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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기질과 모국어

slowdream 2024. 10. 16. 23:39

한국인의 기질과 모국어

 

며칠 전,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모국어인 한국어에 대한 애틋함을 새삼스럽게 되새기게 합니다. 지구적인 차원에서야 뭐 한국어가 소수언어인 까닭에 홀대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최근 국력 상승과 한류의 영향도 수상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여깁니다. 물론 국가와 민간 차원에서도 오랫동안 한국문학의 세계화 노력에 많은 공을 들였고, 좋은 번역자들을 만났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겠지요.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언어권이든 좋은 작가, 작품들은 당연히 존재했었고 존재하고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이번 수상을 계기로 한국어가 지닌 깊은 성찰력, 표현력, 미학적 감수성 등이 좀더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싶어요. 책을 읽지 않는 요즘 세태에 반전의 동력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큽니다.

 

뜬금없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인의 다혈질 기질(냄비근성? ^^)과 전체주의적 폭력성을 ‘우리’ 말의 고유성에서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언어학자가 아닌 까닭에 다른 언어는 비교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한국어는 형용사의 변화무쌍한 춤사위가 참으로 놀라울 지경입니다. 예로 들자면,

 

푸르다, 검푸르다, 시푸르다, 겉푸르다, 열푸르다, 청푸르다, 얄푸르다, 희푸르다, 푸르딩딩하다, 푸르스름하다, 푸르죽죽하다...

 

어떤 수식도 들어설 틈이 없는 낱말 자체의 현란한 변신입니다. 이는 문장을 최소단위로 전개하는 통사론, 의미론 등이 발붙일 수 없는 자리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인 "pale blue eyes"를 예로 들자면, blue는 더 이상 자신을 쪼개지 못합니다. pale 같은 누군가의 조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한국어인 ‘푸른’은 ‘희푸르다, 검푸르다, 청푸르다’처럼 타자인 조력자를 집어삼키기도 하지만, ‘푸르딩딩, 푸르스름, 푸르죽죽’처럼 자기를 확장 전개시키기도 합니다. 이 모두가 자기중심적인 탐욕입니다.

 

분열하지 않는 blue와 무한분열하는 ‘푸른...’의 차이는, 타자를 내 삶의 상호의존적인 독립적인 요소로 받아들이느냐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pale white passing babyish 등의 타자와 관계맺음으로 나의 blue가 확인될 때의 태도가 전자라면, 그 어떤 타자의 눈길로도 확인되기 쉽지 않는 내 마음의 다양한 version인 ‘푸른...’은, 타자의 눈길을 내 혀로 감아버리거나 ‘네가 내 마음을 알겠어?’ 하며 타자와의 만남을 기꺼이 허락하지 않고 자기번식에 집중하는 부정적인 태도이겠죠.

 

‘좋고 싫음’에 대한 반응이 극단적으로 끓고 식는 태도를 다혈질이라 이해해도 된다면, 이는 타자와의 관계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어의 기본적 특질과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다고 봅니다. 극한까지 치달을 수 있는 감성의 소유자인 다혈질은, 일상적인 대화나 좀더 냉정한 토론에서도 격렬한 반응을 기대하고 또 확인합니다. 섬세하기 그지없는 ‘나’의 감성의 결에 좀더 가까이 접근하기를 기대하고 기뻐하고 실망하고 분노합니다. 감성과 이성의 복합체인 마음을 놓고 보더라도, 한국인인 ‘우리’는, 언어의 일반적 한계를 떠나서라도, 자기 마음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마련입니다. ‘푸른’이 무한하게 가지를 치면서 분열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타자를 집어삼키고자 하는 욕망과 자기 자신의 번식에 집중하는 탐욕스런 ‘나’는 외적 확장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언어질서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우리’라는 포식자의 난폭성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라는 폭력적 질서에서 질식당하기 십상이고, 언어는 사유의 그림자임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우리’의 언어습관과 질서에서 균열된 채 소외됩니다. 사유와 언어, 현실에서의 ‘나’와 ‘우리’의 불편한 동거는 종종 그들의 하루를 고달프게 엮어갑니다. 무한분열하면서 타자를 용납하기 어려운 ‘나’를 폭력적으로 거세하고 물리적 결합을 요구하는 ‘우리’ 사이에서, 어떤 언어와 몸짓, 숨결이 그들을 화해시킬 수 있을까요.

 

한강이 소설적 언어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테제가 거시적으로는 삶의 폭력성, 야만성, 무지, 억압, 차별과 혐오, 인간과 자연의 존엄성 등이라면, 미시적으로는 ‘균열된, 소외된 나’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모든 예술작품이 갖는 보편적 테제이겠죠. 그렇다면, 작가 고유의 정체성은 문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