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각이 일어나는 그 자리
선가에서 얘기하는 ‘한 생각이 일어나는 그 자리, 그것’이 참나, 지혜, 아는 마음이라고 정의하는데, 또한 그 자리는 본래 있었던, 생각(번뇌)에 물들지 않은 순수의식이라고도 합니다. 밖으로 찾고 구하지 말며, 찾고 구하는 그 마음이 바로 그것이라고도 합니다. 본래, 원래 있었다는 것은 ‘연기하지 않는, 고정불변하는’이란 의미로, 붓다의 가르침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삿된 행위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그 자리, 일어난 한 생각을 알아차리는 그것 또한 정신적 요소인 형성작용에 지나지 않습니다. 연기한다는 것이죠. 생각의 배후에 형이상학적인 초월적인 무엇, 실체가 있다는 생각은 그것에 어떤 이름을 갖다붙인다 해도 망념, 혼란, 혼동, 착각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태도는 자연스럽게 고정불변의 실체인 한마음, 공, 참나, 일심, 자성, 청정심, 중생심, 본래불 등의 사상으로 전개됩니다.
‘알아차림’ 또한 생각에 의존해서 일으키는 의도적 작용인 사유일 뿐입니다. 알아차림은 마음, 생각이 아니라 ‘형성작용 行’ 가운데 선법에 속하는 법입니다. 잠재되어 있던 순수의식, 앎, 지혜가 떠올랐다가 다시금 가라앉는 그런 시스템은 아닙니다. 조건에 의지해서 생멸하는 법일 따름입니다. 알아차림은 대상이 ‘무상, 고, 무아’라고 분별하는 연기적 사유입니다. 단순히 아는 작용은 의식입니다. 의식과 알아차림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알아차림은 마음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있어야 작용합니다. 알아차려야 대상에 휘둘리지 않고, 대상을 쫓아가지 않습니다.
연기를 부정하는 그릇된 사상과 태도는 대승에서 떠받드는 매우 난해하지만 심오한 저술인 <대승기신론>에서도 고스란히 확인됩니다. 이러한 실체론적 사상은 청정한 한마음, 참나가 왜 오염되었는지, 왜 윤회하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다만 ‘불가사의하다’는 불성실하고 무책임하며 오만한 자세로 일관합니다. 세세생생 윤회하며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보살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은 이, 해탈한 이는 다시금 몸을 받지 않기에 세속적 욕망을 거부하고 수행에 매진하는 선량한 수행자들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생각이라는 개념 또한 확실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기에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오온에서 정신적 요소인 識과 心(受와 想), 行 모두를 생각으로 뭉뚱그려서 이해합니다. 생각은 감각기관인 意의 작용입니다. 눈의 작용이 시각, 귀의 작용이 청각이듯 말이죠.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내용이 의식입니다. 마음의 작용 또한 생각이 아니라 판단이라고 해야 좀더 적확할 겁니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생각이 작용하고 그 종합적 내용인 의식, 앎, 정보가 마음에 전해집니다. 12연기의 ‘촉 -> 수(수와 상)’입니다. 이러한 정보를 조건으로 마음이 대상에 대한 판단의 과정을 거쳐서 다시금 재구성됩니다. 감성적이며 이성적인 심리의 형성입니다. 그리고 이런 심리를 바탕으로 대상에 대한 관계맺음, 의도적 행위가 형성됩니다. ‘애 -> 취’입니다. 의도적 행위인 업은 ‘사유-말-몸짓’의 세 가지 형태로 전개됩니다. 여기에서의 사유는 인식행위에서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작용입니다. 혼란을 피해서 사유라고 정의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정리하자면 흔히 얘기하는 ‘생각’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인식으로서의 생각, 판단으로서의 생각, 사유로서의 생각. 이 모두가 정확한 분별 없이 혼란스럽게 쓰임으로써 인식과 마음의 재구성, 의도적 행위의 연기과정이 모호해져버리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이는 어찌 보면 心 意 識을 동일시한 부파불교의 착각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유식학에까지 영향을 미친 心王(識), 心所(受想思)라는 개념도 문제입니다. 의식이 근본이고 나머지 수, 상, 행(사)는 의식의 작용이라는 정의는 유식학에서 7식, 8식 나아가 9식을 계속 출몰시키는 황당한 폐해를 낳았습니다. 수, 상, 행, 식은 제각기 고유의 기능과 작용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붓다께서는 그 4가지 정신적 요소들을 절대 혼동시키지 않았습니다.
초기불교든 대승불교든 마음을 매우 중요시하는 태도는 바람직합니다. 불자라면 익히 아는 一切唯心造는 무척 좋은 구절입니다. 물론 마음을 실체화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죠. 생멸하는 법인 마음(판단)이 인식(생각)과 행위(사유)의 작용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탐욕과 무지에 물든 마음, 자비와 지혜로 가꾸어진 마음, 어떤 마음이냐에 따라 생각하고 사유하는 우리 삶의 풍경은 천차만별로 달라집니다.
깨달음은 이 마음을 어떻게 구성시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상락아정’이 아닌 ‘무상, 고, 무아, 부정’의 판단이 자리할 때, 어둠인 무지가 벗겨지고 지혜가 햇살처럼 드러납니다. 고정불변의 ‘아는 마음, 한마음, 순수의식, 그것’이 아닌, ‘무상, 고, 무아’로 정확하고 분명하게 분별하는 지혜작용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을 신비화하고 추상화하고 실체화해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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