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서해의 천안함 침몰 사건에서 함수에 타 있었던 장병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불의의 재난에서 서로 상부상조하여 전우애로 목숨을 함께 건진 사건은 불성이 어떻게 인간의 마음에 대승적으로 솟아나는가를 웅변으로 입증한 사례라 하겠다.
죽음이 찾아오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중생은 여우같은 의심으로 회의해 보기도 하고, 학자들처럼 이것저것 사량해 보기도 하는 그런 한가한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다. 부처가 곧 중생이라고 하는 가르침은 중생의 마음속 한 복판에 부처의 마음이 동시에 깃들어 있지 않아서는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부처의 마음은 중생의 마음에서 그냥 치솟아나야 한다.
부처의 마음은 조금씩 닦여지는 것이 아니라, 일시에 치솟아나는 것이다.
죽음이 중생을 덮칠 때에, 중생심은 사라지고 중생심이 불심으로 순간적으로 확 바뀐다. 절박한 순간에 그런 급변한 변화가 일어난다 하겠다. 죽는 순간에 보통 중생들이 탐욕을 늦게서나마 다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절명의 순간에, 그는 중생의 욕심에서 부처의 존재론적 마음으로 달라진다.
『신심명』의 글로 되돌아간다.
“여우같은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바른 믿음이 고루 발라지며, 일체가 머물지 아니하여, 기억할 아무 것도 없도다. 허허로이 밝아 저절로 비추나니, 애써 마음 쓸 일이 아니로다(虛明自照 不勞心力). 생각으로 헤아릴 곳이 아님이라, 의식과 망정으론 측량키 어렵도다.”
군함이 침몰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혼자 살기 위하여 달리 도망갈 길이 없다. 그리고 옆 전우가 위기에 몰린 비명의 소리를 듣고 외면해서 고개를 돌릴 수 없다. 여기서 나 홀로라는 중생심이 우리 모두라는 불심으로 탈바꿈한다. 이 순간에 여우같은 의심이나, 온갖 사량심이 발동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 다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밖에 없다. 그 생각 앞에 일체의 지나간 기억이 존립하여 자기주장을 할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오로지 단 하나의 염원이 존재할 뿐이다. 다 같이 살아남아야 한다.
그 염원은 모든 다른 생각과 사량을 다 끊은 허허로운 마음이 스스로 비춘 것이지, 마음이 애써 노력해서 그렇게 마음을 다듬어 놓는 것이 아니다. 대승적 일승으로 불심을 일시에 일으키는 것은 인위적이고 당위적인 도덕적 자각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공동체적으로 한 마음, 한 뜻으로 다른 방도가 없는 절실한 심정이 우리의 마음을 부처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
자식의 무사안녕과 성공을 부처님 전에 비는 어머니의 마음이 중생의 마음으로서 가장 부처님의 근처에 간 절실한 마음이겠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내 자식만의 안녕과 성공을 바라는 이기적 동기가 은근히 깃들어 있다. 거기엔 공동체적인 일심의 허허로운 마음(虛心)이 없다. 우리 불교는 마음을 비우라고 자주 말한다. 그러나 마음 비우기가 결코 쉽지 않다.
어떻게 마음을 구체적으로 비우나? 승찬 대사의 가르침처럼 애써 마음을 비우려고 하는 일은 다 헛일이다. 중생의 간절한 발심은 다 이기적 동기에서 출발한다. 이 이기적 동기의 간절한 발심을 자리적이고 이타적 동기의 발심으로 바꾸기만 하면, 우리는 부처님의 길로 향한다. 이것이 불국토로 가는 길이다.
마음 비우기는 나의 간절한 이기적 발심을 우리의 공동체적 자리이타적 발심으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상인의 간절한 이기적 발심인 돈 벌고 싶은 욕심을 내가 돈을 벌면서 사기 치지 않고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짓을 하겠다는 발심으로 전향하면, 그는 분명히 부자상인이 되고, 또 시장 속의 부처로서 세상을 복락되게 할 것이겠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출처 법보신문 1046호 [2010년 04월 27일 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