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찬대사의 『신심명』을 먼저 읽어보자. ‘자성에 맡기면 도에 합치하여, 번뇌가 끊어진 데서 소요하고, 생각에 얽매이면, 참을 어겨서 혼미해서 좋지 않느니라. 좋지 않으면 신기를 괴롭히거늘 어찌 성기고 친함을 쓸 것인가? 일승(一乘)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六塵, 사바세계의 모든 것)을 미워하지 말라.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각(正覺)과 동일함이라.’
의식과 달라서 우리의 마음에는 자연이 부여한 신묘한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이 곧 본성이다. 동식물에는 본능이라는 그런 능력이 있어서 그 본능이 살아가는 그들의 지혜를 동식물답게 부여하고 있다. 동식물들에 본능이 자연적이듯이, 인간에게 저 본성인 불성이 지극히 자연스런 도(道)다. 그런데 동식물들에게는 본능적 삶이 너무 에누리 없이 잘 진행되는데, 인간에게 왜 저 자연스런 불성의 삶이 저절로 표출되지 못할까?
그것은 인간의 자의식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처럼 본능적 힘으로 살아가는 힘이 모지라서 사회적 집합을 이루어 서로 의지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각자의 자의식이 충돌을 필연적으로 일으킨다. 자의식과 타자의식은 동시적으로 생기는 의식의 이중성이다. 자의식이 타자를 지배하기 위하여 꾀와 술수를 찾는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이기기 위하여 교활해진다.
부처님의 길은 간단하다. 사회적 지능의 힘을 자연적 자성(=본성=불성)의 힘 아래에 두고 자성의 빛을 막아 왔었던 그 지능의 덮개를 걷어 내는 것이다. 불교는 결코 반지성주의가 아니다. 다만 자성의 빛을 흐리게 하는 자아주의, 객관주의, 소유주의의 사고방식을 조장하는 지성을 닦아내는 것을 기도할 뿐이다.
자성의 빛을 받아 조명된 새로운 지성의 철학과 논리는 존재론적 사유를 기본으로 생각한다. 존재론적 사유는 소유론적 사고방식과 그 철학을 멀리한다. 재래의 과학과 논리는 다 소유론적 사고방식을 주축으로 삼고 있다.
존재론적 사고방식은 승찬대사가 말한 ‘일승(一乘)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일승적 사고방식은 주객으로 나누는 의식적 사고, 선악으로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고, 호오를 판가름하는 감정주의적 사고 등을 지양하는 것을 말한다. 존재론적 사고방식은 명사적 존재자들로 쪼개서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버리고, 이 존재자들을 전부 존재하는 동사적 생각 안에 넣어서 한꺼번에 포용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구름도 존재하고, 태양도 존재하고, 인간들도 존재하는’ 등의 말은 존재가 개별적으로 쪼개지지 않고 일승으로 함께 타고 있음을 뜻한다. 존재론적 사고방식은 일승의 사고방식이고, 또 그 사고방식은 이 육진의 사바세계를 더럽다고 여겨 미워하지 않는다. 이 육진의 사바세계를 단지 존재하는 사실 그대로 바라보는 마음은 자성(본성=불성)이 고요하게 마음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공하다고 여기는 정각(正覺)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몸이 바깥의 육진세계를 존재론적인 일승의 사고방식으로 여여하게 바라봄은 마음이 자기 자성을 존재자적인 어떤 실체로서 보지 않고 텅 빈 공으로 생각하는 도리와 어긋나지 않는다. 존재론적 사고방식은 가이없고, 무한하고 무량하며, 깊이를 측량할 길이 없는 공의 도리와 같은 차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존재론적 사고방식은 하이데거가 가르친 바와 같이, 존재자적 사고방식과 다르다. 존재자적 사고방식은 어떤 명사적 개념(=존재자적 개념)을 형이상학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철학은 모두 형이상학을 다 존재론이라 칭했으나 그것은 큰 오류였다.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26호 [2009년 12월 08일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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