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견해에 머물지도 말고, 삼가 좇아가 찾지도 말라.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 마음을 잃으리라.”
여기서 언급된 본 마음은 앞장에서 언급한 ‘귀근득지(歸根得旨=근본으로 돌아가 마음의 본 뜻을 얻음)’와 같은 시각에서 이해돼야 한다. 마음이 외부의 자극으로 맞고 틀리고 하는 판단과 시비를 일으키면 마음은 그 외부의 자극으로 마음의 본디 성향을 잃게 된다고 승찬대사는 말한다. 우리는 그 마음의 본디 성향을 욕망이라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한국불교의 일반적 가르침과 약간 벗어난 듯한 생각을 개진하였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한국불교는 욕망을 탐욕으로 봐서 그 욕망을 독(毒)처럼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욕망을 그런 독으로서만 생각하지 않는다. 욕망은 세친(世親) 보살의 『유식삼십송』에서도 마음의 작용으로서 긍정적으로 인정되고 있고, 십바라밀에서도 원·력(願·力)바라밀이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욕망에도 마음의 바깥에 있는 것을 취득하려는 소유의 욕망이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 마음이 본디 음식의 재료처럼 스스로 회임하고 있는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을 우리는 존재론적 욕망이라 부른다. 존재론적 욕망은 삼라만상의 모든 중생이 스스로 지니고 있는 자기 존재의 욕망이 스스로 나타내고 있는 힘이다.
원(願)바라밀과 힘(力)바라밀을 보통 합쳐서 원력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다. 흔히 탐욕과 원력을 다른 것으로 분리시키지만, 탐욕은 욕망이 소유론적 방향으로 향하여 마음에 독이 되는 방향으로 흘러 간 것을 말하고, 원력은 욕망이 존재론적 방향으로 향하여 그것이 마음에 약이 되는 방향으로 흘러넘치는 것을 일컫는다고 봐야 한다.
중생심과 불심이 다르지만 결코 이원론적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소유의 탐욕과 존재의 원력이 이원론적으로 갈라지는 것은 아니겠다. 우리가 부처되는 길은 소유욕의 중생심을 완전히 어렵게 분쇄시키려고 애쓰고 또 애쓰는 대신에 그 탐욕심을 원력심으로 교체하기만 하면 된다.
마명(馬鳴) 보살의 『대승기신론』에서 삼신불 사상이 나오면서 석가모니불을 화신불이라 하고, 그것이 곧 체상용(體相用)에서 용례(用例)에 해당한다고 말한 것은 그 까닭이 있겠다. 석가모니불은 인간이 어떻게 그 마음을 사용해야 부처가 될 수 있는가 함을 보여주는 사례에 해당한다. 우리는 마음의 소유론적 사용이 중생심이고, 마음의 존재론적 사용이 불심이라고 했다. 마음의 소유론적 사용은 마음을 자아중심으로 사용하는 것이고, 마음의 존재론적 사용은 자아중심적 마음을 떠나서 존재공동체적으로 마음을 사용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불교의 도(道)는 인간이 생활의 길을 소유론적인 길에서 존재론적인 길로 방향전환을 이룩하는 방편을 알려주는 것을 말한다 하겠다. 소유론적 욕망은 모두 배타적인 본질을 지니고 있다. 이 소유론적 욕망 때문에 의식과 경계의 구분이 생기고, 또 능동과 수동의 양식이 분리된다.내가 능동적이면 바깥 경계는 수동이고, 또 정반대로 바깥경계가 능동적이면 내가 수동적인 입장이 서게 된다. 우리가 사회생활에서 이 소유론적 욕망인 탐욕의 심리를 어렵지 않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러나 존재론적 욕망을 그림으로 그리기 쉽지 않다. 사회생활과 달리 자연생활에서의 모든 생명이 이 존재론적 욕망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을 좀 더 살펴보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1016호 [2009년 09월 29일 1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