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불교/달마록(達磨錄)

무명론/돈오론/육바라밀론/수행론/안심론

slowdream 2007. 9. 4. 04:41
 

16. 달마의 무명론(無明論)


"당신께서는 우리의 불성과 모든 덕성이 각성이라는 근원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명은 어떤 근원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수많은 집착과 정욕과 악을 지닌 무지한 마음, 즉 무명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이 세 가지 독에 중독된 마음은 셀 수 없이 많은 약을 갖고 있는데, 마치 나무가 하나의 둥치에 수많은 잎과 가지를 갖고 있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세 가지 독은 수백만 개의 약을 만들어내어 나무의 예와 거의 같다.

세 가지 독은 우리의 여섯 가지 감각과 그 감각의 식(識)에 물들여 있다.

그것들은 도둑이라고 불리는데 감각의 문을 빠져나와 마구 다니면서 한없이 욕심을 내고 악에 탐닉하고 위선의 가면까지 쓴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그것의 근원을 잘라 버린다면 그 강물은 곧 말라 버릴 것이다.

만일 해탈을 추구하는 어떤 사람이 이 세 가지 독을 세 가지 진리로 바꾸고, 여섯 도둑을 육바라밀로 바꾼다면, 그는 자신을 그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삼계와 존재계의 육도는 무한히 광대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라면 이 끝없는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삼계의 업은 오직 마음에서 나온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삼계 속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삼계를 초월한 것이다.


"그러면 육도의 업은 어떻게 다릅니까?"


참된 수행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먼 선행만 쌓는 사람은 삼계에 태어난다.

눈먼 사람은 어리석게도 열 가지 선업을 쌓고도 행복을 추구하는 바람에

욕망의 세계에 신으로 태어날 것이다.

오계를 지키고도 어리석게 애증에 몰두하는 눈먼 사람은 분노의 세계에 사람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눈이 멀어 현상의 세계에 집착하는 사람은 거짓된 가르침을 믿으며 축복 받기를 원하는 바람에 미혹의 세계에 악마로 태어난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마음을 주목해서 그것의 거짓과 악을 초월한다면 존재하는 데서 오는 고통은 자동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한번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면 그대는 진짜로 자유롭다.



17. 달마의 돈오론(頓悟論)


"그러나 부처는 '삼 아승지겁 동안의 셀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그대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께서는 어떤 연유로 단지 마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삼독심을 극복하고 해탈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부처의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삼 아승지겁은 바로 삼독심에 물든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범어로 아승지겁이란 말은 그대가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이다.


이 삼독에 물든 마음에서 셀 수 없는 악한 생각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 모든 생각들은 영겁의 세월동안 계속된다.

부처가 삼 아승지겁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무수히 많은 생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보살들은 삼학을 지키고 육바라밀을 행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제 당신께서는 제자들에게 단지 마음을 지켜보라고만 말씀하십니다. 수행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서 누가 과연 깨달음에 이르겠습니까?"


삼학은 삼독심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그대가 삼독을 극복했을 때 그대는 삼학의 한량없는 덕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셀 수 없이 많은 선한 생각을 그대의 마음을 통해서 일어나게 할 것이다.


육바라밀은 여섯 가지 감각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바라밀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대는 '피안에 이르는 방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섯 가지 감각에 낀 때를 벗겨 냄으로 해서 육바라밀은 그대를 집착의 강을 건너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해 줄 것이다.


"경전에 따르면 삼학에 대해서 '나는 모든 덕을 행하겠다고 맹세한다. 나는 모든 악을 끝내겠다고 맹세한다. 나는 모든 중생을 해탈로 인도할 것임을 맹세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께서는 삼학이 단지 삼독심을 잘 다스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경전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부처의 경전은 진리이다.

그러나 오래 전 위대한 보살이 깨달음의 씨앗을 심고 그것을 키울 때, 그가 세 가지 맹세를 한 것은 이 삼독심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모든 덕을 행하겠다는 말은 탐욕의 독을 없애기 위한 것이며, 모든 악행을 그치겠다고 맹세한 것은 성냄의 독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모든 중생을 해탈로 인도할 것을 맹세한 것은 어리석음의 독을 다스리는 지혜를 닦기 위해서였다.

계(戒), 정(定), 혜(慧), 삼학을 지키는 것은 삼독심을 물리치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은 이 세 가지 독을 극복함으로써 그의 모든 죄업을 다 청산하고 악행을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다.

그는 선을 행할 뿐만 아니라 이로써 덕을 쌓는 것이다.


그리고 덕을 쌓음으로써 악행을 끝내는 것은 곧 모든 수행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축복할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을 구할 수 있다.

이리하여 그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18. 달마의 육바라밀론(六波羅蜜論)


그대가 닦은 수행은 그대의 마음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그대는 깨달아야 한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청정하다면 모든 불국토 또한 청정하다.


경에 이르기를 "그들의 마음이 불순하면 존재 역시 불순하고, 그들의 마음이 순수하면 존재 또한 순수하다."고 했다.


또 이르기를 "불국토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대의 마음을 정화하라. 그대의 마음이 정화됨에 따라서 불국토가 청정해진다."고 했다.

이리하여 삼독심에 물든 마음을 깨끗하게 다스림으로 해서 계, 정, 혜, 삼학이 저절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경전에는 여섯 가지 바라밀이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당신께서는 그 바라밀이 감각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왜 그것들을 뗏목이라고 부릅니까?"


바라밀을 닦고 여섯 가지 감각을 정화하는 것은 여섯 가지 도둑을 제압한다는 뜻이다.

안목의 세계를 포기함으로써 시각의 도둑을 몰아내는 것이 곧 보시(布施)이다.

소리의 세계에 이끌리지 않음으로써 청각의 도둑을 제압하는 것은 지계(持戒)이다.

냄새의 세계에 중용을 지킴으로써 후각의 도둑을 다스리는 것이 인욕(忍辱)이다.

맛의 욕망에 이끌리지 않음으로써 미각의 도둑을 평정하는 것이 정진(精進)이다.

감촉의 세계에 이끌리지 않음으로써 촉각의 도둑을 다스리는 것이 선정(禪定)이다.

미혹에 빠지지 않고 깨어 있음으로써 마음의 도둑을 조복(調伏)시키는 것이 지혜(智慧)이다.

이 육바라밀은 그대를 피안으로 건너가게 하는 나룻배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뗏목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석가모니께서 보살이셨을 때, 그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먼저 세 그릇의 우유와 여섯 국자의 죽을 마셨습니다. 만약 그가 불성의 열매를 맛볼 수 있기 전에 먼저 우유죽을 마셔야 했다면 어떻게 마음을 기켜보는 것으로만 해탈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방법이다.

그는 부처가 되기 전에 먼저 우유죽을 마셔야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우유죽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가 마신 우유죽은 보통의 불순한 우유죽이 아니라 불법의 우유죽을 마신 것이다.

이 세 그릇의 우유란 삼학을 말하는 것이며, 여섯 국자의 죽이란 육바라밀을 뜻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것은 불성의 열매를 맛보게 한 순수한 불법의 우유를 마셨기 때문이다.


여래께서 불순한 세속의 암소젖을 마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를 중상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는 세속의 어떤 집착에서도 영원히 자유로운, 썩지 않고 정욕도 없는 불법 자체를 마신 것이다.

그러니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불순한 우유죽을 마실 필요가 있겠는가?


경에 이르기를 "이 황소는 고원이나 들판에 살지 않는다. 그것은 곡식이나 여물을 먹지 않는다. 그것은 암소와 함께 살지도 않는다. 그 황소의 몸빛은 타오르는 황금빛이다."라고 했다.

그 황소는 비로자나불이다.


모든 존재를 향한 그의 큰 자비심으로 인해서, 그의 몸에서 삼학과 육바라밀의 순수한 우유를 만들어내고 그것은 해탈을 추구하는 모든 이를 양육한다.


그런 순수한 법신에서 나오는 젖은 여래를 낳게 하고 불성을 성취하게 한다.

그것을 마시는 자는 영원하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


조복(調伏) : 1. 몸과 마음을 고르게 하여 온갖 악행을 제어함

            2. 부처의 힘으로 원수나 악마 따위를 굴복시킴

육바라밀(六波羅蜜) :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 지혜(智慧)



19. 달마의 수행론(修行論)


경전을 통털어서 부처는 중생들에게 말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좋은 일을 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 좋은 일이란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며,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며, 꺼지지 않은 등잔에 불을 밝히고, 하루에 여섯 번씩 참선을 하고, 탑을 돌며 단식을 하고, 예불을 드리는 일이다.


그러나 마음을 지켜보는 것에 이 모든 수행이 다 들어 있다.

그때 이 모든 일들은 하나의 부수적인 일이 된다.

부처의 경전에는 셀 수 없는 비유들이 들어 있다.

그것은 중생이 마음의 표면만 겉돌 뿐 깊숙한 것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처는 구체적인 비유를 들어서 그 오묘함을 나타내었다.

내면의 수행 대신 외부적인 일에만 집중하면서 축복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그대들이 절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는 상가라마, 즉 청정한 곳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삼독심에 물들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의 감각의 문을 청정하게 지켜야 한다.

그의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며 안과 밖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이 절을 짓는 것이다.

불상을 조성하는 것 역시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이 모든 종류의 수행을 닦는 것에 해당된다.


그리고 향을 사르는 것은 물질적인 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불법의 향이다.

그리하면 무명과 악한 행위가 그 향내와 함께 멀리 사라질 것이다.

부처가 세상에 있을 때, 그는 제자들에세 그런 귀한 향에 깨어 있음의 불을 붙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시방(十方)의 모든 부처를 공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늘날 여래의 진실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백단향이나 유향으로 만든 물질적인 향에 불을 붙이고, 오지도 않을 미래의 축복을 빌고 있다.


미덕의 꽃을 뿌리는 것 역시 같은 진리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불법을 말하는 것에 해당되며 다른 사람들의 축복을 빌어 주는 것이며 진아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여래는 자기를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꽃을 꺾어 식물에 해를 끼치도록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여래의 가르침을 잘 지켜나가는 사람은 천상과 이 땅에서 어떤 생명의 모습도 해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실수로 어떤 생명을 해쳤다면 그대는 그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계를 어기고 앞날의 복을 받기 위해서 생명을 해치는 자는 더욱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떻게 축복을 슬픔으로 바꾸려고 하는가?

꺼지지 않는 등불은 완전한 깨어 있음을 나타낸다.


오래 전에 연등불(練燈佛)이라고 하는 부처가 있었다.

그 이름의 뜻은 그의 양미간에 있는 한 터럭에서 나온 빛이 무수한 세계를 비출 수 있다고 하는 뜻이다.

그러니 기름 등잔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하루에 여섯 번 참선하는 것은 여섯 가지 감각을 다스리라는 뜻이다.

탑 주위를 도는 것은 곧 탑이 그대의 몸과 마음이다.

그대의 깨어 있음이 멈추지 않고 몸과 마음의 주위를 돌 때 그것을 곧 탑돌이라고 부른다.

단식을 하는 것도 같은 진리를 담고 있다.

단식을 하는 것은 그대의 몸과 마음이 흩어지거나 방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한번 그대가 미혹의 음식 먹기를 멈춘 뒤에 그대가 그것을 다시 만진다면 그것은 단식을 깨뜨리는 것이다.

한번 그대가 그것을 깨뜨리고 나면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어떤 축복도 받지 못한다.


이 세상은 진실을 보지 못하는 미혹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몸과 마음을 모든 형태의 악에 물들게 한다.

그들은 정욕에 마음껏 탐닉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일상의 음식 먹기를 그만두고도 그것을 단식이라고 부른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예불도 마찬가지이다.

그대는 방편을 이해하고 인연을 맞추어야 한다.

방편에는 행동하는 것과 행동하지 않는 무위를 모두 갖추고 있다.

예불이란 존경과 겸양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대의 진아에 대해 존경하는 것이고 미혹됨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악한 욕망을 몰아내고 착한 생각에 머무르면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더라도 그것은 바로 예불이 된다.

외부 세계로 감정을 표출하는 것 대신에 내면으로 향한 수행에 실패한 사람은 자신을 쓸모 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무지와 증오와 악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위엄 있는 태도와 성현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음으로써 남을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장점을 갖추고 있더라도 결코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



20. 달마의 안심론(安心論)


"그러나 욕장경(浴場經)에는 '승려들을 목욕시키는 공덕은 무한한 축복을 받으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은 외부적인 덕행이 깨닫는 데 보탬이 된다는 예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마음을 지켜보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승려들의 목욕이란 말은 육체를 씻는다는 뜻이 아니다.

부처가 욕장경을 설법할 때 그는 제자들이 불법을 갈고 닦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진리의 참뜻을 찾는 행위를 목욕에 비유해서 말한 것이다.

욕장이란 육체를 말한다.

그대는 지혜의 불을 때고 올바른 견해의 물을 데워서 그대 속에 있는 참된 불성을 깨끗이 닦아라.

그리고 일곱 가지 수행들을 잘 지킴으로 해서 그대는 덕을 쌓을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의 승려들은 밝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부처의 참뜻을 이해했다.

그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따랐고 그들의 덕을 완성했으며 불성의 열매를 맛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그 경지를 헤아리지 못한다.


우리의 참된 불성은 모양이 없다.

그리고 집착의 때에도 모양이 없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들은 평범한 물로 보이지 않는 몸을 씻을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언제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 몸을 씻기 위해서는 그대가 그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한번 욕망으로부터 더러움과 오물이 일어나면 그것들이 그대의 안과 밖을 모두 덮어버릴 때까지 계속 생겨난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이 몸을 깨끗이 씻고자 한다면 그대의 육체를 닳아 없어질 때까지 문질러도 안 된다.

그러니 그대는 욕장경에서 부처가 한 말이 어떤 외부적인 닦음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경전에는 사람이 진심으로 부처를 부르면 그가 죽은 뒤에 서방정토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이 불성으로 들어가는 문일진대 왜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해탈을 구하고자 합니까?"


부처는 깨어 있음을 말했다.

몸과 마음이 깨어 있을 때 거기에서 어떤 악도 일어날 수가 없다.

부처를 부르는 것이란 그대의 마음을 부르며, 그 마음으로 하여금 수행의 법칙을 따르고 그것을 계속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부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그대는 불법을 이해해야 한다.

그대의 마음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대의 입은 공허한 이름만 부르는 것이다.

그대가 아집과 삼독심으로 고통을 받는 한 그대의 더럽혀진 마음은 그대로 하여금 부처를 볼 수 없게 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모양에 집착한다면 그 의미를 찾더라도 그대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과거의 성현들은 말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살피는 수행을 했다.


이 마음은 모든 덕의 근원이다.

또한 이 마음은 모든 힘의 으뜸이다.

열반의 영원한 축복이 마음이 쉬는 데서 나온다.

삼계에 태어나는 윤회도 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음은 모든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또한 마음은 피안에 닿아 있는 여울이다.

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자는 그것에 어떻게 이르는 지 걱정하지 않는다.

여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자는 건너가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요사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매우 피상적이다.

그들은 모양을 갖춘 것을 장점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재산을 함부로 탕진하면서 수륙의 생물들을 살생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에 즉각적으로 집착한다.


만일 그대가 모양 없음에 대해서 그들에게 말한다면 그들은 귀머거리가 되어 넋을 잃고 앉아 있다.

현세의 작은 행복을 탐하느라 그들은 곧 커다란 고통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헛된 수행을 하고 있다.

진리를 외면하고 거짓을 좋아한다.

그들은 미래의 축복만을 이야기한다.


만약 그대가 마음속에 있는 내면의 빛에 그저 집중해서 그 빛을 지켜볼 수만 있다면, 그대는 세 가지 독과 여섯 도둑을 한번에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수고로움 없이 그대는 무수한 덕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리에 이르는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세속적인 것을 통해서 숭고함을 지켜보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짧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왜 백발을 걱정하고 있는가?

그러나 진리의 문은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출처는 http://cafe.naver.com/munsusafreesaze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