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충만
一心의 근원은 有無를 여의어 홀로 청정하며
三空의 바다는 眞俗을 아울러 깊고 넉넉하도다.
깊고 넉넉하여 둘을 아울렀으나 하나가 아니며
홀로 청정하여 둘을 여의었으나 중간도 아니다.
중간도 아니며 둘을 여의었기에
有가 아닌 法이 無에 나아가 머물지 아니하며
無가 아닌 相이 有에 나아가 머물지 아니한다.
하나도 아니며 둘을 아울렀기에
眞이 아닌 事가 비로소 俗이지 않고
俗이 아닌 理가 비로소 眞이지 않다.
둘을 아울렀으나 하나가 아닌 까닭에
眞과 俗의 自性이 세워지지 않은 바 없고
染과 淨의 相이 갖추어지지 않은 바 없다.
둘을 여의었으나 중간이 아닌 까닭에
有와 無의 法이 이루어지지 않은 바 없고
긍정과 부정의 뜻이 두루하지 않은 바 없다.
깨뜨림이 없으나 깨뜨리지 않음이 없고
세움이 없으나 세우지 않음이 없다.
이를 가리켜 無理에서 至理가 솟아나고
不然에서 大然이 펼쳐진다 하니라.
머무는 곳 없으나 머물지 않는 바 또한 없나니.
大乘의 體는 고요하고 텅 비어 적적하며
깊고 넉넉하여 현묘하도다.
현묘하고 현묘하나 萬像의 표피를 벗어나지 않으며
공적하고 공적하나 百家의 담론에 있다.
그러나 大乘의 體는 만상의 표피에 있지 않으므로
五眼으로 능히 그 몸을 볼 수 없고,
말속에 깃들어 있으므로
四辯으로 능히 그 모양을 설명할 수 없다.
크다고 말하고 싶으나
안이 없는 지극히 작은 것에 들어가도 남음이 없고,
작다고 말하고 싶으나
겉이 없는 지극히 큰 것을 감싸고도 남음이 있다.
有로 나아가려 하나 一如가 이를 써서 공하고
無로 나아가려 하나 만물이 타고 생기하니
어찌 말할 도리가 없어서 억지로 大乘이라 일컫는다.
이를 가리켜 無理에서 至理가 솟아나고
不然에서 大然이 펼쳐진다 하니라.
머무는 곳 없으나 머물지 않는 바 또한 없나니.
* 위 글은 원효 스님의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 서문에서 발췌,
약간의 첨삭을 거쳐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