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심리학계도 불교계와 비슷 삼빠자나, 알아차림 해석은 무리
서구 불교심리치료의 핵심개념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 및 ‘사띠(sati)’의 번역과 이해를 둘러싸고 동방대학원대 교수이자 한국명상치료학회장인 인경 스님과 김재성 서울대학원대 교수가 열띤 지상논쟁을 벌였다. 이어 자비선 명상센터 지도법사 지운 스님, 임승택 경북대 철학과 교수, 안양규 동국대(경주캠) 불교학부 교수 등이 이번 논쟁과 관련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가운데 이번에는 청주대 강사인 이필원<사진> 박사가 사띠와 마인드풀니스에 대한 기고문을 보내왔다. 이필원 박사는 일본 북쿄대학에서 아라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아라한개념의 발전과 전개’ ‘숫따니빠따에 나타난 번뇌론과 수행론 고찰’ ‘일래(一來)에 대한 고찰’ 등 논문과 『붓다와의 대화』 등 번역서가 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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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하지권 |
현대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에 대한 인경스님의 문제제기가 초기불교 사띠(sati)의 번역문제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학자들마다 바라보는 시각과 근거가 다르다 보니 다양한 이해가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입장에서의 검토는 결국 한국 불교학 발전의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집단번역이 아닌 개별 번역이 주로 이루어지고 있는 풍토에서 이러한 공개적 논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해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필자는 우리와 같이 번역의 문제를 안고 있는 일본의 예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일본은 이들 용어를 어떻게 번역하고 있을까? 이것을 살펴보는 것도 우리에게는 좋은 참고가 되리라 본다. 먼저 일본의 대표적인 불교학자들의 사띠 번역과 심리학자들의 마인드풀니스 번역 및 이해를 살펴보고, 필자의 입장을 밝히고자 한다.
일본의 불교학자들은 사띠를 번역함에 있어, 크게 네 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첫째 염, 둘째 기억, 셋째 주의, 넷째 알아차림이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사이구사 미츠요시(三枝充悳, 1978) : 바른 생각(正しいお念い) ②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 1984) : 잘 주의하는 것(よく気をつけること) ③ 아라마끼 노리토시(荒牧典俊, 1986) : 있는 그대로 지금 여기의 존재를 자각하는 것(あるがままにいもここの存在を自覚すること) ④ 타나까 쿄쇼(田中教照, 1993) : 잘 주의하는 것(よく気をつけること) ⑤ 나미까와 타카요시(並川孝儀, 2005) : 바른 자각(正しい自覚) ⑥ 이우에 위마라(井上 ウィマラ, 2005) : 알아차림(気づき) ⑦ 후지모또 아끼라(Hujimoto Akira, 2006) : 사띠는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어떤 것을 지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불교 명상 수행으로, 통찰 명상(vipassanā-bhāvanā)라고도 한다.
위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우이하쿠쥬, 미즈노코겐, 쿠모이쇼젠, 카타야마 이치로 등이 한역어 염(念)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이구사의 용례는 ‘기억’의 측면이 강하고, 나까무라와 타나까는 ‘집중’의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 아라마끼와 나미까와는 ‘있는 그대로의 자각’을 말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자각’은 ‘알아차림’에 해당한다.(이 부분은 필자가 직접 선생들에게 확인한 바이다) 후지모토 역시 동일하다. 다만 다른 학자들과 다른 점은 사띠 수행을 위빠사나 수행과 명확하게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우에는 『입출식념경(Ānāpānasati sutta)』을 『호흡에 의한 알아차림의 가르침-빨리 원전 「아나빠나사띠 숫따」』(『呼吸による気づきの教え―パーリ原典 「アーナーパーナサティ・スッタ」』)로 번역하면서,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하고 있다.
다음으로 일본 심리학자들의 번역을 소개해 본다. 이들이 번역한 것은 사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마인드풀니스명상(mindfulness meditation)에 대한 번역이다.
① 안도 오사무(安藤治, 2003) : 위빠사나 명상에서는 고통과 열감 등의 신체감각이든, 다양한 감정과 사고 등의 정신내용이든, 의식된 내용 각각을 그것이 어떤 것이라고 해도 단순히 무시하는 방법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거나, 선택하거나, 주의를 고정하지 않고, 단지 발생하는 대로, 지나가는 대로, 관찰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다. 즉 위빠사나의 목적은 집중이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자신의 정신 프로세스(과정)를 보다 명석하게 아는 것, 혹은 순간순간에 대한 알아차림을 키워, 어떤 종류의 통찰을 얻는 것에 중점이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안도의 경우, mindfulness meditation을 vipassanā meditation과 동일시한다).
② I & U(심리상담센터) :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란 ‘잘 살피다, 주의하다’라는 의미이다. 동작, 호흡, 생각 등에 대해 판단이나 평가를 하지 않고, 끊임없이 관찰하는 명상법을 마인드풀니스명상이라고 한다.…마인드풀니스 명상은 집중을 통한 긴장완화형 명상이 아니라, 통찰형 명상이다. 즉 체험되는 여러 현상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일체의 해석이나 판단을 하지 않고, 주의 깊게 살펴보는 명상법이다. (http://www.iu-therapy.com/topics/mindfulness.html)
안도 오사무 선생은 일본의 대표적인 불교심리학자이다. 그리고 아이엔드유는 도쿄소재의 심리상담센터이다. 후자의 경우는 ‘주의’라고 하는 측면을 특히 강조하고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안도 오사무의 견해와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입장은 일본의 초기불교 전공자들의 입장에서도 아라마끼, 이우에, 나미까와, 후지모토 등의 이해와 정확히 일치한다. 비록 그들이 사띠와 위빠사나를 엄밀하게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일본 불교학계의 연구결과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불교학자 역시 사띠에 대한 번역은 제각각이다. 그러나 대체로 ‘알아차림’이란 의미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다. 그리고 심리학계의 마인드풀니스 명상의 이해는 위빠사나와 동일시하는 측면이 강하면서 그 의미는 역시 ‘알아차림’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생각된다. 본 글에서 불교학자들이 왜 사띠를 염, 기억, 주의, 알아차림 등의 번역어를 택했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논하는 것은 지면상 생략한다.
그럼 이제 필자의 견해를 밝혀보고자 한다. 필자는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경전상에서 특히 『숫따니빠따』(768, 916, 1111게송 등)의 내용을 보면 사띠는 ‘의식작용’이나 ‘판단작용’, ‘사유작용’의 특성이 없는 것으로 설해지고 있다.
둘째, 사띠-삼빠자나(sati-sampajāna)의 이해이다. 김재성 교수는 삼빠자나를 ‘알아차림’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알아차림은 판단작용이나 인식작용에 앞서 일어나는 인지작용에 해당한다. 한편 삼빠자나라는 단어는 문법상 sam-pa-√jñā(알다)로 분해가능하다. sam과 pa는 모두 동사어근을 강조하는 접두사로서 동사 자나띠(jānāti)를 강조하는 말이다. 자나띠는 인지동사로 명확한 경험을 근거로 한 참된 지식이나 이해를 나타내는 동사이다. 이 동사에 접두사 pa가 붙으면, ‘수행의 특별한 경험을 통해 있는 그대로 알다, 이해하다(Jan. T. Edgardt, 1977)’란 의미가 된다. 한역에서 삼빠자나를 정지(正知)로 번역한 것은 이러한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알아차림의 뉘앙스로 해석하기에는 그 단어가 갖는 적극적 의미가 너무 강하다. 또한 『입출식념경(Ānāpānasati sutta)』의 내용을 보더라도, 삼빠자나를 알아차림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비구는…면전에 사띠(sati)를 확립하고서 앉아 있다. 사띠를 갖춘 상태에서(sato) 그는 들이쉬고, 내쉰다. 길게 들이쉬면 ‘나는 길게 들이쉰다.’라고 분명하게 인식한다(pajānāti).
여기서 빠자나띠(pajānāti)는 삼빠자나와 동일한 의미이다. 다만 후자가 ‘sam’이라고 하는 접두사가 붙은 명사로 변한 것뿐으로, 문법상 의미의 차이는 없다. 이 문장은 사띠를 확립한 채 호흡을 하면 호흡에 대한 삼빠자나가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다만 사띠-쌈빠자나를 호흡에 적용하여 길게 풀어서 표현한 것뿐이다. 여기서 빠자나띠는 호흡에 대한 분명하고 명확한 인식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사띠(알아차림) 뒤에 삼빠자나(명확한 앎, 인식)가 일어나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숫따니빠따』 1041 게송에서 원초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앞서 든 후지모토에게서도 확인된다.
후지모토의 경우 사티에는 명확한 지각(sampajāna)이 언제나 뒤따른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사띠의 속성상 ‘알아차림’에서 끝나지 않고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명확하고 분명한 ‘앎’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래야 이른바 대상이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인식되는 통찰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이 관계는 해탈과 해탈지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말은 빨리어로 ‘vimuttasmim vimuttam iti ñānam hoti’(MN. I, p.38 ; AN. I, p.167 등), 한역으로는 ‘已得解脫, 生解脫智’(『장아함경』(T1, 12a ; 『증일아함경』 T2, 563c 등)에 해당한다. 이 구절은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라고 하는 해탈지(智)가 생긴다’는 말이다. 해탈은 해탈한 상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온전하게 해탈했다는 분명한 앎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는 의미이다.
사띠 역시 ‘알아차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태가 일어났음을 분명하게 자각하는 ‘앎’을 일으키는 것으로 이해된다(사띠가 단독으로 쓰일 때에도 삼빠자나의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통찰이 생기는 것이다. 필자는 바로 이러한 특성 때문에 사띠가 위화감 없이 위빠사나 수행체계에 편입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띠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이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고 본다.
또한 사띠는 『숫따니빠따』와 같은 최고층 경전에서부터 독립된 수행으로 중요시되었다. 그리고 사선(四禪)체계에서의 중요성은 가히 절대적이다. 그러나 수행의 다양화와 더불어, 사띠는 다른 수행 덕목과 더불어 하나의 체계 속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오력(五力 : 신뢰, 노력, 알아차림, 선정, 지혜)을 들 수 있다. 오력에서 ‘알아차림’은 보다 깊은 선정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지만, 삼보에 대한 깊은 신뢰와 노력(정근)을 통해 확보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노력이 ‘알아차림’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이 확고해 질 때, ‘알아차림’에 의한 번뇌의 제어 및 소멸이 가능해질 것이다. ‘알아차림’ 수행에 반복적이며 지속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것은 그것이 수행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알아차림에 번뇌를 제어하거나 소멸하는 힘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출처 법보신문 1036호 [2010년 02월 17일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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