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달마의 실체론(實體論)
경전에 이르기를 "지혜를 가로막는 것이 바로 무지이다."라고 했다.
마음이 존재하지 않을 때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둘 다 진리이다.
마음이 존재할 때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둘 다 거짓이다.
그대가 깨달아 알게 될 때는 실체가 그대를 따르게 된다.
그대가 깨닫지 못할 때는 그대가 실체를 따르게 된다.
실체가 그대를 따를 때는 실재적이지 않은 것도 실재적으로 되지만, 그대가 실체를 따를 때는 실재적인 것도 허구로 변한다.
그대가 실체를 따르면 모든 것이 거짓이 된다.
실체가 그대를 따를 때만이 모든 것이 실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실체를 찾을 때 그의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실체를 사용하지 않으며,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실체를 나타내지 못하며 실체는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지 않는다.
실체와 그의 마음은 모두 고요하며 그는 항상 삼매 속에 있기 때문이다.
경전에 이르기를 "아무것도 제 본성을 가진 것이 없다."라고 했다.
행동하라. 질문하지 마라. 그대가 질문할 때 그대는 이미 잘못되었다.
그대가 미혹되는 순간 여섯 가지 감각과 그 경계는 고통과 죽음을 맛보게 된다.
그대가 각성하는 순간 여섯 가지 감각과 그 경계는 열반과 불멸을 맛본다.
도를 구하는 자는 자신을 초월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을 발견할 때 그는 거기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가 도를 발견할 때 역시 거기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대가 도를 찾는 데 마음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벌써 미혹된 것이며 거기에 불성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게 된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거기에 불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깨어 있음이 곧 불성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을 미워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
그대의 모든 생각이 미혹되지 않도록 하라.
삶 속에서 그대는 열반이 시작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 속에서 어떤 재생도 없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형체에 미혹되지 않고 형체를 보며, 소리에 미혹되지 않고 소리를 듣는 것이 바로 해탈의 상태이다.
형체에 집착하지 않는 눈이 바로 선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소리에 집착하지 않는 귀 역시 선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자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다.
미혹됨이 없을 때 마음은 불국토가 된다.
미혹되는 순간 마음은 지옥으로 변한다.
12. 달마의 불종자론(佛種子論)
진리를 따르는 자는 도 위에 있다.
그것은 아라한과 중생의 시야를 넘어서는 것이다.
마음이 열반에 이르면 그대는 열반을 보지 못한다.
마음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열반을 보게 되면 그대는 마음 밖 어떤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그대는 이미 스스로 미혹된 것이다.
모든 고통은 부처의 씨앗이다.
고통으로 인해 지혜를 찾는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고통이 불성을 일으킨다는 말은 할 수 있어도 고통이 바로 불성이라는 말은 못한다.
그대의 마음과 육체는 하나의 밭이다.
고통은 씨앗이다.
지혜는 그 싹이고 불성은 그 열매이다.
그대의 마음속에 세 가지 독이 있을 때 그대는 예토(穢土)에 사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 속에 세 가지 독이 없을 때 그대는 정토(淨土)에 사는 것이다.진리가 아닌 말이 없다.
어떤 것을 꼬집어 이야기하지 않고도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도이다.
그러나 하루 종일 입을 다물고 있다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의 말은 그의 침묵에 의존하지도 않으며 그의 침묵은 말에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말은 그의 침묵과 떨어져 있지 않다.
말과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은 삼매 속에 있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아는 것을 말할 때 그대의 말은 자유롭다.
그대가 알지 못할 때 그대가 침묵을 지키더라도 그 침묵은 그대의 무지에 묶여 있다.
말이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그것은 어떤 집착과도 관계가 없다.
그리고, 집착 역시 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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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토(穢土) - 더러운 땅, 이승 <-> 정토(淨土)
13. 달마의 중생론(衆生論)
마음이 없이는 부처도 없다는 말의 뜻은 부처가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누구든지 부처를 보기 원한다면 부처를 보기 전에 먼저 그 마음을 보라.
한번 그대가 부처를 보았다면 그대는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린다.
만약 그대가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리지 않으면 그 마음은 그대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중생심과 불성은 물과 얼음의 관계이다 세 가지 독에 중독되면 그것은 중생심이 되고 세 가지 독에서 벗어나서 순수해지면 그것은 불성이 된다.
겨울이 되면 물은 얼음이 되고 여름이 되면 얼음은 물이 된다.
얼음을 없애고 나면 더 이상 거기에 물이 남아 있지 않다.
중생심을 제거하면 거기에 불성은 없다. 얼음의 본성이 바로 물의 본성이다.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키고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그것은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다.
고통이 깨어 있음을 만들어 내기에 중생은 부처를 낳는다.
그리고 깨어 있음은 고통을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에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고통이 없다면 깨어 있음을 만들어낼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깨어 있음이 없다면 고통을 부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킨다.
부처는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중생에 의해서 해탈된다.
그래서 모든 부처들은 미혹을 아버지로 삼고 탐욕을 어머니로 삼는다.
미혹과 탐욕은 중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그대는 이쪽 언덕에 있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저쪽 언덕에 있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자신의 마음이 텅 빈 것을 알고 그대가 어떤 형체도 없음을 볼 때 그대는 미혹과 깨어 있음을 모두 초월한다.
그리고 그대가 한번 미혹과 깨어 있음을 초월할 때 저쪽 언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에게는 이쪽 언덕도 없고, 저쪽 언덕도 없다.
그는 강물의 중간에도 없다.
아라한은 이 강물의 흐름 중간에 있다.
중생은 이쪽 언덕에 있다.
그리고 저쪽 언덕에는 불성이 있다.
14. 달마의 삼신론(三身論)
부처는 세 가지 몸을 갖고 있다.
그 세 가지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라고 부른다.
부처의 응신은 중생이 착한 일을 할 때 그 모습을 나타낸다.
보신은 그들이 지혜를 얻을 때 나타나며, 법신은 중생이 궁극을 깨달을 때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 부처는 세 가지 몸이 아니라 단 한 가지도 갖고 있지 않다.
세 가지 몸이란 말은 단지 사람들이 이해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중하의 세 가지 근기(根機)를 가진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해력이 얕은 사람은 부처를 화신불로 보고서 잘하면 복을 받고 못하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해력의 정도가 어느 정도에 이른 사람들은 부처를 보신불로 생각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리고 깊은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은 불성을 경험하기 위해서 부처를 법신불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궁극적인 이해에 도달한 사람은 부처를 어떤 모양(相)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텅 빈 마음이 곧 부처이기에 그들은 마음을 통하지 않고 바로 부처를 이해한다.
사람이 업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업이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오직 완전한 사람만이 이 생에서 어떤 업도 짓지 않고 또 그것의 응보도 받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업을 짓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성취한다."고 했다.
그대가 업을 지을 때 그대는 그 업 때문에 다시 태어난다.
그대가 업을 짓지 않을 때 그대는 업이 사라짐과 함께 해탈한다.
성현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은 성현이다.
중생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중생이다.
중생의 말을 포기하고 성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성현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 세상 사람들은 성현을 멀리서 우러러보기만 한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혜가 곧 성현의 지혜임을 믿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경전을 설하지 말라."라고 했다.
또 경에 이르기를 "그대가 보는 모든 모양은 모양이 아니다. 모양 아님을 알면 그대는 여래를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진리에 이르는 문은 무수히 많으며 그것들은 모두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의 모양이 허공처럼 투명해질 때 그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중생은 죽음에 대해서 걱정하면서 살아간다.
그들은 배가 부를 때도 굶주림을 걱정한다.
거기에는 커다란 불안이 항상 있다.
그러나 성현은 과거에 집착하지 않으며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에도 매이지 않는다.
순간순간 그들은 도를 따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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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불(三身佛)
법신(法身) - 만유의 본체, 비로자나불, 대일불(大日佛), 자성불(自性佛)
보신(報身) / 응신(應身) - 유형불신(有形佛身), 인연에 따라 나타난 불신(佛身), 노사나불
화신(化身) - 보신불을 보지 못하는 자를 제도하기 위해 화(化)하여 나타난 불신(佛身),
석가모니불
15. 달마의 혁파론(革破論)
"만일 누군가가 깨달음에 이르고자 결심했다면 그가 수행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다른 모든 방법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은 곧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어떻게 다른 모든 방법들을 포함 할 수 있습니까?"
마음은 모든 것이 자라나는 뿌리이다.
만일 그대가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이 거기에 포함된다.
그것은 나무와 같다.
모든 과일과 꽃들, 그리고 모든 가지와 잎들이 이 뿌리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그대가 그 뿌리를 자른다면 그 나무는 죽는다.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깨달음에 이른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슨 수행을 하더라도 헛된 것이다.
모든 선과 악이 바로 그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다.
이 마음을 벗어나서 어떤 것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떻게 마음을 지켜보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위대한 보살이 완전한 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갈 때 그는 마음의 활동에 두 가지 면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순수함과 불순함이다.
순수한 마음은 선한 행동을 기뻐하며 불순한 마음은 악을 생각한다.
불순함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 곧 성현이다.
그들은 고통을 초월해서 열반의 축복을 경험한다.
다른 사람들은 불순한 마음의 덫에 걸려서 자신의 업에 얽매여 있다.
그들이 곧 중생이다.
그들은 삼계를 방황하며 셀 수 없이 많은 집착으로 고통을 당한다.
그들의 불순한 마음이 그들의 진아를 가리는 것이다.
십지경(十地經)에 이르기를 "중생의 몸 안에는 부서지지 않는 불성이 있다. 그것은 태양과 같이 한없는 공간을 그 빛으로 채운다."고 했다.
그러나 한번 오감의 어두운 구름에 가려지면 그 빛은 독 안의 빛이 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열반경(涅槃經)에도 이르기를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는 어둠에 가리워 있다. 우리의 불성은 깨어 있음에 대한 자각이다. 그것은 남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다. 이 깨어있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해탈이다."라고 했다.
모든 선행은 이 깨어 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뿌리는 모든 미덕과 열반의 과실을 맺는 나무를 자라게 한다.
출처는 http://cafe.naver.com/munsusafreesaz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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