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의 종교성
100년 전의 유럽이나 미국 같았으면 사회주의자들을 공격했을 때에 가장 자주 써먹곤 했던 수법은 그들이 "무신론자"이었다는 점을 강조해 "신의 적"으로 만든다는 것이었죠. 대다수가 아직도 교회를 충실히 따랐던 당대의 구미 사회 같으면 이와 같은 비판은 - 특히 종족/종교 집단 별로 이민자들이 조직되곤 했던 미주에서는 - 먹혀들어갈 수도 있었죠. 1914년에 제1차 대전이라는 대살육이 시작됐을 때에 집총을 거부한 극소수의 열사들 중에서는 전통적 평화 교회 (안식교, 퀘이커교 등) 교인과 사회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이 같이 대오를 형성했을 때에 이와 같은 비판의 맹점은 사실 처음으로 드러났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이 성서에서 이야기되어지는 "신"을 믿었던 말던 일단 아무런 정당한 이유도 없이 국가의 명령대로 사람 죽이기를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죠. 진정한 의미의 종교인들처럼. 그러기에 1920년대부터 미국의 진보적 카톨릭이나 개신교도의 일부가 상당부분 사회당 운동과 겹치는 운동을 하게 된 것이고, 1933년부터 Catholic Worker Movement 같은 사회주의적 색깔의 종교 운동 단체들도 생겼어요. 한국 같으면, 이와 같은 세계적 추세는 아주, 아주 뒤늦게 1970년대의 민중신학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일반적" 교회나 사찰,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사회주의자들을 마치 종교의 반대편에 서는 사람들로 오해하고 있는데, 이게 아주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종교성의 기저 중의 하나는 절대자와 개체의 "직접 소통"에요. 세속적인 사고 방식의 입장에서는 세속적 의미의 전체, 즉 소위 "국가"나 "사회", "회사" 등이 개인에게 원칙적으로 부도덕한 일을 교사해도 이를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야 해요. 국가가 "적군을 살해하라"하면 전장에서 그렇게 해서 나중에 훈장이나 받아 가슴에 달아야 되고, 회사에서는 "회장님의 어록 공부", "사가 제창", "집단 극기 훈련", 그리고 동료를 짓밟으면서 무한한 "충성 경쟁"하는 것을 명령해도 이것도 "사회적 도리"라고 해여 그대로 해야 하는 것에요. 역시 가족에서 남편이 부인에게 정조를 지키면서 아이를 "영재"로 키우는 걸 바라고 부인이 남편에게 "크게 출세"하여 "돈 벼락" 맞을 것을 바라는 것도 세속의 당연지사에요.
그런데 진정 하나님을 면전에서 보거나 붓다의 가르침을 따를 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국가, 사회, 회사, 가정 등등은 마몬의 미혹 내지 악마파순의 시달림에 불과해요. 국가로부터 총살 당하면 당하지 국가의 지시대로 남을 죽이지 못하는 것도 종교인이고, 무푼쟁이로 살면 살지 "회장님의 어록"을 봉독하고 "성공한 도둑"의 명을 체질상 따를 수 없는 것도 종교인이고, 혼자 살면 혼자 살지 가족의 집단 이기주의 분위기에서 "출세"와 "영재 교육"에 올인할 수 없는 것도 종교인에요. 신을 볼 줄 알고 "나" 안에 내재돼 있는 불성을 감지할 줄 아는 이에게는 국가, 회사, 가정 따위의 사회적 창작물들은 방해이거나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죠. 사유는 약간 다르지만, 사회주의자의 입장도 마찬가지죠. 계급사회의 파생물로서의 국가, 기업, 가정의 생리를 체계적으로 알기에, 이들에 대한 "충성"을 바칠 일은 없어요. 서로 사유는 조금 달라도 결론은 같아요.
그리고 사유는 정말 그렇게까지 다른가요? 종교인은 마몬 숭배나 만연한 "지상의 도시"가 파산하여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거나, 예토가 정화돼 탐진치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정토가 지상에서 건설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고, 사회주의자는 물화된 노동으로서의 자본이 더 이상 지배하지 않는, 노동이 해방됨으로써 지배와 복종, 탐욕과 타율적 규율, 경쟁과 적대심이 사라질 신사회를 원하는 사람들에요. 설명의 방법은 약간씩 다르지만, 결국 양쪽에서 간트가 이야기한 "reich der zwecke" ("목적의 왕국" http://www.textlog.de/33192.html)가 실천되기를 원할 뿐이죠.
마르크스의 뛰어난 설명대로, 사람이 도구가 아닌 목적이 되는, 그러한 사회가 만들어지기를, 종교인도 사회주의자도 공히 염원해요. 지금 사회에서는 사람이란 도구일 뿐에요. 자본 축적의 도구, 국가적 살인의 도구, 인구 재생산의 도구 등일 뿐입니다. 종교인의 입장에서도,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도 이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에 불과하죠. 그리고 한국에서는 교회나 성당, 절에 다니는 대다수의 자칭 "신도"들이 이 지옥을 마치 "정상적 사회"로 받아들이는 걸로 봐서는, 진정한 의미의 종교인의 수가 이 땅에서 아주 적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노동자들이 착취자들에 대한 충성을 거의 자발적으로 키우다 싶이 하고, 아이들이 서울대 가겠다고 앞을 다투어 스스로 공부의 지옥에 뛰어들어 서로 밟으려 하고, 다수의 학자들이 비판이고 뭐고 다 집어치워 순량한 "등재지 게재 논문" 생산자가 된 대한민국이라는 이 세계의 모범적 지옥을 임하면서도 "목적의 왕국"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바보로만 보일 걸요. 그러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말대로 Credo quia absurdum, 불가능하니까 믿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 살아보려는 욕망으로 믿는 것에요. 신의 섭리는 불가해하다고 생각하면서 믿는 것이기도 해요. 앞으로 이 사회가 수많은 치명적 위기를 통과할 것이고, 그 위기 속에서 오늘날 그 구조의 도착성과 부조리함이 다 노출될 것이고, 그 시련 속에서 질적으로 다른 이상을 결국 대중적으로 모색하게 될 것이라는 걸 믿어요. 다수를 오랫동안 속일 수 있어도 모두들을 영원히 속일 수 없다는 말을, 언제 누가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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