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자아 be, exist
삶에 대한 탐구는 결국 존재와 자아에 대한 분석과 이해이다. 신비적 체험의 영역인 종교와 실증적 학문인 과학을 젖혀놓고 얘기하자면, 이는 결국 철학적인 사유의 영역이랄 수 있다. 합리적인 이성과 추론으로써 삶의 지도, 즉 세계, 자아, 존재를 규정하고, 그 구성원리와 전개, 의미와 가치를 그려나간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지만, 철학적 사유는 라깡, 들뢰즈, 데리다 등이 포진한 현대철학에서 정점에 이르렀고, 삶의 지형 구축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존재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로는 be, have, exist, consist, subsist...등이 있는데, 어떤 맥락에서 존재를 이해하느냐에 따라 쓰임새가 다르지만, be와 exist에 주목해 본다. 실존주의철학자이며 현상학자인 하이데거는 존재를 존재방식으로 이해한다.
be는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실존주의철학자 사르트르가 제시한 ‘피투(被投)’의 개념이다. 존재가 어떻게 어떤 이유로 주어진 것인지는 모르겠다는 불성실한 태도가 거슬리지만, 실존주의철학뿐만 아니라 모든 사유는 ‘지금 여기에서의 시작과 그 진행’을 그려나간다. 삶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이다. ‘생사’를 종교의 영역으로 슬그머니 넘긴 셈이다.
어찌됐든 be는 삶에 대한 근본적 ‘무지 無知’를 토대로 자기완결성을 추구하는 폐쇄적 존재방식이다. 그의 세계에는 아직 또다른 주체로서의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소유적 대상일 따름이다. 라깡의 ‘상상계’에 갇혀 있는 ‘미성숙한 실체적(實體的) 자아’다.
exist의 존재방식은 be와는 현격하게 다른 대척점에 있다. ex-인 접두어는 ‘밖, 바깥’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바깥은 자아가 지배하는 안의 영역이 아닌 타자의 영역이다. 자아와 타자와의 접점이 ‘만남-관계’라는 안팎의 경계이며, 유기적인 삶이 형성되는 ‘사건의 지평선’이다. exist는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경계선에서 ‘폐쇄적 자아’를 지워버리고 ‘개방적 자아’를 새로이 출현시킨다.
exist는 타자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 존재방식으로 나뉜다. 또다른 주체인 타자를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모순적 대립관계로 받아들이면, be의 존재양식의 연장선인 ‘성숙한 실체적 자아’에 여전히 머물 수밖에 없고, 타자를 의식하며 또한 의식할 수밖에 없지만, 자기중심적이며 자기환원적이다. 그러나 상호의존적 대립으로 받아들이면 ‘연기적(緣起的) 자아’로 인식론적 전환을 맞이하며 관계중심적이며 관계환원적이다. 더 나아가 존재론적 전환에의 지평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라깡의 ‘상징계’가 exist를 횡단하며 ‘실재계’로 들어서는 것이다.
삶은 이항대립적이며 의존적 발생의 질서를 갖고 있다. 생성(生)과 소멸(滅), 있음(有)과 없음(無), 본질과 현상, 물질과 정신, 진실과 거짓,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이러한 마주봄의 형식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be와 exist라는 이질적인 존재양식의 속주름이 경험적 개체에게 각인된다.
사르트르는 피투의 숙명을 거부하며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현실을 극복하는 존재방식인 ‘기투(企投)’를 말한다. 자기 한계를 인식하는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고자 노력하는 이상적 인간상이다. 그럼에도 구조주의, 현상학, 실존주의철학은 ‘실체적 자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해체주의철학인 데리다와 들리즈에게 이르러서야 비로소 ‘연기적 자아’의 맹아(萌芽)가 출현한다. 물론, 생사의 문제를 관통해야만이 ‘진정한 연기적 자아의 존재방식’을 성취하고, 또한 바로 그 지점에서 무한루프를 배회하는 고달픈 삶이 철저히 균열되며 '안팎- 경계-관계'로의 출구이면서 입구인 exit가 형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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