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사상의 핵심은 중생심은 소유론적이고 불심은 존재론적이라는 구분이다. 소유론적인 생각은 늘 나 중심의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데, 존재론적인 불심의 사유는 나 중심의 사유화(私有化)는 사라지고, 앞의 설명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공동존재의 생각이 마음에 가득 차 있다.
이 공동존재를 지향하는 존재론적인 공동적 사유가 그렇다고 공동체적인 공동소유를 지향하는 공산주의적 이념을 방편으로 응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승찬 대사가 말한 ‘견유몰유(遣有沒有=소유를 버리려고 하면 소유에 빠짐)’는 이미 지적한 바이다. 한자의 ‘유(有)’를 때로는 소유로, 때로는 존재로 번역되는 점을 설명해야 한다.
우리말에서도 마찬가지다. ‘있다’가 때로는 ‘가지고 있다’나 ‘가지다’로 혼융된다. 이 모든 원인은 저 ‘유(有)’자가 사회생활 속에서 중생심이 발동될 때는 소유로 작용하다가, 불심이 움직이면 공동존재의 심리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라는 말이 언뜻 실존적으로 와 닿지 않겠으나, 존재의 뜻은 본디 공동존재의 의미라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공동존재와 공동소유는 전혀 별개의 차원이다. 공동존재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분별적 불심의 차원이므로 개인존재라는 용어는 아예 존재론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이 말은 존재를 존재자로 여기는 자본주의적 소유의식을 가리키는 용어다. 자본주의적 개인소유와 사회주의적 공동소유의 대결은 모두 사회생활에 찌든 중생적 소유의식의 산물이다.
중생적 소유의식은 늘 나 중심의 이기배타적 의식을 사회적으로 머금고 있기에 중생의 소유의식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적 개인소유욕에 적합하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문제점은 중생의 심리적·사회적 소유욕을 한시도 내려놓지 않고, 다만 소유욕의 주체를 개인이 아닌 사회전체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의 소유욕의 주체는 늘 이기배타적인 개인이기 마련인데, 그것을 억압하고 정치권력의 힘으로 사회전체가 공동으로 원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건다. 그 대의명분의 이념적 구실은 경제적 평등실현과 배타적인 반(反)도덕적 이기심의 억압이다.
그러나 경제적 평등이 실현된 이타적 사회의 구현은 늘 허황된 구호에 불과했다. 경제적 평등사회의 실현은 다종다양한 업력으로 살아가는 중생의 조건에 적합하지 않고, 이기심이 억압된 이타사회의 출현도 중생심이 불심으로 환골탈태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꿈이다. 소박한 사회주의자들의 이상이 한 때에 이상적 인간들의 꿈을 덮었지만, 그것은 사려 깊지 못한 유치한 인간들의 망언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판명났다.
세상은 중생들의 이상주의로 바꿔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도덕적 이상주의가 자본주의적 소유주의보다 더 세상을 괴롭히는 결과를 빚는다. 도덕적 이상주의도 역시 일종의 정신적 이상이 지배하는 소유주의다. 자본적 소유주의는 절대선이 아닌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일종의 회한을 담고 있지만, 도덕적 이상주의는 자기가 절대적 선의 입장에 서 있다는 자기 확신에 차 있기에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의 요청으로 더욱 더 자기 확신의 고삐를 죈다.
그래서 더 가혹한 독선의 독기와 전제(專制)를 주위에 흩뿌린다. 사회적 독선과 전제주의적 도덕의식의 깃발이 그래서 더 높이 휘날린다. 공동소유의식은 절대로 불심의 존재론적 공동 마음으로 합일되지 않는다. 불심은 공동 소유의식처럼 말로 잘 표현되고 깃발로서 휘날리지 않는다. 승찬 대사가 『신심명』에서 이를 지적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12호 [2009년 09월 02일 1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