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누군가가 물었다.
"초목을 베고 땅을 개간하면 죄보를 받습니까?"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죄가 있다고 단정하지도 못하고 죄가 없다고 단정하지도 못한다.
죄가 있고 없고는 사실 그 사람에게 달린 것이다. 있다 없는 하는 모든 법에 탐착하고 물들어서 버리고 취하는 마음이 남아 3구(三句)를 꿰뚫어 마음이 허공과 같지만 허공 같다는 생각도 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죄가 없다고 단정한다."
다시 말씀하셨다.
"죄를 짓고 나서 죄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하면 말이 안되고, 죄를 짓지 않았는데 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도 안 될 말이다.
율(律)에서 말하기를, '본래 미혹하여 살인을 하거나 나아가 서로 살인을 한다 해도 살생죄라 하지 못한다' 고 하였는데 하물며 선종(禪宗) 문하에서이겠는가. 마음이 허공 같아서 어디에도 머물지 않으며, 허공 같다는 생각도 없는데 죄가 어디에 자리하겠는가."
다시 말씀하셨다.
"선도(禪道)는 닦을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않으면 된다."
"안팎의 마음을 녹여 다하기만 하면 된다."
"경계를 관조하는 쪽으로 말하지만 지금 유·무 등 모든 법을 관조하는데 아무 탐욕과 집착이 없고 또한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공부하면 될 것이다. 공부는 때묻은 옷을 빠는 것과도 같은데 옷은 본래 있는 것이나 때는 밖에서 온 것이다. 유·무 등 모든 소리와 색은 기름때와도 같은 것이니 아예 마음에 두지 말라.
보리수 아래 32이상과 80종호는 색에 속하고, 12분교(十二分敎)는 소리에 속한다. 그러니 이제 유·무와 모든 성색으로 흐르는 허물을 끊고 마음을 허공 같게 해야 한다. 이렇게 공부하기를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해야 할 것이다.
죽는 마당에서는 옛날부터 익숙했던 길을 찾아간다 해도 오히려 끝까지 가지 못하는데, 그때 가서 새로 조복하여 공부한다면 기약이 없다.
죽는 순간에는 좋은 경계가 한꺼번에 눈앞에 나타나는데 마음으로 더 좋아하는 곳을 먼저 받게 된다. 지금 나쁜 일을 하지 않으면 그때 가서도 나쁜 경계가 없고 설사 나쁜 경계가 있다 해도 좋은 경계로 변한다. 죽는 순간에는 두렵고 미친 마음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낱낱의 경계법에 아무런 애욕과 물들임이 없다 해도 그렇다는 생각에 머물지 말아야 자유인이다. 지금은 인(因)이고 죽음은 과(果)인데 과업(果業)이 나타나면 어째서 두려워하는가. 옛과 지금이 달라짐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에도 지금이 있다면 지금에도 옛이 있을 것이며, 옛날에 부처가 있었다면 지금도 부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자유를 얻는다면 미래 세상까지 자유로울 것이다.
한 생각 한 생각이 유·무 등 모든 법에 매이지 않는다면 예나 지금이나 부처가 사람이고 사람이 부처일 뿐이다. 이것이 삼매정(三昧定)이기도 하니, 정(定)을 가지고 정에 들어갈 필요가 없고, 선(禪)을 가지고 선을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부처를 가지고 부처를 찾을 필요도 없다.
다음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법은 법을 구하지 않고, 법은 법을 얻지 않으며, 법은 법을 행하지 않고, 법은 법을 보지 않아서 자연히 법을 얻는 것이지, 얻음으로써 다시 얻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은 이렇게 바르게 법을 사유하여 독존해야 하며, 독존한다고 인식하는 법지(法智)도 없어야 한다. 본성은 그대로가 여여(如如)하여 인(因)에 의해 자리가 매겨지는 것이 아니니, 이것을 체결(體結)또는 체집(體集)이라 이름하기를 한다.
지혜로 알 수도 없으며 식(識)으로 분별할 수도 없는 것으로서 사량이 끊긴 곳이며 응적(凝寂)한 자체가 다하여 헤아림이 영원히 없다. 마치 바다에서 큰 물결이 다하면 파랑이 다시는 생기지 않는 것과도 같다."
또 말씀하셨다.
"큰 바닷물에 바람이 없다가 홀연히 소용돌이가 생기면 그것이 생긴 줄을 안다하니, 이것은 미세한 가운데 거침(細中之鹿추)이다.
앎에서 앎이 없어져 여여(如如)함으로 돌아감은 미세한 가운데 미세함(細中之細)이니, 이것은 부처의 경계이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아는 것이니 이를 최고의 삼매(三昧之頂), 삼매왕(三昧王) 또는 이염지(爾 智)라고도 한다.
이것이 모든 삼매를 내고 모든 법왕자(法王子)를 관정(灌頂)하며·색·성·향·미·촉·법 모든 국토에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안팎으로 통달하여 어디든 막힘이 없다.
일색(一色)이 일진(一塵)이고 일불(一佛)이 일색(一色)이며 일체불(一切佛)이 일체색(一切色)이고, 일체진(一切塵)이 일체불(一切佛)이다.
또한 모든 색·성·향·미·촉·법도 이처럼 낱낱이 모든 세계에 두루 가득하다.
이는 미세한 가운데 거친 것으로서 좋은 경계이니, 모든 상근기가 알고 느끼고 보고 듣는 것이며, 모든 상근기가 생사에 드나들면서 일체 유·무들을 뛰어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상근기가 설명하는 것이며, 상근기가 드는 열반이며, 더할 것 없는 도이며, 견줄 것 없는 주문(呪)이다. 모든 말씀 가운데 으뜸가는 가장 심오한 말씀으로 다다를 사람이 없으며, 모든 부처님이 아껴주신다.
마치 맑은 파도가 맑고 흐리며 깊고 넓은 물의 모든 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모든 부처님이 아껴주는 것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당장 깨끗하고 밝은 몸을 나타낼 것이다."
또 말씀하셨다.
"그대들 스스로는 평등하고 말도 평등하듯 나도 그러하며 불국토 하나 하나마다 소리·냄새·맛·촉감 등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다. 이로부터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에 오르기까지 가로 세로가 모두 이와 같다.
처음 안 것을 붙들고 깨달았다(解)고 한다면 그것은 '정결(頂結)' 또는 '정결에 떨어졌다(墮頂結)' 고 한다. 그것은 모든 번뇌의 근본으로 스스로 지견(知見)을 내어 밧줄도 없이 자기를 결박하기 때문이다.
알 대상에 일부러 얽매여 25유(二十五有)의 세간이 있게 되면, 다시 일체 번뇌문을 흩어 다른 사람을 결박한다. 여기서 처음 안다 한 이승의 견해를 '이염식(爾 識)' 또는 '미세한 번뇌'라 한다.
바로 이것을 끊어 없애고 나면 '정신을 돌려 공(空)의 소굴에 안주한다' 하며, '삼매의 술에 취한다' 고 한다. 또한 '해탈 마군에게 결박되어 세계의 생성과 파괴가 좌우되는 정력(定力)이 다른 국토로 새어나가도 전혀 느끼거나 알지 못한다' 하며, '두려워할 해탈의 깊은 구덩이' 라 하여 보살은 모두가 이를 멀리 여윈다.
경전을 읽고 교학을 공부하며 말씀을 배우는 것은 필연코 자기에게로 환원되어야 한다. 모든 말씀은, 지금의 비추어 깨닫는(鑑覺) 성품이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경계에 휩쓸리지 않음을 밝혀주는 것이다.
그대들 여러 스님네가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경계에 붙들려 있음을 반조(返照)해 본다면 그것은 금강의 지혜(金剛智)로써 자유롭게 홀로 설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줄 알지 못한다면 12부경을 다 외워낸다 해도 증상만(增上慢:깨치지 못하고서 깨쳤다고 착각하는 자만심)을 이룰 뿐이어서 부처님을 기만하는 것이지 수행이랄 수 없다.
모든 색과 소리를 떠나고, 떠났다는 그것에도 머물지 않으며, 안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아야 수행이랄 수 있다.
경전 읽고 교학을 공부하는 것은 세속의 입장에서라면 훌륭한 일이겠지만 이치를 밝힌다는 입장에서는 답답한 일이니, 10지 수행인도 벗어나지 못하고서 생사 강물에 들게 되는 것이다. 3승교(三乘敎)는 다만 탐내고 성내는 등의 병통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지 그 의미를 이해하려 들 필요는 없다. 이해가 탐욕이 되고 탐욕은 다시 병통이 되기 때문이다.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법을 떠나고 떠났다는 그것에서도 떠나 3구 바깥으로 철저히 벗어나면 저절로 부처와 다를 것이 없다. 자기가 부처인데, 부처가 되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까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 그저 부처 아닌 것이 근심일 뿐이다.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법에 얽매이면 자유롭지 못하다. 이치를 확실히 알지 못한 채 복과 지혜부터 갖추면 복과 지혜에 실려 다니는 것이 마치 천민이 높은 분을 부리는 꼴이 되니, 우선 이치를 확실히 안 뒤에 복과 지혜를 갖추는 것이 좋겠다.
복과 지혜를 갖추려 하는가. 그때 그때마다 금을 흙으로 만들고 흙을 금으로 만들며, 바닷물을 소락( 酪)으로 변화시키고 수미산을 쪼개 가루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사해바닷물을 움켜서 한 터럭에 넣으며, 하나의 의미에서 무량한 의미를 내고, 무량한 의미에서 하나의 의미를 내야 할 것이다."
또 이렇게도 말하였다.
"실각(失脚)해서 전륜왕(轉輪王)이 되면 4천하(四天下) 사람들에게 하루에 10선(十善)을 행하게 하나 그 복과 지혜는 자기를 비추어 깨닫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을 왕이 될 인연이라 하나. 유·무 모든 모든 법에 반연하고 집착함을 전륜왕이라 하는 것이다.
지금 가슴속으로 유·무 등 모든 법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아서 4구(四句) 밖으로 벗어남을 비었다(空)고 한다. 공(空)을 불사약(不死藥)이라고도 하는 것은 죽은 왕(前王)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불사약이라고는 하나 왕과 함께 복용하니 두 가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 가지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다 둘이다 하는 생각을 내면 역시 전륜왕이라 할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이 복과 지혜와 네 가지 물건(四事:의·식·주·약)으로 4백만억 아승지 세계의 6취4생(六趣四生)에게 공양하여 꼬박 80년을 그들의 바램을 들어주고는 뒤에 생각하기를, '그러나 이 중생들은 모두가 노쇠하였으니 불법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게 하고 아라한도(阿羅漢道)까지도 얻게 하리라' 한다 하자.
중생에게 즐겁게 하는 것만을 베푼다 해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는데, 하물며 수다원과와 아라한도를 얻게 한 이 시주(施主)의 무량무변한 공덕에랴. 그러나 50번째 사람이 경전을 듣고 따라서 기뻐한(隨喜) 공덕만은 못한 것이다.
보은경(報恩經)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마야부인은 5백의 태자를 낳아 그들 모두 벽지불과(壁支佛果)를 얻었는데 멸도(滅度)하고는 각각 탑을 세워 공양하고 낱낱에게 예배하며 찬탄하였다. 그러나 위없는 보리를 얻을 자식 하나 낳아서 내 마음(心力) 더느니만은 못하다.'
지금 백천만 대중 가운데서 체득한 사람이 하나 있다면 그 가치는 삼천 대천 세계와 맞먹을 만하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이치를 깊이 깨달으라고(玄解) 늘 대증에게 권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이치가 현묘하여 복과 지혜를 부릴 수 있다면 마치 높은 사람이 천한 사람을 부리는 것과도 같으며, 머물지 않는 수레와도 같다.
그런데 이것을 붙들고 깨달았다는 생각을 내면 '상투 속의 구술' 이라 하며, 또는 '값을 매길 수 있는 보배 구슬' 이라 하며, 또는 '똥을 퍼 들여온다' 고도 한다.
이것을 붙들고 깨달았다는 생각을 내지 않으면 왕의 상투 속에 있는 밝은 구슬을 그에게 주는 것과도 같으니 '값을 매길 수 없는 큰 보배' 라 하며, 또는 '똥을 퍼냈다' 고도 한다.
부처님은 속박을 벗어난 사람인데도 도리어 얽매임 속으로 와서 이렇게 부처가 되셨다. 또한 생사 저쪽 사람이며, 현묘하게 끊긴 저쪽 사람인데도 이쪽 언덕으로 돌아와 이렇게 부처가 되셨다.
그러나 사람과 원숭이는 함께 가지 못하는 법이니, 여기서 사람은 10지(十地)보살을 비유하고 원숭이는 범부를 비유한 것이다.
경전을 읽어 알고자(知解) 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3승교를 이해하여 영락의 장엄구를 훌륭히 얻고 32상의 굴택(窟宅)을 얻는 것으로 부처를 찾는다면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경에서 말하기를, '소승의 3장학(三藏學)을 탐착하는 자와는 가까이 하지도 말라' 하였는데, 하물며 스스로 그러는 경우야 어떠하겠는가. 그는 파계한 비구이며 이름뿐인 아라한(名字羅漢)으로서, 『열반경』에서는 16악율의(十六惡律義)에 넣고 있다. 그것은 물고기를 사냥하며 이익을 위해 고의로 살생하는 것과 똑같은 짓이다.
대승방등(大乘方等)은 감로수 같기도 하고 독약 같기도 하니, 없애버릴 수 있다면 감로 같고, 없애버리지 못하면 독약과 같다. 경전을 읽으면서 저 생사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그 의미를 꿰뚫지 못할 것이니, 아예 읽지 않는 것이 휠씬 낫다.
한편으로는 경전도 읽고 선지식도 참례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안목을 갖춰 그 생사라는 말을 분별해야 할 것이다. 명백하게 분별해내지 못한다면 결국 꿰뚫지 못할 것이어서 비구라는 속박만 가중될 뿐이다.
그러므로 교학에서 현묘한 종지를 배운 사람은 문자를 읽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마치 '자체(體)는 설명하여도 모습(相)은 설명하지 않으며, 의미는 설명해도 문자는 설명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도 같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진실한 말' 이라 하며, 문자를 설명하면서 모조리 비방이라 한다면 그것을 '삿된 말 '이라 한다. 보살의 설명은 법다워야 하니, 그래야 '진실한 말' 이라 할 것이다.
중생들에게 마음(心)은 지키게 하되 현상(事)에는 매달리지 않게 해야 하며, 실천(行)은 하게 하되 이론(法)을 붙들지는 않게 해야 한다. 사람을 설명해야지 문자를 설명해서는 안되며 의미를 설명해야지 문자를 설명해서는 안 된다.
'욕계에는 선(禪)이 없다' 고 설명하는 것 역시 두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다.
'욕계에는 선(禪)이 없다' 고 말했다면 무엇을 의지하여 색계(色界)에 이룰 수 있을까. 먼저 발심 수행의 단계[因地]에서 두 가지 정(定)을 익혀야 뒤에 초선(初禪)의 유상정(有想定)과 무상정(無想定)에 이를 수 있다.
유상정은 색계사선(色界四禪) 등의 하늘에 태어나고, 무상정은 무색계사공(無色界四禪) 등의 하늘에 태어난다. 그러므로 욕계에는 선이 없음이 분명하며 선은 색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