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 마음 상태를 철학적으로 즉자(卽自)와 대자(對自)로 나누어 구분했다. 인간이 외부의 자극을 받지 않고 자연 속에서 홀로 있으면 거의 대부분 불심을 간직하게 되지만, 사회생활을 통하여 남들과 엉켜 살게 되면 미음이 소유욕으로 끄달려 울렁거리게 됨으로써 중생의 심리상태를 갖게 된다. 전자가 변증법적 용어로 즉자적인 심리상태이고, 후자가 대자적인 상태라 부른다.
인간은 누구나 대자적인 사회생활을 밟아야 하고, 사회생활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흠결이 많은 중생임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또 스스로 중생임을 자각하는 중생심리가 역설적으로 부처의 존재를 간절히 그리워하게 된다. 중생심이 불심을 향하게 한다.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불심은 깨어있지 않았기에 중생심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즉자적인 마음은 추상적인 단계이기에 구체적인 인간의 마음이 아니다. 불교는 추상적인 담론이 아니고 구체적인 진리론이다. 승찬 대사의 가르침이 이를 입증한다.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출세간의 공인(空忍)에도 머물지 말라. 둘을 한가지로서 바로 지니면, 사러져 저절로 다하리라. 움직임을 그치면, 그침에로 돌아가고, 그침은 다시 큰 움직임이 되나니. 오로지 양변에 머물러 있는 한에서, 어찌 한가지임을 알겠는가. 한가지로 통하지 못하면, 두 곳이 다 공덕을 잃으리라”
나는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연상태의 불심을 발양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이치라고 생각한다. 사회생활은 온갖 번뇌망상이 일어나는 곳이고 불심을 멀리 하는 계기를 주는 곳이라 할지라도, 사회생활을 피하고 자연생활로 되돌아가는 도피적 생활방식이 불교의 본연이고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승찬 대사는 이것을 세간의 인연을 좇지도 말고, 출세간의 공한 법에도 머물지 말라고 말했다.
이 말을 달리 해석하자면, 회생활의 인연에 얽매이지 말고, 출세간의 공한 도리만을 망상하지도 말라는 의미로 읽혀진다. 불교의 수행법은 자연 속에서의 고독한 삶의 추구와 같은 것도 아니고, 세속적 사회생활에의 무의미한 얽매임에 끌려가는 것도 아니다. 불교의 수행은 사회생활을 영위하되, 사회생활이 필연적으로 몰고 오는 인연에 사로잡힌 유연적(有緣的) 소유의식과 소유의식의 중심인 이기배타심에 빠지지 않고, 마치 내가 자연적 즉자존재로서 지니고 있는 불심을 대자적 사회생활에서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승찬 대사는 두 가지를 한 가지로 하는 일종(一種)이라고 불렀다. 사회생활이 없으면, 인간은 구체적으로 인간이 못되고, 구체적으로 인간을 이해 못한다. 사회생활을 구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추상적 수행인은 자연에서 하산하자마자 절망을 느껴 구체적 인간되기를 포기하든지, 자연에서 추상적으로 피어 있는 불심을 구체적으로 간직하지 못하고 금방 오염되어서 타락의 길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를 승찬 대사는 세속적 유연(有緣)과 출세간적 공인(空忍)을 한 가지로 엮으라고 말한다. 이 말은 변증법적 논리로 ‘즉자…대자적 종합’을 뜻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중생이 부처되는 길은 논리적 사유의 종합과 같은 지성적 길이 아니라, 중생의 소유적 심리상태를 부처의 존재론적 심리상태로 확 바꾸는 혁명적 전환에서 가능하다. 지성적 종합도 여전히 소유론적 마음의 태도를 버린 것이 아니다.
산중에서 고독한 삶으로서 수행을 하는 것도 가능하나, 그 수행은 늘 의식 속에 세속의 여러 친지들을 암암리에 염두에 두고 있는 고독의 삶인 것이다. 대중생활을 이미 배제한 고독은 고독으로서 성립하지 않는다. 불교의 수행법은 사회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사회생활이 거의 퍼붓기 마련인 이기배타적인 소유의식 대신에 자연생활처럼 존재론적 양식의 생활방식으로 교체시켜 나가는 것을 익히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어떻게 바꾸나?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1008호 [2009년 08월 03일 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