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불심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사회생활을 영위해 나갈 것인가를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사회생활은 돈, 권력, 명예, 지식 등과 같은 소유를 상대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거기에 물들지 않고 어떻게 불심을 닦아 나가야 하는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저와 같은 소유들을 외면하고 멀리하면, 그것은 승찬대사가 가르쳐 준 바와 같이 소유를 멀리하면 오히려 소유에 빠지고, 공을 좇으려 하면 오히려 공을 등지는 역설에 빠지는 결과를 빚는다.
불심을 닦는데 마장인 성욕을 사갈시(蛇蝎視)하여 그것을 멀리하면 더욱 그 성욕이 나를 뒤쫓아 온다. 그래서 공의 도리를 추구하여 절대고독을 찾으러 가면, 나는 무기(無記)의 상태에 젖어들어 불심과 까마득히 멀어진다.
사회생활에서 불심을 전파하기 위하여 마치 기독교도가 전교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장사하듯이 팔고 다니면서 천박하게 떠벌리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승찬대사가 묘사했듯이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불심에 상응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불심은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는 곳에 다시 피어나게 된다. 사회생활을 영위하면서 사회적 소유에 끄달리지 않고 불심을 여는 길은 승찬대사의 말처럼 근본으로 돌아가서 뜻을 얻는 즉, ‘귀근득지(歸根得旨)’의 방편이 있을 뿐이다.
“잠깐 사이에 반조(返照)하면, 앞의 공함보다 오히려 뛰어남이라. 앞의 공함을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 망견에서 오는 것이로다. 진리를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不用求眞 唯須息見).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 잠깐이라도 시비(是非)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 마음을 잃으리라.”
사회적인 소유를 버리고 공을 추구하려고 하면 그런 태도는 오히려 ‘귀근득지(歸根得旨=근본으로 되돌아가 뜻을 얻게 됨)’의 방편이 안 된다. ‘소유를 버리고 공을 추구하는 것(遣有從空)’은 이미 마음이 소유와 공을 대상화해서 그것들에 관하여 이미 왈가왈부적(曰可曰否的)인 말과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셈이다. 대상적인 소유와 비대상적인 존재와의 차이점은 전자가 시비를 풍성하게 불러오고, 후자는 말과 생각을 다 끊어버린 ‘절언절려(絶言絶慮)’의 상태와 같다는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돈, 권력, 명예, 지식 등을 멀리 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 등을 가까이 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유론적인 사고방식이다. 멀리 하려고 한다는 것과 가까이 하려는 것은 모두 소유론적인 사고방식과 이웃하기에 그것은 존재론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다.
소유를 멀리하려는 생각도 버리고, 공을 가까이 하려는 생각도 역시 두지 않고, 그냥 진리를 구하려는 뜻마저 두지 않는 그런 마음의 자연적 상태가 마음의 근본으로 되돌아가 뜻을 얻게 되는 귀근득지(歸根得旨)의 경지라는 것이 승찬대사의 가르침이다. 득지를 우리는 성철 큰스님의 번역에 따라 ‘뜻을 얻음’이라고 옮겼다.
그런데 ‘지(旨)’는 음식재료의 맛처럼 재료가 안으로 스스로 안고 있는 맛이나 뜻을 일컫는다. 마음의 속뜻이나 마음이 안으로 안고 있는 뜻은 마음의 존재가 무엇을 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음이다.
인간을 포함하여 동식물의 마음의 속뜻은 무엇을 하려는 의지다. 의지가 바로 욕망이다. 식물이 해를 향하여 키가 커지고, 동물이 네발로 달리고 싶은 것은 동식물의 마음이 그런 욕망의 뜻(旨)을 본디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욕망이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차이점은 전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사회적으로 해석하는 일이다. 한국불교는 이런 대승적 적극성과 사회성이 아쉽다.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14호 [2009년 09월 15일 1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