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자에서 무신론의 삶 전환 천사 -악마 이분법 넘어 해탈 지향 지배 대신 존재하는 ‘반 철학’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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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따이유는 기독교 신학이 너무 일방적으로 세상을 빛의 밝음으로 수렴하려는 조급함을 비판하면서 불교처럼 세상을 여법하게 보려는 사유를 사랑했다. |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조르쥬 바따이유(Georges Bataille)(1897~1962). 한국에서 그의 이름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단히 영향력이 있는 사상가 정도로 약간씩 기억되고 있다. 그는 철학자들의 정규적인 학문형성 코스를 밟지 않고, 상당히 이단아적인 길을 개척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 행각은 그가 일찍부터 정규 학교코스를 밟기가 어려웠던 가정환경 탓에 기인한 것 같다.
그의 어머니는 우울증으로 여러 번 자살을 기도했던 것 같았고, 그가 사랑하는 아버지는 몸이 병약했고 매독성병으로 고생하다가 작고한 것으로 보인다. 바따이유는 지병인 폐병으로 투병생활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씩이나 결혼생활을 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은 뒤에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라깡의 부인이 되었다고 한다. 철학적으로 그의 사상은 전통철학을 다 부정하고 파괴하는 해체주의적 길을 갔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의 길에서 돌연히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의 극치에 들어섰고 정신분석을 통하여 초현실주의와 니체에 몰입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상은 어떤 계보를 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사상은 대단히 현대적으로 중요한 것을 논하고 있다. 즉 그는 철학자로서 철학을 파괴하고 해체하는데 앞장을 섰다. 그가 본 서양철학은 고상한 이성의 입장에 서서 늘 고결하고 논리적이고 아름다운 것만을 정리하고 정돈하는 로고스의 학문이었다. 그런 입장을 천명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 서양의 기독교 신학이었다.
전통철학 파괴하는 해체주의
그가 『비(非)신학대전(La Somme a-théologique)』이라는 3권의 저서를 쓴 것은 기독교적 신학의 차원에서 세상을 한쪽으로만 보게 하는 철학과 문학이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반(反)로고스의 사상, 즉 반이성의 사유를 신비적으로 좋아할 만큼 경도되어 있었다. 그가 반대한 기독교적 세상보기는 너무 일변도적이어서 성스럽고 고상하고 점잖은 쪽으로 치우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절대자인 신은 오줌 누고 똥 싸는가? 그 절대자의 시종(侍從)으로 생각을 맞추어 온 서양철학은 인간을 연구하면서 인간이 의미 있는 말을 하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위대하게 교감하는 것을 즐겨 이야기 해 왔었지만, 인간이 더럽고 악취나는 것을 배설하고 남녀의 성교를 미친 듯이 갈망하여 쾌감을 추구하고, 욕설도 거칠게 던진다는 것을 앞마당에서 공공연히 말해 왔는가? 바따이유는 서양철학이 반쪽만을 크게 말하고, 나머지 반쪽을 감추거나 숨긴 것을 풍자하면서, 이런 사상은 특히 헤겔에게서 완성되었는데 전체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으로서의 철학이라고 일렀다.
그리고 바따이유는 특히 자기류의 사상을 ‘외설학(scatologie)’이라고 자칭했다. 외설학은 헤겔의 체계적인 신학과 대비되었다. 헤겔의 철학은 노동에 대한 신학적 의미의 집대성이고, 이성과 가능성의 총화고, 절대적 지식임에 비하여, 자기의 외설학은 비신학적이며 무의미한 놀이의 자궁이고, 이성을 웃기는 조롱이자 가능성의 한계이고, 절대적 지식의 엄숙함에 저항하는 찌꺼기의 오물과 같다고 여겼다. 이런 그의 사유에 가장 가까운 분이 니체다. 그는 니체를 가장 좋아했다.
아름다운 꽃은 더러운 거름의 소산
기독교 신학이 너무 일방적으로 세상을 빛의 밝음으로 수렴하려는 조급함을 비판하면서, 그는 불교처럼 세상을 여법하게 보려는 사유를 사랑했다. 그는 기독교적 이성학을 가장 웃기는 놀이라고 보았다. 기독교는 이성의 승리와 함께 죽음을 넘어서는 삶의 영광을 노래하지만, 에로티시즘은 오히려 죽기 위하여 남녀가 합일하는 쾌락의 역설을 말한다. 에로티시즘은 기독교적 구원과 정반대의 실상이다. 에로티시즘은 죽기 위하여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는다. 삶의 본능과 함께 죽음의 본능이 세상에 있다. 그는 철학을 파괴하였다.
그는 헤겔의 노동철학이 세상에서 웃음을 배제한 반(反)놀이의 철학이라며 조롱하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철학자가 에로티시즘에 젖어 그 세계에 몰두하는 장면을 연상하면서 웃을 수밖에 없는 세상읽기를 폭로했다. 이성의 철학은 동일성의 강요와 같다. 헤겔이 말한 이성과 현실성의 동일화가 동일성의 철학에 대한 본질인 셈이다. 의미의 이타성(異他性)은 무의미에 해당하므로 이성의 신학은 무의미를 용납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신학과 헤겔의 철학은 다르게 생각하는 여유가 없고 거기에 웃음이 빠져버렸다.
이타성은 이성의 적이고 무질서에 해당한다. 바따이유의 외설학은 놀이와 시(詩)와 웃음과 에로티시즘과 배설물을 귀하게 여긴다. 그는 순교자의 미학이 잔혹의 더러움을 떠날 수 없는 것은 꽃의 아름다움이 그 뿌리에 거름의 오물냄새를 벗어날 길이 없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꽃을 단지 낭만적인 아름다움만으로 상상하는 것은 소녀의 유치한 감상과 같다. 꽃이 아름답기 위하여 거름을 만드는 오물의 순간을 잊어서는 안된다. 죽기 위하여 합일하는 에로티시즘의 세계는 음식물의 맛이 먹히기 위하여 조리되지만, 또한 버려지기 위하여 무질서의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죽음과 성욕의 시간과 다르지 않다.
삶과 의미와 노동과 구원만을 생각하는 사상은 늘 어떤 한계와 제한을 강력하게 둔다. 그 한계를 정돈의 마음으로 지킨다. 그러나 놀이하는 인간은 그 한계와 제한을 위반한다. 그 위반에서 예술이 탄생된다고 본다. 인간의 무의식에서 질서와 정돈을 지나치게 숭상하고 외설적인 이타학을 증오하는 인간은 성스러움의 표면적인 의미만을 알고 그것의 이면적인 것을 지우려는 어리석은 인간에 비유된다. 모든 성스러움은 벌써 이타적인 위반요소를 머금고 있기에 성스러움은 더럽혀지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역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반철학으로서의 외설학은 절대적인 철칙으로서의 성스러움의 규칙을 잘 내걸지 않는다. 원효대사와 경허대사는 그 철칙을 무시했다. 그 순간에 그들은 도덕적 인간의 좁은 한계를 부쉈고 세상을 여여하게 안은 마음이 되었다. 두 분 스님들은 우주의 허공처럼 깨끗함과 오물을 다 함께 포괄하는 빈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한 곳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렸다.
수준 낮은 사람들이 바따이유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제한적 도덕의식에 아주 가득 젖은 이들은 그를 기독교적 의미의 악마학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그는 이미 천사학과 악마학의 이분법을 넘어서 있다. 그의 사유는 이성적으로 안다는 것을 넘어서 있다. 안다는 것은 말로서 세상을 샅샅이 쪼개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지식이 세상을 분석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세상을 지배하고 정돈하는 것임을 말한다.
바따이유는 의식으로서의 인식하는 주관과 대상으로서의 인식된 경계를 극복하고 자연의 지배자로서 군림하기를 거부한다. 여기서 그의 사유는 불교처럼 이원론적 세상보기를 거부한다. 그가 『내면적 경험(L'Expérience intérieure)에서 기술하였듯이, 그의 비(非)신학적 대전(大全)인 외설학은 반(反)철학론인 배설학을 넘어서 불교적 의미의 해탈학으로 나아간다. 서구적 신학과 지식론의 굳은 테두리에 갇혀 살아온 바따이유로서는 일단 저런 반항의 힘으로 이성적 철학을 붕괴하고, 인간을 자연 속에서 해탈케 하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겠다. 그는 스스로 해탈하는 길을 찾기 위하여 ‘바보고 미치광이’라고 불렀다.
해탈은 신의 부재같은 걸림없는 감정
그가 그리는 해탈의 경험은 서양 신비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초월의 경험을 의미하지 않는다. 해탈의 경험은 신비주의 신학에서처럼 제한적 한계를 벗어나는 새로운 저 너머의 초월적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아예 일체의 한계를 느끼지 못하면서 단박에 허허롭게 걸림이 없는 신의 부재와 같은 감정이다. 초월은 절대자로서의 신(神) 속에서 절대지의 가능한 지배권(maîtrise)에 접속된 것을 상징하지만, 초탈은 신의 부재 속에서 일체의 소유의지를 벗어난 지상권(souveraineté)을 상징한다.
그동안 서양의 철학은 이 세상을 소유하기 위한 지배권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세상에 대한 기술적, 정치적, 경제적 모든 지배권의 장악이 철학의 모든 기능을 의미했다. 그러나 바따이유는 이제 반철학으로서 자신의 비신학(a-théologie)은 세상의 지배학이 아니라, 세상을 가장 최고의 높은 수준에서 자유스럽게 놓아두는 지상권의 향유라고 여겼다. 지상권의 향유는 자연스럽게 보시하고 주는 너그러움의 행위를 말한다.
지상권의 사유는 태양처럼 무한히 보시하고 주면서 쏟아 붓는 사유에 비유된다. 자연의 행위는 모두 태양의 행위를 닮아서 대가없이 쏟아 붓는다. 식물과 동물이 서로에게 무한히 필요한 산소와 탄산가스를 준다. 일종의 무한교환이 오고간다. 인류학적 의미의 포트랏치(potlatch)가 생긴다.
이것을 바따이유는 일반경제(l'économie générale)라고 불렀다. 경제는 교환의 행위를 말하는데 일반적이라는 어휘는 제한이 없는 무제한의 교환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와는 반대로 인간사회의 교환은 지배를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제한경제(l'économie restreinte)라는 것으로, 지상권의 사유를 바따이유는 데까르뜨적 코기토(cogito=나는 생각한다)와 다른 지상적(至上的) 코기토(le cogito souverain)라 불렀다.
이런 지상적 코기토를 바따이유는 ‘내면적 경험’(l'expérience intérieure), ‘가능성의 극한’(l'extrême du possible), 또는 ‘명상’(la méditation)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이 불교의 참선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좀 더 공부해 봐야 하겠다. 아무튼 그는 이런 경험을 지고로운 ‘존재의 자유’(la libertê de l'être)라고 말했다. 이것은 해탈의 자유와 다른 것은 아니겠다.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김형효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벨지움 루벵대 철학최고연구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비롯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 한국학대학원 대학원장, 루벵대 철학최고연구원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사상산고』,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 『원효의 대승철학』 등 다수가 있다.
출처 법보신문 1015호 [2009년 09월 22일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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