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불교/달마록(達磨錄)

선도론/각성론/관심론/불승론/중도론

slowdream 2007. 9. 4. 04:32
 

6. 달마의 선도론(禪道論)


만일 그대가 부처나 불법, 보살을 부러워하고, 그들을 예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자신을 중생이라고 단정짓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직접적인 이해를 얻기 원한다면 어떠한 모양에도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뜻을 이룰 것이다. 나는 그것 외에 다른 어떤 충고도 해줄 수 없다.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부처와 한 가지 마음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왜 우리는 부처와 보살을 예불하면 안 됩니까?"

마귀와 귀신들은 모습을 나타내는 힘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보살의 모습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거짓이다.


그것들은 부처가 아니다. 부처는 그대 자신의 마음이다. 그대의 신앙심을 잘못된 방향으로 쓰지 말라.

부처란 본래 범어(梵語)로서 그대의 의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반응하고 이해하고,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깜박이고, 손과 발을 움직이는 그 모든 것이 그대의 의식이다. 그것은 기적과 같다.


그리고 이 본성이 바로 마음이며 그 마음이 부처이다. 그리고 그 부처는 도(道)이다. 도는 바로 선(禪)이다.

선에 대한 설명은 단지 사람을 혼란에 빠뜨릴 뿐,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이 바로 선(禪)인 것이다.

만일 그대가 수천 가지 경전을 다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한 그대의 설명은 중생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다.


진정한 도는 너무나 위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경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신의 본성을 보는 자만이 도를 얻을 수 있다.

그가 한 구절의 경전도 읽어보지 못했을 지라도 말이다.

부처가 말한 모든 것은 그의 마음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그의 몸이며 동작과 표현이 본래 텅 빈 것이므로, 그대는 말에서 부처를 찾을 수 없다.

도는 본래가 완전하다. 그것은 완전해지는 과정이 필요 없다.

도는 형체나 소리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대가 물을 마실 때에야 그 물이 얼마나 뜨겁고 찬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도의 맛은 오직 여래만이 알 수 있을 뿐 인간이나 신(神)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중생의 인식은 단견(短見)에 떨어진다. 그들이 모양에 집착하는 한 그들의 마음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사물의 모양에 집착하는 실수 때문에 도를 잃어버린다.

만약 그대가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안다면 그때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한번 그대가 집착하게 된다면 그대는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게 되면 그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경전이 된다. 수천 가지 경전이 오직 밝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이해는 그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때 그 가르침은 얼마나 명쾌하겠는가?

궁극적인 도는 언어를 초월한다.

교리 역시 말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도가 아니다. 도는 말없음이다.

말은 환상이다. 그것은 꿈에서 나타나는 사물과 다르지 않다.


꿈에 보물과 궁궐을 보았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라. 그것들은 모두 윤회의 요람이 될 뿐이다. 그대가 죽음에 임해서라도 이 사실을 명심하라.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대는 모든 장벽을 넘어갈 것이다. 머뭇거리는 순간 그대는 마귀의 수하에 떨어질 것이다.

그대의 진신은 순수해서 그 무엇으로도 상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미혹에 빠진 까닭에 그대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따라서 그대는 헛되이 업으로 인해 고생한다.

그대가 즐거움을 느낀 곳은 어디든지 거기에 속박이 있다.

그대가 한번 본래의 몸과 마음을 깨우치면 그대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얽매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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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zen : 禪)이란 말의 어원은 산스크리스트어이다. 드얀(dhyan : 마음을 초월하다)에서 나온 말인데, 팔리어로는 쯔안(zh'an), 중국에서는 찬(ch'an)으로 변해서 일본으로 건너가 젠(zen)으로 변했다.



7. 달마의 각성론(覺醒論)


세속을 위해서 초월을 포기한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모두 중생이다. 부처는 좋고 나쁜 운명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이다.

따라서 그런 능력으로 인해서 그는 업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업이라고 해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처는 그것을 초월한다.

천상이나 지옥이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만일 그대에게 확신이 없다면 행동하지 말라.

한번 그대가 행동하면 그대는 생사의 바퀴 속에 빠져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를 후회할 것이다. 이 마음을 이해한다면 그대는 행위 없는 행동을 해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여래의 안목으로 사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처음 도를 만날 때 그대의 의식은 잘 집중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마치 꿈이나 환상을 보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이 모든 장면들이 다른 곳에서가 아닌 모두 그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대가 태양보다도 더 밝은 빛을 본다면 그대 속에 남아 있던 집착은 갑자기 끝나 버릴 것이다.

그리고 실체의 본성이 드러날 것이다.

 

달음의 시작은 그렇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대만이 아는 것이다.

그대는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

그대가 밤의 어둠 속에서 걷고 서고 앉고 눕고 하던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날 때 그대는 놀라지 말라.

것은 그대의 마음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거든 그대는 더 이상 경전을 읽거나 염불(念佛)을 할 필요가 없다.

이제 학식이나 지식 따위는 한낱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그것들은 그대의 각성을 가리는 구름일 뿐이다.


경전의 교리는 그대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다.

한번 그대가 자신의 마음을 본 이상 교리에 집착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중생에서 벗어나서 부처로 가기 위해서는 그대가 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대의 각성을 기르고 삶이 가져다주는 것을 받아들여라.

한번 중생이 그들의 본성을 보게 되면 모든 집착이 끝나 버린다.

각성은 더 이상 감추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대는 지금 당장에만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직 지금뿐이다. 그대가 도를 진정으로 찾고 싶다면 어떤 것도 붙잡지 말라.

한번 그대가 업에서 벗어나 그대의 각성을 기르기 시작하면 모든 집착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참된 이해가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그대는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광신자는 부처가 말한 뜻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더욱 애쓸수록 성현의 본뜻에서 더욱 멀어진다.

하루 종일 그들은 염불하고 경전을 독송한다.

그러나 자신의 신성한 본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장님이다. 그래서 그들은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처는 한가한 사람이다.

그는 복과 명성을 좇아서 뛰어다니지 않는다.

결국에는 사라져 버릴 것들이 뭐 그리 좋겠는가?



8. 달마의 관심론(觀心論)


석가모니 부처의 십대 제자 중에서 아난다(Ananda)는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기억하는데 있어서 제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처를 알지 못했다. 그가 한 것은 단지 공부하고 기억하는 것이었다. 아라한(Arhat)은 부처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는 수행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지만 인과의 법칙에 매여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의 업이다.

부처가 가르친 일의 반대만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부처를 모독하는 것이다. 그들은 죽여도 허물이 안 된다. 경에 일렀으되 "외도들은 믿을 수가 없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허물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불서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라고 했다.

자신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부처가 그들의 머리카락을 깎아 줄 필요가 없다. 속인도 역시 부처인 것이다. 출가자라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면 그들은 머리를 깎은 광신자일 뿐이다.

"그렇지만 결혼한 속인은 그들의 성생활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나는 단지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에 대해서 말했을 뿐이다.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남녀간의 단순한 성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번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게 되면 성은 기본적으로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즐거움과 함께 끝난다.

만일 어떤 습관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들은 그대에게 해를 끼칠 수가 없다. 그대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오욕의 육체 속에 머무른다 해도 그대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순수하다. 그것은 결코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

한번 그대가 집착을 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두고 보면 그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삶과 죽음에서조차 말이다. 그대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며 막힘 없는 영적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편안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의심하면 그대는 그 무엇을 통해서도 알 수 없다. 그대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행동할 때마다 그대는 생사의 바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그러나 그대가 한번 자신의 본성을 본다면 그대는 이미 부처이다. 그대가 백정의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백정은 짐승을 죽임으로써 업을 짓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나는 오직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에 대해서 말할 뿐이다. 나는 업을 짓는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업은 우리를 잡아 두지 못한다.

인도에서는 스물일곱 분의 조사께서 오직 마음의 등불을 전하셨다. 내가 중국에 온 것도 단 한 가지 이유에서이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 곧 부처'라는 대승의 즉각적인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무슨 교리나 헌신, 혹은 고행을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니다.

말과 행동, 견해나 개념은 모두 수시로 변하는 마음의 작용들이다. 모든 움직임이 바로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러나 마음은 움직이지도 않고 작용하지도 않는다. 그 작용의 본질은 비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어 있음이란 본래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은 우리에게 움직임이 없는 움직임, 떠남 없는 떠남, 보지 않고 봄, 웃지 않는 웃음, 듣지 않는 들음, 앎이 없는 앎, 즐거움이 없는 즐거움, 걸음 없는 걸음, 머무름 없는 머무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경전에서 "경전을 넘어서라. 생각을 넘어서라."라고 했다.

나는 얼마든지 계속할 수 있다.

마음을 지켜보는 이 설법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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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은 두 종류의 구도자들을 만들어 내었다.

아라한으로 불려지는 사람들과 보살이라 불려지는 사람들이다. 부처는 아라한의 길을 받아들였고, 세상에 많은 자비심이 있는 사람들도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다. 이 글의 '달마'는 보살의 길에 서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간혹 아라한을 비난하는 글귀가 보인다.

아라한(阿羅漢) -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바치다가 한번 깨달음을 얻게 되면,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만을 도울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그의 샘물에 목을 축이러 온다면 그 사람을 막지 않는다. 그러나 샘물에 마시러 오라는 초대는 하지 않는 사람.

히나야나(Hinayana) - 소승(小乘)

보살(菩薩) - 깨달음을 얻었을 때, 자신들의 기쁨 즉 진리(眞理)를 나누어주는 사람. 다른 사람을 초대하고 설득시켜서 같은 경험을 맛보도록 한다. 세상에 많은 자비심을 가진 사람

어둠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에 대한 자비심 때문에 피안으로 건너가기를 미룬다.

마하야나(Mahayana) - 대승(大乘)

외도(外道) - 티르탕카라(tirthankara) : 진리의 한쪽 면만 보는 사람들

아니찬티카(anicchantika) : 진리의 모든 면을 볼 수 있는 사람들

 

 

9. 달마의 불승론(佛乘論)


도의 본질은 집착을 벗어남에 있다.

또한 그것은 모든 모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사람들에게 수행의 목적지가 된다.

경에 이르기를 "벗어남은 곧 깨달음이다. 그것은 모든 모양을 부정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삼계(三界)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계이다.

삼계를 떠나는 것은 곧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부터 떠나서 계(戒), 정(定), 혜(慧)로 돌아감을 말한다.

경에 이르기를 "오직 사람이 세 가지 독(毒)에 물든 세상에 살면서 순수한 불법으로 자신을 키워갈 때 그가 곧 부처다."라고 했다.

세 가지 독이란 바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다.


대승은 모든 가르침 중에 가장 위대하다.

그것은 보살이 타고 가는 수레이다.

그들은 어떤 것을 사용함 없이 모든 것을 사용한다. 그들은 돌아다님 없이 종일토록 길을 간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수레인 것이다.

경전에 이르기를 "수레 없음이 바로 부처의 수레(佛乘)이다."라고 했다.


또 경에 이르기를 "오대(五大)가 한데 모인 동굴이 선(禪)의 마당이며 내면의 눈을 뜬 것이 대승의 문이다."라고 했다.

무엇이 이것보다 더 명료할 수 있겠는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음은 곧 선(禪)이다.

한번 그대가 이것을 알면 걷고, 머무르고, 앉고, 눕는, 그대가 행하는 모든 것이 선(禪)이다. 마음이 비어 있음을 아는 것이 바로 부처를 아는 것이다.

선의 길에서 보면 부처는 어떤 마음도 갖고 있지를 않다.

이 무심(無心)을 아는 것이 곧 부처를 보는 것이다.


아무런 후회 없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덕이다.

움직임과 고요함을 모두 초월하는 것이 가장 지고한 명상이다.

중생은 아라한이 고요함에 머무를 동안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그러나 지고한 명상은 이들 중생과 아라한 둘 다를 초월한다.

이러한 이해에 도달한 사람은 노력하지 않고도 모든 모양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치료하지 않고도 모든 병을 낫게 한다.

그러한 것이 선의 위대한 능력이다.

 

 


10. 달마의 중도론(中道論)


실체를 찾으려고 마음을 사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실체를 찾는 데에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것이다.

말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해탈을 얻은 사람이다.

감각에 물들지 않는 것은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은 자신의 집을 떠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서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은 도(道)에 이르는 것이며, 망상을 피우지 않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무지에 몰두하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 상태가 곧 열반(涅槃)이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은 피안(彼岸)에 다다른 것이다.

치우치지 않은 진리의 빛 속에서 본다면 중생은 성자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치우치지 않은 진리는 중생도 꿰뚫을 수 없고 성자도 행할 수 없다."고 했다. 치우치지 않은 진리는 오직 보살과 부처만이 행할 수 있다.


죽음을 삶과 다르게 보거나, 정(靜)을 동(動)과 다르게 보는 것은 이미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번뇌와 열반의 본성이 똑같은 공(空)이기에 서로가 다르지 않음을 보는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거나, 열반에 들어갔다거나, 아라한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열반이라는 망상의 덫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보살은 고통의 본질이 공허하다는 사실을 알며, 공허함에 머무르기에 항상 열반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열반은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며 열반이라는 것 자체도 초월하는 것이다.

마음이 움직임을 멈출 때 그것은 열반으로 들어간다.

열반은 바로 텅 빈 마음이다.

그 어떤 곳에도 안주하지 않을 때, 거기에 탐냄도 성냄도 어리석음도 없다.

마음이 하나의 허구이며 실재하는 것은 모두 공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존재하는 젓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님을 안다.

중생은 마음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보살과 부처는 마음을 만들어내지도 않으며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을 중도(中道)라고 부른다.

그대의 내면에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바깥 세계도 생겨나지 않는다.

바깥 세계와 마음이 둘 다 사라질 때 그것이야말로 참된 견해이다.

그러한 이해는 바른 이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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