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모든 수행법은 자의식 지우는 훈련
‘증도가’의 구절을 읊는다. “(필연적 사실을 말하는) 결정설은 진리의 법을 나타냄이로다(탄허스님 번역참조). 어떤 사람이 있어 그 사실을 긍정하지 않고 주관적 감정에 따라 헤아림이라. 근원에로 바로 직입함은 부처님이 인가하신 바요. 잎 따고 가지 찾음은 내가 할 일 아니로다. 마니주(여의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여래장 속에 스스로 거두어 두고 있기 때문이라.”
불법은 자연과 인생을 아우르는 우주의 필연적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단지 객관적 지식으로 이해한 사람과 그 사실을 온몸으로 진리의 정신으로서 터득한 사람과의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전자는 두뇌의 지적 수준에서 인정된 사람이고(解悟의 수준), 후자는 자기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이 그 진리와 하나가 되기 위하여 준비가 된 사람이다(證悟의 수준). 이 후자를 진실로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두뇌의 지적 수준에서 불법을 이해한 사람은 아직도 그 불법을 지적 소유의 차원에서 소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불법의 이해를 지적으로 이해했다고 소유하는 차원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불법과 부처님에 귀의하고 불법과 부처님의 화신이 되어야 한다. 온전한 귀의는 존재론적 일체감이 이루어져야 가능하다.
앞에 인용된 ‘증도가’의 구절은 이런 존재론적 이해의 차원을 지적한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사유 속으로 직접 바로들어가야 한다. 점진적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조금씩 조금씩 접근해서는 백년 하청 격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에서 여러 번 지적했듯이,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일시에 사고방식을 확 바꾸는 혁명적 일을 해야 한다.
소유적 사고방식을 가지고서는 아무리 도덕적으로 점진적인 노력을 해도 중생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소유에서 존재에로 건너가기 위하여 저쪽으로 건너뛰어야 한다. ‘증도가’의 영가(永嘉)대사의 지적처럼, 소유에서 존재에로 건너뛰기 위한 신통력은 오직 마음의 오묘한 능력인 마니주(여의주)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마음의 마니주를 활용하는 길은 마음이 자의식을 지워야 한다. 마음의 자의식, 이것이 문제다. 어떻게 그 자의식을 지우나? 불교의 모든 수행법은 이 자의식을 지우는 훈련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인간의 자의식은 사회생활에서 온다. 사회생활에서 인간이 남들과 겨루어서 이겨야 하고. 그러면서 그 남들로부터 또한 인정을 받아야 하는 이중적 관계를 맺어야 하는 데서 자의식이 영근다. 자의식은 내가 살기 위한 최소한의 방편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이 사회생활을 거부할 수도 없다. 그것을 거부하면 인간은 인간구실도 못한다.사회생활이 모든 소유욕과 사유의식의 발원지다. 소유의식이 곧 자의식이다.
흔히 쉽게 무소유라고 말하나, 무소유로는 사회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 실질적으로 무소유로는 아무도 사회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아주 극빈적 거지를 제외하고 그렇게 안 된다. 아무도 사회생활을 부정할 수 없고, 사회생활은 곧 소유를 위한 경쟁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소유를 위한 자의식을 부정하라고 가르치는데, 어떻게 소유에서 존재에로 우리가 건너 뛸 수 있나? 더구나 부처님은 절대 가난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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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제자 가운데 기딜타 태자와 수달다 장자는 엄청난 부자였다. 흔히 말하듯이 불교는 빈곤을 예찬하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빈곤은 사회생활을 파괴하고 비참하게 한다. 그러면 어떻게 소유론적 사회생활 속에서 존재론적 사회생활에로 건너뛸 수 있을까?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출처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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