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 불심은 사심이 없는 중생의 마음이라고 언명됐다. 사심이 없는 마음이라는 말을 많은 정치인들과 공직자들이 즐겨 쓴다. 그러나 그 말은 대개 인기나 득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이 토해내는 수작에 불과하다. 중생들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호오와 친소의 감정을 안가질 수 없다.
불심을 오랫동안 닦아 온 이들도 사회생활에서 요동치지 않고 사심 없는 마음을 그대로 지탱하기가 아주 어렵다. 부처의 마음은 사사로운 생각이나 감정의 기복이 전혀 없다. 오로지 불심은 텅빈 마음에 공공(公共)의 이익을 위한 마음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불심은 중생이 이해하기에 너무 아득하거나 까마득하다는 느낌을 훨씬 덜 갖게 될 것이리라.
우리는 보통 ‘성불하세요’라고 인사말을 하지만, 정작 무엇이 부처인지 생활 속에 그림 그리기가 용이하지 않다. 필자가 대학생 시절에 불교의 진리를 배웠을 때에 그 진리는 공이어서 텅 비어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그 말을 소화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진리는 너무도 오묘해서 쉽게 이해할 수도 없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가르침을 들었다.
아무리 내가 미진한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비록 오묘한 진리라도 미진한 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지성적 인도는 있어야 마땅하고, 그래야만 더 큰 진보가 미래에 담보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지금 생각한다. 부처의 마음(佛心)은 사적인 소유가 전혀 없이 텅 빈 존재이지만, 동시에 공동존재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상태(mentality)이겠다.
인간은 두 가지의 마음(심리상태)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하나는 중생심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불심이다. 중생심과 불심은 인간 마음의 이중성으로서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즉 불일(不一)하고 동시에 불이(不二)한 인심의 이중적 심리구조에 불과하다. 불교도가 갈망하는 성불은 마음속에 있는 중생심을 불심으로 돌리는 심리상태의 대전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불심이나 여래심은 중생으로서의 인간이 아주 가기 힘든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의 드높은 고산준봉을 정복하는 고행의 길이 아니고, 인간의 사고방식을 180도로 전환시키는 마음의 혁명이겠다. 그러므로 부처의 길은 인간 사고방식(mental attitude)의 변혁을 뜻하지, 초월적인 신(神)과 같은 또 하나의 위대한 정신세계(spirituality)의 갈망을 그리워하는 종류가 아니다. 불교는 물질과 정신의 대립을 도모하는 정신주의의 사상이 아니다.
그러면 사고방식의 변혁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소유론적 사고방식에서 존재론적 사고방식에로의 전이를 말한다. 이미 독자들은 앞에서 반복되어 강조된 존재자적 사고방식과 다른 존재론적 사고방식의 뜻을 숙지하고 있으리라. 소유론적 사고방식이 바로 존재자적인 사고방식이고, 존재론적 사고방식은 곧 삼라만상의 공존적 존재방식을 가리킨다는 것도 잘 터득하고 계시리라. 소유론적 사고방식에서 존재론적 사고방식에로의 대전환이 곧 생활 속에서 부처가 되는 길이겠다.
우리는 부처되기의 길을 에베레스트 등정처럼 험난하고 지난한 영웅적 고행의 과정처럼 생각하지 말자. 그 길은 소유에서 존재로 사고방식을 송두리째 바꾸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은 영웅적인 고행의 결과에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겠다.
그것은 고요하면서도 깨어있는 수행의 열매가 스스로 분비하는 과즙과 같겠다. 더구나 사고방식의 대혁명은 자연생활 속에서 홀로 수행하면서 얻어지는 고독의 즉자적(卽自的)인 열매가 아니라, 치열한 욕망이 일어나는 대자적(對自的)인 사회생활의 와중에서 발견되어지기에 더욱 귀중하다. 여기서 ‘즉자적’과 ‘대자적’인 철학용어가 등장했지만, 다음 회에 더 풀어 설명하겠다.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06호 [2009년 07월 14일 1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