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체험
양자역학, 천체물리학, 뇌과학, 인지심리학 등등 가히 과학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정신적 차원의 문제는 여전히 신비의 영역입니다. 또다른 세계와 존재들, 윤회 또한 마찬가지겠지요. 물론 지혜가 좀더 성숙해지면 어렵지 않게 해결될 거라 믿습니다. 지혜가 어느 정도 자리잡기까지는 붓다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또한 체화하는 과정이 필수입니다. 인식론적 전환(교학의 철저한 이해)와 존재론적 전환(수행을 통한 인격적 탈바뀜)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상적인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분들은 예외없이 초월적 신비적 체험을 겪습니다. 초월적 신비적이라는 규정은 무지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세상사가 그렇듯, 모르면 어렵고, 알면 쉽습니다. 저 또한 보통 사람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신비체험을 겪었지만, 사실 비합리적이고 비 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이기 때문에 주위사람들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인연이 닿으면 주어지고 이해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한 걸음씩 삶을 열어나가는 것이지요.
1. 지적 생명체 혹은 휴머노이드라 불리는 존재들이 지구에만 존재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례로, 저는 오래전 플레이아데스성단에서의 삶을 인정합니다. 제 몸에 그 별자리 지도가 있기도 하며, 제 이름 또한 모친이 신비체험으로 받아 지닌 것입니다. 유체이탈을 해서 그쪽 지적생명체와 조우하거나 만난 적은 없습니다. 먼 과거에 그쪽 별에서 지구로 왔었겠다는 믿음입니다. 알고자 하면 알 수도 있겠지만, 과거의 삶에 대해서 그렇게 궁금하지 않기도 합니다. 지금여기에서의 하루가 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2. 지인들의 죽음 후 그들과의 신체적 접촉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3. 인간 외의 다른 존재 흔히 귀신이라고 불리는 존재들과 가끔 텔레파시로 대화를 나눕니다. 전광판에 자막이 찍히듯 그렇게 이해됩니다. 제가 지금 지내는 공간에도 있으며, 소박하고 착한 존재들이기에 가끔 대화를 나누고는 합니다. 큰 의미는 없습니다. 30여 년 전, 고약한 친구를 만나서 크게 당한 적이 있기도 합니다. '빙의'라고 해야 하는지는 몰라도, 기운이 너무 세서 숨도 못 쉴 정도였지만, 어떤 존재이든 다른 존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정도로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에 괘념치 않았고, 얼마 가지 않아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4. 한국에서의 전생 체험 중 가장 확실한 것은 후삼국시대 신라의 불교 수행승이며 법명까지 알고 있습니다. 가까운 지인의 경우, 태어날 때 이마와 뒷덜미에 한글과 한자로 기호가 새겨져 있기도 했습니다. 전생에서의 지위를 나타내는 기호입니다.
5. 임사체험은 한 적 없지만, 꿈에서 더없이 자비롭고 환한 빛의 존재가 나타나 메시지를 전하거나 일상에서 난데없이 맞은편 벽에 어떤 기이한 형상이 드러나면서 암묵적인 메시지를 건넨 체험은 있습니다. '빛의 터널' 체험은 종교 여부를 떠나서도 많이들 체험합니다. 욕계에서의 빛과 색계에서의 빛은 좀더 다른 차원이기는 합니다만, 사실 신비적 영역은 아닙니다.
6. 저뿐만 아니라 주위 지인들의 얼굴이 갑자기 다른 얼굴로 바뀌기도 한 경험이 몇 차례 있는데, 아마 가까운 전생의 얼굴이라고 여겨집니다. 외모가 뛰어나고 행동거지가 나무랄 데 없어보여도 탐욕이 강한 사람들의 경우, 속된말로 '송장 썩는 냄새'가 풍겨서 도저히 옆자리에 앉아 있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기도 합니다.
7. 포탈 혹은 웜홀 등으로 일컬어지는 공간이동의 체험도 했습니다. 동네 숲길에서 산책할 때 10여 분 정도 전혀 낯선 환경이 펼쳐져서 당혹스러웠고 며칠 사이에 둘렛길 단장을 한 것인지 의심했지만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아 나오고 보니 입구와 출구가 200여 미터 떨어진 곳이었고, 그 두 지점 사이는 길이 끊겨 있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경험입니다. 공기는 비누칠이 된 것처럼 살짝 미끌거렸습니다. 그 길을 그 뒤로 줄곧 유념하면서 다녔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그러한 놀라운 체험이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웜홀이 다시금 열린다면 현실로 돌아오지 않고 그 시공간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챙겨보았습니다. 물론 이런 경험을 밝히는 의도는 단 하나입니다. 모르면 신비고 알면 평범한 일상입니다. 수행과정에서의 체험은 일반인에게는 신비체험이겠지만, 수행자들에게는 신비체험이라고 할 수 없기에 올리지 않습니다. 색계4선의 수행경지에서는 이 몸의 껍질은 그대로 놔둔 채 정신적 몸으로 색계, 무색계로 차원이동해서 그곳의 존재들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한 몸이 두 몸 되고, 하늘을 날기도 땅속에 들어가기도 하는 신족통, 천신들과 대화를 나누는 신이통, 다른 존재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타심통, 과거와 미래를 꿰뚫는 숙명통, 천안통 등 주어지는 게 아닌 스스로 밝혀내는 신통력의 경지 또한 다양합니다.
붓다께서는 이 모든 신통력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생멸윤회하는 중생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신통력으로써 소박한 중생들을 현혹하는 삿된 사이비 수행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번뇌의 소멸(누진통)'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윤회의 소멸입니다. 고통의 뿌리뽑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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