해서 왕필은 이렇게 설명한다.

‘쓰기는 49만 쓴다(其用四十有九).’는 것은 일(一)은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쓰이는 49가 쓰이지 않는 일(一)에 의해 통하게 되니, 일(一)은 수(數)가 아니라 수(數)가 그것에 의해 이루어지는 본체이다. 일(一)은 《역(易)》의 태극(太極)이고 49는 수(數)의 극(極)이다. 무(無)는 무(無)로써는 밝힐 수 없으니 반드시 유(有)에 인(因)해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만물의 극(極)에서 만물이 연유한 근원을 밝혀야 한다.4)

여기에서 ‘쓰이지 않은 일(一)’은 수(數)가 아니라 49의 수(數)를 존재하게 하는 본체(本體)요, 49의 수(數)는 본체(本體)의 작용(作用)이라는 체용(體用)의 관계가 성립한다. 이러한 체용론이야말로 왕필의 의리역학(義理易學)의 핵심이거니와, 후에 역학(易學)뿐 아니라 불교에도 승조(僧肇)를 비롯하여 불교의 교학, 특히 《기신론(起信論)》, 화엄(華嚴), 《육조단경(六祖壇經)》 등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는게 된다.

노장의 무(無)를 통해서 불교 반야사상의 공(空)을 해석한 것을 소위 격의(格義) 불교라고 한다. 소위 격의(格義)란 간단히 말하면 중국 고유의 철학 개념으로 불교사상의 유사한 개념을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그 목적은 격의를 통해서 이해의 난해함을 해소하고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불교 교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축법아(竺法雅), 강법랑(康法朗) 등이 설법의 편의를 위해서 시작하였다. 《고승전》 권 4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축법아(竺法雅)는 하간(河間) 사람으로 어려서는 외학(外學)을 좋아했지만 장성하여서는 불교에 통달하였다.……그에게 배우는 사람 중에 세속의 경전은 잘 알지만 불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축법아는 강법랑 등과 불경 중의 사수(事數)를 외서(外書)에 빗대서 해석하였는데 이를 격의(格義)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사수(事數)란 불경 중의 명상(名相)의 술어(術語)로서 오음(五陰), 십이입(十二入), 사제(四諦) 등 숫자가 달린 개념을 사수(事數)라고 한다. 격의는 단지 사수를 설명하는 방편만은 아니다. 특히 노장사상으로 불교의 교의를 회통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고승전》 권 6에 있는 혜원(慧遠)의 전기(傳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일찍이 청강하는 사람이 실상의(實相義)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 의심이 깊어졌다. 이에 혜원이 장자의 의미를 인용하여 비유하자 그가 분명히 이해하였다. 그 후 도안(道安)은 혜원이 세속의 책을 인용하여 불경을 강설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격의의 방식은 단지 초학자들을 위한 방편이었을 뿐 불경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에는 문제가 있었다. 격의(格義)와 같은 비교철학의 입장은 두 개 이상의 사상적 차이를 문제 삼으면서 자칫 이질보다는 동질의 통일로 기울게 마련이다. 이렇게 하여 반야사상이 현학 속에 녹아들어가려 할 무렵에 격의의 오류를 강력히 주장한 사람이 도안(道安. 312-385)이었다.

 도안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획기적인 대승불교의 전도자인 구마라습에 의해서 해결되었다. 그의 젊은 제자 승조(僧肇)는 중국에서 최초로 대승불교의 공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그의 반야사상은 그가 저술한 《조론(肇論)》을 통해서 알려졌다.

4. 선종의 성립과 도교 내단(內丹)의 등장 : 융합에 의한 창조적 부활

중국문화에서 도교의 영향을 살펴보면 도교 안에 사대부나 관료 위주의 상층문화와 일반 서민들의 하층문화가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존과 상호 차이로 인해 도교의 중국문화에 대한 영향은 당연히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으며, 도교 자체도 사대부 도교와 민간 도교로 구분되는 발전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 소위 사대부 문화는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 불교와 선종을 두루 포괄하는 것으로서 중국문화 정신의 토대가 된다. 그런 이러한 정신문화를 자각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한 것은 사대부 계층에 국한된다. 사대부 계층의 문화가 일반 서민에게 수용되기 위해서는 일련의 세속화를 통한 개조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이처럼 세속화된 문화는 본래의 문화 형태와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마련이다.

세속화를 거쳐 일단 걸러진 문화는 거칠고 속된 면이 보이기는 하지만 통속적이고 이해하기 쉬워 일반 서민들의 심리에 부합할 수 있다. 도교의 경우 이러한 문화의 분화가 이루어진 것은 중당(中唐) 이후였다. 중당에서 북송에 이르는 시기는 중국문화사에서 중요한 전환기로서, 유가와 불가 그리고 도교라는 삼대 문화사조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 때였다. 유가는 성리학(=신유학)으로 전환되었고, 불교는 선종으로 발전하였고, 도교 역시 노장과 선종을 결합한 사대부 도교라는 새로운 형태로 발전해 갔다.

사대부들은 맹자로부터 성선(性善)과 양기(養氣), 그리고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는(反躬自省) 것을 배웠고, 선종에서는 마음이 곧 우주만물이라는 본체론 철학과 깨달음의 실천을, 도교에서는 태극도(太極圖)와 같은 우주론과 욕심을 줄이고 기(氣)를 기르며 몸을 닦는 과욕(寡慾), 양기(養氣), 수신(修身)의 수양법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도교의 수양법은 사실 도교의 원초적인 바탕인 장생불사, 곧 영원한 생명을 유지하려는 근원적 염원이 투영된 것이다.

실로 중당 이후 송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지배한 사조는 유불도 삼교일치론이다. 송 초기의 도사 진박(陳搏)이 삼교 조화를 말하였고, 장상영(張商英)은 《호법론(護法論)》을, 이강(李綱)은 《삼교론(三敎論)》을, 유밀(劉謐)은 《삼교평심론(三敎平心論)》을 지어 삼교일치를 주장하였다.

이런 사조에 기초해서 도교에서는 특히 불교의 선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소위 내단(內丹)을 주장하는 전진교(全眞敎)와 같은 도교 교단이 등장한다. 내단 사상의 근원은 멀리 한대(漢代)로 소급된다.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는 중국 동한(東漢) 말기의 도사 위백양(魏伯陽)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수당(脩唐) 시대를 거치면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하여 마침내 만고단경왕(萬古丹經王)으로 불리우게 된 도교 단학(丹學)의 최고 경전 중의 하나이다. 도교 단학은 외단(外丹)으로부터 내단(內丹)으로 발전하였는데 《주역참동계》에 대한 역대의 주석들은 이러한 단학 사상의 발전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중국 수당 시기에 출현한 내단 사상은 《주역참동계》를 내단의 원리로 해석하고 송원 시대에 이르러 불교를 수용함으로써 내단 사상의 주요한 특징인 성명쌍수(性命雙修) 사상을 완성하였다. 이 시기 내단 사상의 대표적 저작인 장백단의 오진편의 예를 들어 보면, 내단의 실수(實修) 과정을 선수명(先修命), 후수성(後修性)으로 그 단계를 구분하였다. 소위 성명(性命)이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성(性)이란 도(道), 신(神), 용(用), 정(靜)으로서 양(陽) 속의 음(陰)이며, 명(命)이란 생(生), 체(體), 동(動)으로서 음 속의 양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필요하니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된다. 음과 양은 하나만으로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체용(體用)이 아울러 온전해야 오묘한 도(道)를 이룬다.(戈國龍, 〈丹經極論〉 《道敎內丹探微》, 86쪽에서 재인용)

이로써 보면 당송 도교의 내단은 성(性)과 명(命)이라는 두 범주를 제시하였는데, 명(命)은 생리적 요소이고, 성(性)은 정신적 요소를 가리킨다. 도교는 생리적 요소인 명(命)을 기르는 공부를 전통적인 도교의 단학(丹學)에서 취하고, 불교로부터 성(性)의 공부를 수용하여 소위 성명쌍수(性命雙修)라는 도교의 독특한 수양 공부를 제시한 것이다. 이는 불교의 돈오(頓悟), 유교의 함양(涵養) 공부와 함께 중국 당송 시기의 삼대 공부론이라고 할 수 있다.

도교가 불교의 선종으로부터 성(性)의 문제를 수용하여 내단사상을 완성하였다면, 불교는 도가사상 특히 장자 사상을 수용하여 중국화된 독특한 선종 불교를 완성하였다. 선종의 기원은 신화와 전설에 가려져 있다. 이를테면 인도 선종의 초조로 전해지는 마하가섭의 ‘염화시중의 미소’는 선종이 한 송이의 꽃과 단 한 번의 미소로 발생한 것이라고 알려 준다. 이 전설은 진실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답다.

가섭으로부터 28대에 이르면 저 유명한 달마 조사가 등장한다. 그는 인도 선종의 마지막이자 중국선종의 초조이다. 곧 달마는 선종사에 있어서 인도와 중국의 교량인 셈이다. 그러나 인도 선종의 이 법통은 후세에 날조된 것이 거의 확실하다. 곧 인도에는 이와 관련된 어떤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한자의 선(禪)은 산스크리트어로 Dhyana(禪那)의 음역(音譯)에서 나왔으나 양자의 의미상의 차이는 뚜렷하다. 인도의 Dhyana가 집중적이고 조직적인 일종의 명상을 의미하는 데 대해서 중국의 선(禪)은 본체(本體=空)에 대한 일종의 돈오(頓悟) 내지는 자성(自性)에 대한 일종의 직관적 지각(知覺), 즉 증득(證得)의 의미를 갖는다. 선종의 조사들은 선의 본질을 명상이나 사색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호적(胡適)은 일찍이 “중국의 선은 인도의 요가나 Dhyana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 대한 반동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반드시 반동이라기보다는 무의식적 변형이라고 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양자가 다르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스즈키 박사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런 형식의 선은 인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선은 깨달음에 대한 중국적 해석이라고 하면서 이야말로 창조적 해석이라고 지적한다. 필자의 견해로는 선종은 그 원초적 추진력을 대승불교의 풍부한 충동성에서 이끌어 낸 것 같다. 그렇지 않고 만일 노장(老莊)의 원시 도가사상의 부흥에만 의존하였던들 이같이 활기차고 다이나믹한 정신운동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역설이 될지 모르지만 노장의 근본정신을 선의 형식으로 생생하게 부흥시키고 발전시킨 것은 대승불교의 충동 때문이었다.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이 날카롭게 지적했던 것처럼 장자 사상의 진정한 계승자는 당대의 선사들이다.5)

불교와 노장사상의 연계성에 대한 지적은 이미 승조로부터 시작된다. 야나기다(柳田聖山)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니르바나는 붓다 시대 이래, 언제나 명상의 내용이었다. 승조는 이것을 물아동근(物我同根), 만물일체(萬物一體)의 명상으로 바꾼다. 이 사상은 멀리 장자의 제물론에서 비롯되는데, 승조는 그것을 불교의 명상의 내용으로 만든 것이다.”6)

그러나 승조의 물아동근과 장자의 제물론을 온전히 동일한 사상이라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서소약(徐小躍)에 의하면, 노장과 선종의 유사한 사상으로 간주되는 가장 대표적인 예로 장자의 제물론 사상과 승조의 물아동근론을 거론하면서, “그들의 표현이 참으로 같기 때문에 서로 구분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승조의 술어는 비록 장자에 연원하지만 표현하고자 하는 사상, 추구하는 목적, 근거로 삼는 이론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고 단언한다.7)

선종을 대표하는 사상은 역시 돈오(頓悟)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돈오사상 역시 승조가 《불진공론(不眞空論)》에서 말한 “현실이 곧 진리”라고 말한 일상의 선과 관련된다. 그것은 후에 임제가 “처하는 곳마다 주인이 되며, 서는 곳마다 모두 진실하다(隨處作主, 立處皆眞).”라고 한 현실 절대긍정적 태도의 연원이다.

이로써 “평상의 마음이 그대로 도(平常心是道)”라거나, 진리를 깨닫는 것은 노력하고 애써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선종의 독특한 진리관이 수립된다. 이러한, 노장과 선종이 융화하여 이룩한 소위 ‘평상(平常)의 도(道)’는 송대에 이르러 유교의 성리학을 태동하게 한 촉매이다. 곧 ‘평상이 도’라면 일용행사를 떠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도를 구현할 당위, 곧 성리학의 도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8)

5. 결어―사상 문화의 갈등과 융합

중국인 중에도 중국의 전통문화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중국에 대해서 중화(中華)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사막을 건너 인도에 이르러 동경하던 불법을 구한 순례승들에게 중국은 변두리 땅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고작해야 진토(秦土), 한지(漢地)라고 부르는데 그쳤으며,9) 경건한 중국의 승려들이 중국이라고 했던 경우 그것은 중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10)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그 진리성을 인정받게 되자 도교에서는 불교를 이론적으로 논란하기 보다는 불교는 본래 중국의 것이었다고 하여, 서진(西晉) 시대에 도교 측에서는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이 만들어졌다. 곧 중국의 노자가 인도에 들어가서 남방의 오랑캐들을 교화하여 혹은 석존이 되기도 하고, 혹은 석존의 스승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불교 측에서는 위경(僞經)을 만들어 대항하였다.

그중 하나인 《청정법행경(淸淨法行經)》에 의하면 부처님은 3인의 제자를 보내서 중국을 교화하도록 만들었으니 그중 유동(儒童)보살은 공구(孔丘)였고, 광정(光淨)보살은 안연(顔淵)이었고, 마하가섭은 노자였다고 한다. 또 당시대의 부혁(傅奕)은 노장의 깊은 진리를 불교가 훔쳤다고 주장하였다.11)

 또한 송나라 명제(明帝) 태시(泰始) 3년(A.D. 467년) 고환(顧歡)이라는 사람이 《이하론(夷夏論)》을 지어 도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배척한 데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도교와 불교가 같은 뜻이라고 반박하였다. 예컨대 남제(南齊) 시대의 도사인 장융(張融)은 왼손에 《효경》과 《노자》를 들고 바른손에 《소품반야경》과 《법화경》을 들고 죽었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은 마침내 삼교일치론으로 발전하였다.

규봉종밀 선사는 “공자, 노자, 석가는 모두 성인이시며 때를 따르고, 때에 맞추어 가르침을 베풀었으되 길을 달리 했을 뿐, 안팎으로 서로 도와서 중생을 이롭게 한다.”고 하였다. 다만 유교와 도교는 권교(權敎)로서 결국은 불교만이 진리라고 하였다.12) 어떤 사람은 “묻되, 삼교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답하되, 근기가 큰 사람이 쓴다면 같은 것이고 약한 자가 쓴다면 다른 것이다.

대체로 하나의 성(性)에서 용(用)이 일어났으되 근기의 차별에 따라 셋으로 나뉘었으니 같고 다름을 의심하는 것은 사람에 따른 것이지 교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13) 라고 하여, 새로운 차원의 관점을 제시하였다.

도교와 불교는,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상호 교섭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 발전하였다. 이 글에서는 도교와 불교의 교섭을, 탕용동(湯用?)이 말한 바와 같이, 교류의 첫 번째 단계는 상호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같은 점만 보고 조화하는 단계’, 두 번째 단계는, 상호 교류가 진행함에 따라 각자의 특성이 점차 드러나서 ‘서로 다른 점을 보고 충돌하는 단계’, 세 번째 단계는, 상호간에 깊이 이해함으로써 다른 점은 물론 같은 점도 보게 되어 더욱 높은 차원에서 ‘진실하게 만나서 조화될 수 있는 단계’로 구분하였다.

그리하여 초기의 불교 전래와 도교의 만남이 신비주의의 관점에서 이루어졌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상호의 철학적 개념을 이해하는 소위 격의의 방법에 의한 교류가 이루어졌고, 세 번째 단계에서는 서로의 사상적 특성을 수용하면서 각각의 사상적 특성을 잃지 않고 창조적으로 부활한 예를 도교의 내단 사상과 불교의 선종에서 찾아보았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의 사상 체계가 역사를 초월하여 보존되기 위해서는 그 사상 자체의 정체성이 확고해야 하며, 아울러 다른 사상과의 융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최일범 /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유학과 졸업. 동 대학원 동양철학과 석사·박사 취득. 주요 논문으로 〈한국의 윤리사상〉 〈종교대화의 관점에서 본 유교와 불교〉 〈주역선해(禪解) 연구〉〈고려 중기 유불교섭의 철학적 근거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출처 불교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