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돈황본 달마 어록’ 본문에 대한 해석의 출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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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달마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궁극에 이르는 길은 많다. 하지만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두 가지란 원리적인 방법과 실천적인 방법이다. 첫째 원리적인 방법이란 경전에 의해서 불교의 본질을 알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똑같은 진리의 본성을 지니고 있지만 감각과 망상에 의해 가려져 있어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망상을 등지고 실체를 향한 사람은 벽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나도 없고 남도 없다. 거기에는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다. 그런 사람은 경전을 대하고서도 흔들림이 없으며, 침묵으로 동의하며 이론과 하나를 이루어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런 상태를 우리는 이입(理入), 즉 원리로 도(道)에 들어갔다고 부른다.
실천적인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을 사행(四行)이라고 부르는데, 그 네 가지는 첫째 억울함을 참고, 둘째 인연(因緣)을 받아들이며, 셋째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넷째 불법(佛法)를 따라 사는 것이다.
첫째, 억울함을 참는 것이다.
진리의 길을 추구하는 구도자가 고통을 당할 때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셀 수 없는 세월 동안 나는 세속적인 삶 속에서 본질을 놓치고 생명의 여러 가지 겉모습을 바꾸어가며 방황해 왔다. 그러면서 까닭 없이 화를 내었고 까닭 없이 남을 미워하고 잘못을 저질렀다. 지금 나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과거의 잘못에 대해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어떤 신이나 인간도, 잘못된 행위가 어떻게 그 열매를 맺는지 미리 예견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고 열린 가슴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인다."
경에 이르기를 “그대가 역경을 만나도 걱정하지 말라. 그대의 의식은 그것을 통해서 깨어나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서 그대는 원리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억울함을 참음으로써 그대는 도(道)에 들어서게 된다.
둘째, 인연(因緣)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본래의 자아란 것이 없으며 단지 인연에 따라 움직인다. 고통을 당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모두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복된 일, 즉 부와 명성을 얻는 일을 만나더라도 그것은 과거에 우리가 뿌린 씨앗을 거두는 것일 뿐이다. 인연이 다하면 그것은 또다시 무(無)로 돌아간다. 그러니 기뻐할 것이 없다. 성공과 실패가 모두 인연을 따라오는 것임을 안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마음이 들뜨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마음의 동요가 없는 사람은 침묵 속에서 도(道)를 따르게 된다.
셋째,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욕망에 빠져 어떤 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깨어 있어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아니한다. 그들은 마음을 무위(無爲)에 고정시키고 몸마저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모든 현상계는 공허하다. 그것들은 추구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이며 복과 화는 영원히 함께 한다. 삼계(三界)에 머무는 것은 불타는 집 속에 있는 것과 같다. 불타는 집 속에 들어 있는 한 그 사람은 고통스럽다. 어떤 사람이 그 속에서 평화롭게 있을 수 있겠는가?
넷째는 불법(佛法)을 따라 사는 것이다.
불법이란 만물의 순수한 본성을 일컫는 것이다. 불법의 눈으로 보면 모든 현상은 공허하게 보인다. 거기에는 더러움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경에 이르기를 “불법이란 어떤 것도 그것이 존재하는 실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존재한다고 하는 집착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곧 불법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진리를 충분히 체득하여서 불법을 따라 살게 된다. 그리고 불법 그 자체에는 그 어떤 것도 보존할 것이 없다. 따라서 불법을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몸과 소유물을 아낌없이 바친다. 그들은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집착도 가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공(空)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들은 남을 도울 수 있으며,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까닭에 다른 여섯 가지 덕을 행할 수 있다. 그 여섯 가지 덕을 행하고도 그들은 전혀 행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불법을 따라 사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한 사람은 모든 것에서 손을 놓는다. 그는 망상을 그치며 어떤 것도 구하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구하는 것은 고통을 겪는 것이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축복 받은 것이다."라고 했다. 그대가 아무것도 구하지 않을 때 그대는 이미 도(道)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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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달마> (야나기잔 세이잔 지음, 김성환 옮김, 민족사 펴냄)에서 관련되는 부분을 인용하자면 이렇다. (蕭湛 注)
“무릇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은 많지만 간략히 말하면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이입(理入, 본래로 돌아가는 원리)이고, 둘째는 행입(行入, 본래로 돌아가기 위한 실천)이다. 이입이란 경전을 통해서 대의를 아는 것이며, 마음이 있는 사람은 범부나 성인 모두 한결 같은 진심을 갖고 있다고 깊이 믿는 것이다. 다만 객진(客塵, 밖에서 오는 번뇌)에 싸여 분명히 보지 못할 뿐이다. 만약 일시적인 생각을 멈추고 본래의 진실로 돌아가 벽관(壁觀)에 충실하면, 자신이나 타인, 범부건 성인이건 모두 평등하며 한층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게 된다. 무릇 고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도 이미 진리와 암묵 속에서 계합함으로써, 새삼스럽게 분별할 것이 없는 고요한 무위(無爲)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입이다. 행입이란 네 가지 생활방식으로, 기타의 것들은 모두 이속에 포함된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보원행(報怨行, 전생의 원한에 보답하는 행위)이며, 둘째는 수연행(隨緣行, 현생의 인연에 맡기는 행위)이며, 셋째는 무소구행(無所求行, 과보를 구하지 않는 행위)이며, 넷째는 칭법행(稱法行, 법의 진실에 부합하는 행위)이다.”
2. 달마의 혈맥론(血脈論)
삼계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마음으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들이 말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진리를 말로 정의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무엇을 마음에 전했다는 것입니까?"
그대는 묻는다. 그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나는 대답한다.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
만일 내게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대 역시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물을 수 있겠는가?
그대가 묻는 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시작도 없는 아득한 세월을 통해서 그대로 하여금 뭔가를 행하게 하고, 그대로 하여금 존재하게 한 그것이 바로 그대의 진짜 마음이다.
그것이 그대의 진짜 부처이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
이 마음을 벗어나서는 그대는 다른 어떤 부처도 찾을 수 없다.
이 마음을 벗어나서 깨달음이나 열반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연의 조건에서 벗어난 그대 본성의 실체가 바로 마음에 의해서 전달되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바로 열반이다.
그대가 마음을 벗어나 부처나 깨달음을 찾는다면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나 깨달음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허공을 움켜쥐려고 하는 것과 같다. 허공은 이름만 있을 뿐 어떤 모양도 없다.
그것은 그대가 잡거나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마음을 벗어나서 그대는 결코 부처를 볼 수 없다.
부처는 그대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왜 이 마음을 벗어나서 부처를 보려고 하는가?
과거와 미래의 부처들이 바로 이 마음에 대해서 말했다.
이 마음이 부처라고, 그리고 부처가 마음이라고 말이다.
마음을 벗어나서는 부처가 없고 부처를 벗어나서 마음도 없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벗어난 곳에 부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그대는 마음을 벗어난 곳에 부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그대가 자신을 속이는 한 결코 그대의 진짜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대가 생명도 없는 모양에 얽매이는 한 그대는 자유를 누릴 수가 없다.
만약 그대가 내 말을 믿지 않는다면 그대 자신을 계속 속여라.
그것은 부처의 잘못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안다면 그들은 더이상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않을 것이다.
부처는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사용해서 부처를 찾는다면 그대는 부처를 볼 수 없다.
그대가 마음 외에 다른 곳에서 부처를 찾는다면 그대는 자신의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부처를 섬기는 데 부처를 이용하지 말라.
그리고 부처를 불러내는 데 마음을 사용하지 말라.
부처는 경전을 암송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어떤 가르침도 추종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어떤 것도 마음에 담고 있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부처는 선도 행하지 않고 악도 행하지 않는다.
부처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이 바로 부처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고 부처를 생각하고 경전을 외우며 예물을 바치고 마음에 금언을 새긴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물론 부처를 섬기는 것은 좋은 업을 쌓는 것이며 경전을 외우는 것도 좋은 기억을 갖는 것이다.
마음에 금언을 새기는 것도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해주며 예물을 드리는 것도 장래에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부처는 없다.
3. 달마의 본성론(本性論)
만일 그대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스승을 찾기 위해서 삶과 죽음의 밑바닥에까지 이르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찾은 스승이라도 그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한 이상은 스승이 아니다.
그가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항상 암송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삶과 죽음의 바퀴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그리고 그는 해탈의 희망도 없이 삼계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옛날에 선성(善星)비구는 경전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았기에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선성비구도 이와 같을진대, 오늘날 몇 구절의 경이나 외우고서는 이것이 불법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리석은 바보들이다.
그대가 자신의 마음을 보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경전을 외우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부처를 찾기 위해서 그대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대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이 전부다.
그대의 본성이 바로 부처다.
그리고 부처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는 모든 계획과 근심 걱정으로부터 자유롭다.
만일 그대가 그대의 본성을 보지 않고서 하루 종일 깨달음을 찾아다니더라도 그대는 결코 깨달음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진리를 찾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 정도의 이해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대에게 스승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대 자신과의 갈등도 필요하다.
삶과 죽음은 귀한 것이다.
헛되이 그것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라.
그대를 속여 봐야 아무런 이익도 없다.
그대가 보석을 산처럼 쌓아 놓고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을지라도 그대의 눈이 열린 뒤에야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눈을 감고 있다면 무엇을 보겠는가?
그때 그대에게 보이는 것은 꿈이요, 환상임을 그대는 깨달아야 한다.
만일 그대가 곧 스승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대는 이번 생을 헛되이 살 것이다.
그대는 불성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진리이다.
스승의 도움 없이는 그대는 결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스승의 도움 없이 깨달은 사람은 백만 명 중 하나 정도이다.
만약 인연의 결합으로 부처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은 스승이 필요 없다.
그런 사람은 어떤 가르침보다 훨씬 뛰어난 각성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런 축복을 받지 않은 한 열심히 공부하라. 그러면 스승의 지도 아래에서 그대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부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흑과 백을 가릴 줄 모르는 미혹된 자들과 다르지 않다.
부처의 불법을 엉터리로 선언하는 사람들은 부처를 모독하고 불법을 뒤집어엎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치 비를 마음대로 불러올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설법은 부처의 설법이 아니라 마귀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선생은 마귀의 왕이다. 그들 제자들은 마귀의 앞잡이들이다.
그러한 가르침을 따르는 미혹된 자들은 부지중에 생사의 바다에 깊이 가라앉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본성을 보지 않는 한 어떻게 자신들을 부처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사람들을 속여서 마귀의 세계로 이끄는 거짓말쟁이들이다.
그들이 본성을 보지 않는 한 그들이 십이연기설을 설법한다 해도 그것은 마귀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마라(摩羅)에게 충성하는 것이지 부처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흑과 백을 구별할 줄 모르는 자들이 어떻게 삶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는가?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처다.
그렇지 않은 자는 누구든지 중생이다.
그러나 중생의 본성과 따로 떨어진 곳에서 부처의 본성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런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중생의 본성이 곧 부처의 본성이다.
이 본성을 벗어나서는 어떤 부처도 없다.
부처는 우리의 본성이다.
이 본성 외에 더 이상의 부처도 없고 부처 외에 더 이상의 본성도 없다.
4. 달마의 진신론(眞身論)
"만약 제가 저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부처를 생각하고, 경전을 독송하며, 공양물을 바치고, 계율을 지키며, 불법에 헌신하고, 선을 행하더라도 여전히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까?"
그렇다, 그대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왜 성취할 수 없습니까?"
그대가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모두 인연에 의한 것이며 좋은 업을 쌓은 결과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생사의 바퀴를 돌리게 한다. 그대가 생사의 바퀴 속에 매여 있는 한 그대는 결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한다. 그대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 모든 말들이 무의미한 것이다. 부처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부처는 업으로부터 자유롭다.
인연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이가 바로 부처다. 만일 그대가 부처가 어떤 것을 성취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부처를 중상모략하는 것이다. 부처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마음을 집중시키고 힘을 모으고 어떤 견해를 갖는 것이 부처에게는 불가능하다. 부처는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친 존재가 아니다. 부처의 마음은 비어 있는 것이 그 본성이라서 순수하고 순수하지 않은 것 모두를 초월한다. 그는 인과의 법칙에서 자유로우며 깨달음이나 수행에서도 벗어나 있다.
부처는 어떤 특정한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 부처는 선을 행하지도 않고, 악을 행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부지런하거나 게으르지도 않다. 부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며, 자신이 부처라는 생각에 매달리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그러니 다른 부처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라.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보지 않는 한 그대는 내가 말하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서 그저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이며 어리석은 바보들이다. 그들은 끝없는 허공에 떨어져서 마치 술에 취한 자처럼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들은 악으로부터 선을 가려낼 줄도 모른다.
만약 그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를 수행하려 한다면, 그대는 먼저 자신의 본성을 봐야 한다. 먼저 그대의 논리적인 사고를 멈춰야 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고서 깨달음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모든 종류의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업이 없기를 바란다. 그들은 모든 것이 공허하다고 생각하면서 악행을 저지르고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벗어날 희망이 없는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그런 견해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모든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됩니다. 왜 누군가 그의 몸이 죽었을 때 우리는 이 마음을 보지 못합니까?"
마음은 항상 존재한다. 그대는 단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존재한다면 왜 제가 보지 못합니까?"
그대는 꿈을 꾸어보았는가?
“물론입니다."
그대가 꿈을 꿀 때 그것은 그대인가?
“예, 바로 접니다."
그러면 꿈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그대와 어떻게 다른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르지 않다면 이 몸은 그대의 진짜 몸이 아니다. 그대의 진짜 몸, 즉 진신(眞身)은 그대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시작도 없는 영겁으로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달라진 적이 없었다.
그것은 결코 죽거나 새로 생기지 않는다. 사라지거나 다시 나타나지도 않으며, 불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 그것은 선행이나 악행으로 깨끗해지거나 더럽혀지지도 않으며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그것은 남자도 아니며 여자도 아니다. 과거도 아니며 미래도 아니다. 그것은 승려나 속인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늙은이나 젊은이도 아니며, 성자나 바보도 아니다. 그것은 부처도 아니며 중생도 아니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업으로부터 고통받지도 않는다. 그것은 어떤 모양이나 형체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허공과 같다. 그대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물론 잃어버릴 수도 없다.
그것은 산이 막혀도 통과하며 강이나 바위벽도 그냥 지나간다. 그것의 멈출 수 없는 힘은 오대(五大)의 산을 넘어가고 삼사라(Samsara)의 강을 건너간다. 어떤 업도 이 마음을 제한할 수 없다. 이 마음이 진신(眞身)이며 바로 그대의 본성이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해서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모든 사람이 이 마음을 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 마음의 빛에 의해서 손과 발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다. 그러나 그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은 그것은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이 마음이 뜻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와 같다. 그들이 왜 그것을 보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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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의 산 - 불교에서 말하는 다섯가지 기본요소 [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
삼사라의 강 - 윤회의 강을 가리키는 이름
5. 달마의 진여론(眞如論)
부처는 사람들이 미혹되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끝없는 윤회의 강에 뛰어드는 행동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해도 더 깊이 가라앉을 뿐이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미혹되지 않았다면 누가 항상 그들 앞에 존재해 있는 것에 대해 물어 보겠는가?
그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손과 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미혹된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부처가 될 때만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진정 지혜로운 자만이 이 마음을 안다.
이 마음은 불법의 본성으로 불린다. 또한 이 마음은 해탈로 불린다.
삶과 죽음이 이 마음을 제한하지 못한다. 이 마음을 제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것은 또한 변함없는 여래라고 불린다. 그것은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며, 신성한 자아이며, 불멸이고 위대한 성자다.
그 이름은 여러 가지로 불려지지만 그 본질은 변치 않는다. 부처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자신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마음의 능력은 한계가 없다. 그것의 나타남 또한 한이 없다.
그대의 눈으로 형태를 보고 그대의 귀로 소리를 들으며, 코와 혀로 냄새 맡고 맛보며 모든 방식으로 느낄지라도 그것은 모두 그대의 마음이다.
매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경에 이르기를 “여래의 모습은 끝이 없으며, 그래서 그는 깨어있다."고 했다.
여래의 여러 가지 모습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모습이 어떻게 변하든지 마음은 그것을 구분할 수 있으며 그것은 마음의 각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어떤 특정한 형상도 갖지 않으며 그 깨어 있음에도 한계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래(如來)의 모습은 끝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여래의 깨어 있음이다."
다섯 가지로 구성된 육체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삶과 죽음에 따라서 좌우된다. 그러나 진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한다.
여래의 진신은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전에 이르기를 "사람은 항상 자신 속에 부처의 본성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마하가섭도 오직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것이다.
또, 경에 이르기를 "형상을 가진 모든 것은 환상이다."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거기에 부처가 있다."라고 했다.
그대의 마음이 부처이다. 그러니 부처로 하여금 부처를 숭배하게 하지 말라.
부처나 보살이 그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더라도 그대는 그를 숭배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이 마음은 비어 있으며 어떤 형상도 담고 있지 않다.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모두 마귀이며, 그것들은 수행의 길에 자주 나타나는 것들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허깨비에게 무엇하러 숭배하겠는가?
그것에 숭배하는 자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리고 그것을 숭배하지 않는 자는 진실로 아는 자이다.
그대의 생각에 이끌려서 그것을 숭배하는 것은 마귀의 수하에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지적하는 것은 그대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해서이다.
부처의 본래 면목은 어떤 모습도 갖고 있지 않다. 이 말을 명심하라.
평상심에서 벗어나서 어떤 기이한 것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고 그대의 마음이 본래 순수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도 말라.
그대의 순수한 마음에 어디 그런 것들이 자리 잡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속에 비쳐지는 귀신이나 마귀나 거룩한 성자의 형상이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숭배하지도 말라.
그대의 마음은 본래부터 텅 비어 있다. 모든 형상들은 환상일 뿐이니 그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이 일어나든지 그것은 사물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즐거워할 필요도 없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생이 일어나고 죽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대는 여여함 속에서, 진여(眞如) 속에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삶이 어떻게 움직여 가는가를 지켜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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