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광록(百丈廣錄)>
1.
말로는 불법과 세속을 가려야 하고, 총론과 각론을 나누어야 하며, 궁극적인 교설(了義敎語)인지 방편교설(不了義敎語)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궁극적인 교설로는 맑음을 논하고 방편교설로는 탁함을 논하며, 염법(染法) 쪽의 허물을 설명하여 범부를 가려내고, 정법(淨法) 쪽의 허물을 설명하여 서인을 가려내야 하니, 이것은 9부교(九部敎:교학의 총칭)에 입각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목전의 눈 먼 중생에게는 선지식의 지도를 받게 해 주어야 하며, 귀머거리 속인 앞에서 말할 경우에는 직접 그를 출가시켜 계율을 지키고 선정(禪定)을 닦으며 지혜를 배우게 해 주면 된다.
한편 테두리를 벗어난 범부에게는 그런 식으로 지도해서는 안되니 유마힐(維摩詰)이나 부대사(傅大士) 같은 부류가 여기에 해당한다.
백사갈마(白四 磨)를 받은 사문 앞에서 말할 경우, 그들은 계·정·혜(戒定慧)의 힘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으니, 다시 그런 식으로 설명한다면 그것을 맞지 않는 말(非時語)이라 할 것이며, 맞지 않는 설명이므로 꾸며서 하는 말(綺語)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문에게라면 청정한 법 쪽의 허물을 설명해야 한다. 즉 있다 없다(有無)하는 등의 법을 여의고, 닦고 증득하는(修證) 모두를 떠나며, 그것을 떠났다는 것조차 떠날 것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물든 습기(習氣)를 깎아 없애려는 사문도 탐욕과 성내는 병통을 없애버리지 못했다면 역시 귀머거리도 속이라 할 것이니, 그에게도 선정을 닦을 지혜를 배우게 해야 한다.
이승(二乘)의 경우는 탐욕과 성내는 병통을 다 쉬어 버렸으나 탐내는 마음이 없어진 경계에 눌러앉아 옳다고 여기니 이는 무색계(無色界)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처님의 광명을 가리고 부처님 몸에 피를 내는 것이므로 그에게도 선정을 닦고 지혜를 배우게 해야 하며, 깨끗하고 더러움을 구별해 주어야 한다.
더러운 법이란 탐욕·성냄.·애착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우며, 깨끗한 법이란 보리·열반·해탈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운다. 여기에서 비추어 깨달으면(鑑覺) 깨끗하고 더러운 양쪽 갈래와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법과 색·소리·냄새·맛·촉감·생각과 세간·출세간법에 털끝만큼의 애착(愛取)도 전혀 없게 된다.
이미 애착하지 않게 되고 나서는 애착하지 않음에 눌러앉아 옳다고 여기는데 그것을 처음선(初善)이라 한다. 이것은 조복된 마음(調伏心)에 안주하는 것이며 뗏목이 아까와 버리지 못하는 성문으로서 이승(二乘)의 도이며, 선나과(禪那果)이다.
애착하지도 않고 애착하지 않음에 눌러앉지도 않으면 이를 중간선(中善)이라 한다. 이는 반자교(半字敎)로서 아직은 무색계(無色界)이나 이승과 마군의 도에 떨어짐은 면하였으나, 선병(禪病)과 보살의 속박이 있다.
애착하지 않음에 눌러 앉지도 않고 눌러앉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다면 이것은 마지막선(後善)이라 한다. 이는 만자교(滿字敎)로서 무색계(無色界)에 떨어짐을 면하고, 선을 닦는 병통에 떨어짐을 면하며, 보살승에 떨어짐을 면하고, 마왕의 지위에 떨어짐을 면한다. 그러나 지혜(智)에 막히고 지위(地)에 막히고 행(行)에 막혀 자기 불성(佛性)을 보는 데에는 마치 밤에 무엇인가를 보는 것과 같다.
불지(佛地)에서 두 가지 어리석음(二愚)을 끊는다 하는 경우는 첫째 미세소지우(微細所知愚), 둘째 극미세소지우(極微細所知愚)이다. 그러므로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은 미진(微塵)을 타파하여 경전(經卷)을 벗어났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가령 이 3구(三句:세 가지 善)를 꿰뚫어 세 단계에 매이지 않는다면 교학(敎家)에서는 그것을 세 번 뛰어 그물을 벗어난 사슴에 비유하며 번뇌를 벗어난 부처라고 하는데 그를 구속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연등불(然燈佛)의 뒷 부처님에 속하며, 최상승(最上乘), 상상지(上上智)로서 불도 위에 선 것이다.
이 사람은 불성을 가졌으며 스승(導師)으로서 막힘 없는 바람과 막힘 없는 지혜를 구사한다. 뒤에 가서는 인과와 복덕·지혜를 자재하게 굴리니, 수레를 만들어 인과를 실어 나르며 삶에 처하여도 삶에 매이지 않고 죽음에 처하여도 죽음에 매이지 않으며, 5음(五陰)에 처하여도 문이 여닫히듯 5음에 매이지 않아, 가고 머묾에 자유롭고 드나듦에 어려움이 없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지위와 우열을 논할 것이 없으며 개미 몸을 받아서까지도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모두 불가사의한 정토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는 속박을 풀어주는 말일뿐이니 저들 스스로에게 부스럼이 없다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부처다 보살이다 하는 것도 부스럼이니, 있다 없다는 식으로 법을 설명했다 하면 모조리 긁어 부스럼이 되는 것이다.
일체법은 모두 유·무(有無)에 포함되는데, 10지보살(十地菩薩)은 탁류(濁流)가 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은 청류(淸流)가 된다. 맑은 모습은 곱게 설명하지만 그것은 흐린 쪽의 허물만 말하는 것이 된다.
지난날 10대제자(十大弟子) 사리불(舍利弗)·부루나(富樓那)와 바른 믿음을 가진 아난(阿難)·삿된 믿음을 가진 선성(善星) 등은 저마다 본보기나 법칙이 있었는데, 모두들 부처님에게 설파당했던 것이다. 그들은 팔만겁을 선정에 머무는 사선팔정(四禪八定)의 아라한은 아니었으나 행할 바를 의지하고 집착하여 정법(淨法)이라는 술에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성문인(聲聞人)의 불법을 들으면 위없는 도를 행할 마음을 내지 못하고 그래서 선근(善根)을 끊은 불성 없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며, 경전(敎)에서는 이를 "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는 두려워할 만한 곳이다" 라고 하였다.
한 생각 마음이 물러나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쏜살같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물러난다고만 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물러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문수·관음·세지 등이 수다원(須陀洹) 지위로 되돌아와 같은 부류가 되어 이끌어 주는 경우를 물러났다 할 수는 없으니, 그런 상황을 수다원이라 부를 뿐이다.
비추어 깨달아(鑑覺) 유·무 모든 법에 매이지 않고 3구(三句)와 맞고 안 맞는 모든 경계를 꿰뚫으면 백천만억의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였다는 소문을 듣는다 해도 듣지 못한 듯하고, 그 듣지 않는다는 것에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다.
이런 사람을 두고 물러났다 한다면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디에도 매어 둘 수 없는데 이를 "부처님은 늘 세간에 계시면서도 세간법에 물들지 않는다" 고 한다.
그러니 부처님이 법륜 (法輪)을 굴리느라 물러난다고 해도 불·법·승(佛法僧)을 비방하는 것이며, 부처님이 법륜을 굴리지 않아 물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역시 불·법·승을 비방하는 것이다.
조법사(肇法師)가 말씀하시기를, "보리의 도는 재볼 수 없음이 위없이 높고 끝없이 드넓으며 끝없이 깊숙하여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말을 하면 살받이가 되어 화살을 부르는 꼴이다" 라고 하였다.
비추어 깨닫는다(鑑覺) 할 때, 그것은 더러움에 대한 깨끗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니 비추어 깨닫는 것이 그런 것이라 인정한다면 비추어 깨닫는 것 바깥에 따로 무엇이 있어 모조리 마군의 말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비추어 깨닫는다는 것을 붙들고 머문다면 그것은 마군의 말과 같으며, 자연외도(自然外道)의 말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비추어 깨닫는다는 것이 자기 부처라 해도 그것은 짧은 말이며 헤아리는 말이니 여우 울음소리와도 같아서 오히려 끈끈하게 달라붙는 집착 쪽에 속한다.
스스로 알고 절로 깨닫는 이것이 자기 부처인 줄 전혀 알지 못하고, 밖으로 치달려 부처를 찾는다. 선지식의 설법을 의지하여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 나오게 하는 약을 지어 밖으로 치달려 구하는 병을 치료한다. 이윽고 밖으로 치달려 구하지 않게 되면 병이 나았으니 약은 버려야 한다.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는 데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선병(禪病)이며, 영락없는 성문이다. 마치 물이 얼음이 되면 얼음 자체가 물이긴 하나 목마름을 풀어주기 어려운 것과도 같으며, 또는 꼼짝없이 죽을병이라 하기도 하니 세상 의원들도 속수무책일 뿐이어서 원래 이들은 부처가 아니다.
부처라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한다. 부처란 중생 편에서 쓴 약이니 병이 없으면 먹을 필요가 없다. 약과 병이 함께 없어지면 맑은 물과 같다. 부처란 감초를 넣은 물이나 꿀물과도 같아 매우 달콤한 것이나 맑은 물 쪽에서 보면 원래 없다거나 있다거나를 집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이 이치는 누구나 본래 가진 것이며, 모든 부처와 보살은 구슬(珠)을 보여주는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원래 어떤 물건이 아니므로 그것을 알 필요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으며, 그것이 옳다 그르다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상대적인 개념 (兩頭可)을 끊기만 하면 된다. 있다느니 있지 않다느니 하는 말을 끊고, 없다느니 없지 않다느니 하는 말을 끊으면 양쪽의 자취가 나타나지 않아 양쪽에서 그대를 잡아당겨도 끌리지 않으며, 어떠한 테두리(量數)도 그대를 얽어매지 못한다.
그리하여 부족하거나 완전하지도 않고 범부(凡夫)도 성인(聖人)도 아니며 밝음도 어두움도 아니다. 앎이 있음도 앎이 없음도 아니고, 얽매임도 해탈도 아니어서 어떠한 이름도 붙일 수 없다.
어째서 실다운 말이 아닌가. 허공을 다듬어 불상을 만든다든가 허공을 청·황·적·백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법은 무엇으로도 견줄 수 없고 비유할 수도 없으므로, 법신은 함이 없어 어떠한 테두리에도 떨어지지 않는다(法身無爲不墮諸數)"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인의 몸은 이름이 없어 설명할 수 없으며, 실다운 이치인 공문(空門)에는 닿기 어렵다.
마치 어디든지 앉을 수 있는 파리도 불꽃 위에는 앉지 못하듯 중생도 그러하여 어디든 반연(攀緣)할 수 있으나 반야(般若)에는 반연하지 못한다.
선지식을 찾아뵙고 하나 하나 알기를(知解) 구한다면 그것은 선지식 마군이니, 말과 견해를 내기 때문이다.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내어 일체중생을 다 제도한 뒤에야 성불하겠다고 발원하면 이는 보살법지(菩薩法智)의 마군이니, 서원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재계(齋戒)를 지키고 선(禪)을 닦으며 지혜(慧)를 배우는 것은 유루선근(有漏善根)이다. 그들은 비록 도량에 앉아 성불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항하사수 모래알만큼의 사람을 제도한다 해도 모두 벽지불과(壁支佛果)를 얻을 뿐이니, 이는 선근(善根)의 마군으로서 탐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탐착하지 않고 물들지 않으며 신령한 이치만이 오롯이 남아 매우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앉아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삼매(三昧)의 마군이니, 오랫동안 맛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열반에 올라 탐욕을 떠나 고요해지면 그것은 마군의 업(業)이다. 지혜로 해탈하였다 해도 얼마간 마군의 그물을 벗어나지 않으면 비록 백권 위타경 (圍陀經)을 이해한다 할지라도 모조리 지옥의 찌꺼기로서 부처님과 같아지고자 하나 될 수 없는 일이다.
선·악과 유·무 등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 즉시 공(空)에 떨어지는데 근본(根本)을 버리고 지말(支末)을 쫓는 줄을 모르므로 도리어 공에 떨어지는 것이다. 부처와 보리, 유· 무 등의 모든 법을 구하는 것은 근본을 버리고 지말을 쫓는 것이다.
지금 거친 밥으로 생명을 잇고 헤진 옷을 기워 추위를 막으며 목마르면 물을 마시는 일 외에는 모두 유·무 등의 법일 뿐이어서 털끝만큼도 매인 생각이 없다면 이 사람은 점차 가볍고 밝아질 소지가 있다.
선지식은 있음(有)에 집착하지 않고 없음(無)에도 집착하지 않아서 십구(十句) 마군의 말을 벗어나 말을 꺼내도 사람을 얽어매지 않는다. 설법을 해도 스승이라 자칭하지 않고 골짜기의 메아리같이 말이 천하에 가득 차 입으로 짓은 허물이 없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쏠린다.
만일 "나는 설법할 수 있다"라든가 "나는 스승이고 너는 제자이다"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마군의 말이다. 또 "눈빛이 부딪치는 곳에 도가 있다"라든가, "부처는 부처가 아니고, 보리(菩提)·열반(涅槃)·해탈(解脫)..." 하면서 근거없는 말을 한다. 또한 하나하나 알음알이(知解)를 근거없이 설명하며 한 손을 들고 한 손가락을 세우는 것을 보고는 "이것이 선(禪)이고 도(道)다"라고 한다.
이런 말은 사람을 얽어매는 것으로 그칠 기약이 없이 비구에게 결박만 더해주는데, 말하지 않는다 해도 구업(口業)을 짓은 것이다. 그러니 마음의 스승이 될지언정 마음을 스승으로 삼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방편교설(不了義敎)에는 인간·천상의 스승이 있고, 부처님(導師)이 있으나 궁극적인 교설(了義敎)에서는 인간·천상에게 스승이 되지 않으며 법을 스승 삼지도 않는다. 마음(玄鑑)을 붙잡지 못했거든 우선 궁극적인 교설(敎說)에 의지해야 할 것이니 조금은 가까운 데가 있기 때문이다. 방편교설은 귀머거리 속인 앞에서나 설명하는 것이 합당할 뿐이다.
한편 유·무 모든 법에 머물지 않고 머뭄 없는 데에도 머물지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다면 그를 큰 선지식 또는 오직 한 분이신 부처님이라 한다. 이 큰 선지식에는 두 사람이 없으니 나머지는 모조리 외도이거나 마군의 말이다.
여기서는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모든 유무 대경법(對境法)을 깰 뿐이다. 탐착하고 물들지 말 것이며, 결박을 푸는 일을 하지 않기만 하면 되니, 사람을 가르치는 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가르칠 말이 따로 있고, 사람에게 줄 법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를 외도나 마군의 말이라 한다.
궁극적인 교설인지 방편교설인지를 알아야 하며, 생사를 말하는 것인지 약병(藥病)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또한 반대로 비유를 든 것인지(逆喩) 유사한 비유를 든 것인지(順喩)를 알아야 하며, 총론인지 각론이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닦아서 부처가 된다", "닦을 것도 있고 깨칠 것도 있다", "마음이 곧 부처다", "마음 그대로가 부처다", "이것은 부처님 말씀이다" 라고 한 것은 방편교설이고 부정논법이 아니며 총론이고 한 됫박쯤 되는 말이다. 또한 염법(染法) 쪽만을 가려 하는 말이고 유사한 비유를 드는 말이며, 죽은 말이고 범부 앞에서 하는 말이다.
한편 "닦아서 부처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닦을 것도 없고 깨칠 것도 없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부처도 부처님 말씀이다"라고 한 것은 궁극적인 교설이고 부정논법이며, 각론이고 백 섬들이 말이다. 또한 3승교(三乘敎) 밖의 말이고 반대 비유를 드는 말이며, 정법(淨法) 쪽에서 하는 말이다. 살아 있는 말이며 수행 지위에 있는 사람 앞에서 하는 말이다.
수다원으로부터 곧장 10지(十地)에 오르기까지 무슨 말이든 있기만 하면 모조리 더러운 법진(法塵)에 속하고, 번뇌 쪽에 포함되며, 방편교설에 속한다. 궁극적인 교설에서는 지키라(持)하고, 방편교설에서는 범하라(犯)하는데 부처님의 경지에는 지키고 범할 것이 없어 궁극적인 교설과 방편교설을 다 인정하지 않는다.
싹을 보고 토질을 알아내고 탁함으로 맑음을 분별하는데, 여기서 비추어 깨닫는 것을 맑은 쪽에서 헤아려 본다면 그 비추어 깨달음은 맑음이 아니고, 비추어 깨달음 아니라 해도 역시 맑음이 아니며, 맑지 않음도 아니며, 견해(見)도 아니다. 물이 더러우면 물이 더럽다고 말하나 물이 맑으면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으니, 말을 하면 도리어 그 물을 더럽히는 것이다.
묻지 않는 물음도 있고 설명 없는 설명도 있다. 부처는 부처를 위해 설법하지 않으니 평등한 진여법계(眞如法界)에는 부처가 없고, 중생을 제도하지도 않으며, 부처는 부처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은 참다운 복전(福田)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주관인지 객관인지 그 말을 가려내야 한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경계법(境界法)에 탐착하고 물들어 그 경계에 혹하면 자기 마음이 마왕이며, 관조[照]하는 작용[用]이 마군의 백성에 속한다.
비추어 깨달아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과 세간·출세간법에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내지 않으며, 생각을 내지 않는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으면, 자기 마음이 부처이고 관조하는 작용은 바깥 경계[客塵]에 속하는데 파도로 물을 설명하듯 만상을 관조하고도 한 일이 없다.
이렇게 고요함과 동시에 관조하면서도 현묘한 이치라고 자처하지 않으면 자연히 고금을 관통할 수 있다. 그래서 "신령함은 관조하는 일(功)이 없으나 지극한 효험(功)이 항상 있어서 어디서든 부처님(導師)이 될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중생의 분별하는 성품(性識)은 한번도 부처님의 단계를 밟은 적이 없기 때문에 끈끈하게 집착하는 성품으로 때때마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에 집착한다.
그들은 잠깐 묘한 이치를 맛보아도 약이 되지 못하며, 잠깐 틀을 벗어난 도리를 들어도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서 49일을 말없이 사유(思惟)하셨다.
지혜가 깜깜하여 무어라 설명하기도 어렵고 비유할 수도 없기 때문에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말해도 불·법·승을 비방하는 것이며, 중생에게 불성이 없다고 말해도 불·법·승을 비방하는 것이다. 불성이 있다고 하면 집착한다는 비방을 듣고 불성이 없다고 하면 허망하다는 비방을 들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불성이 있다 하면 보태는 오류(增益謗)를 범하고, 불성이 없다 하면 덜어내는 오류(損減謗)를 범하며, 불성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하면 앞뒤가 안 맞는 오려(相違謗)를 범하고, 불성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하면 희론의 오류(戱論謗)를 범한다" 고 하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중생이 해탈할 기약이 없겠고, 처음부터 말을 하면 중생이 또 말에 따라 이해를 하여 적은 데는 덧붙이고 많은 것은 덜어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설법을 하지 않고 빨리 열반에 들겠다" 고 하셨던 것이다.
그 뒤 과거 부처님 모두가 3승법(三乘法)을 말씀하셨음을 돌이켜 생각하고는 방편설로 거짓 이름을 세웠다. 본래 부처가 아닌데 그에게 부처라 하고, 본래 보리가 아닌데 보리·열반·해탈 등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가 백 섬을 지고는 일어나지 못함을 알고 우선 한 되·한 홉을 지워주었으며. 궁극적인 교설은 그가 믿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방편교설로 설명해 주었다.
그리하여 선법(善法)이 퍼져 악법(惡法)을 누르기도 하였으나 선과(善果)의 기한이 다 되면 악과(惡果)가 바로 도래하였다. 부처가 되면 중생도 나타나고, 열반에 들면 생사가 나타나며, 밝아지면 어둠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엎치락뒤치락하는 유루인과(有漏因果)로서 그것을 받기를 생각하지 않을 자가 없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거든 상대적인 개념을 끊기만 하면 되니, 어떠한 테두리도 그를 매어두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며, 가깝지도 멀지도 않다. 높낮이도 없고 평등도 없으며 가고 옴도 없다.
문자에 집착하지만 않으면 그대를 막는 양쪽 극단이 그대를 붙들지 못하여 번갈아 나타나는 고락과 엇갈리는 명암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진실된 실제 이치가 진실이 아니기도 하며 허망도 허망이 아니기도 하니, 다듬을 수 없는 허공처럼 테두리를 갖는 물건이 아니다.
마음에 조금이라도 알음알이를 낼 틈을 준다면 테두리에 메이게 된다. 또한 괘(卦)의 조짐이 금·목·수·화·토에 관할되듯 아교풀이 다섯 군데를 함께 붙여 버리듯 마왕이 자유롭게 자기 집으로 붙잡아 갈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처음선[初善]·중간선[中善]·마지막선[後善] 세 구절로 연결되어 있다. 처음에는 그에게 좋은 마음을 내도록 하는 것이며, 중간엔 좋다는 마음마저 타파해야 하며 그런 뒤에야 비로소 마지막 선이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보살은 보살이 아니니, 그래서 보살이라 한다", "법은 법이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다" 라 하니, 같은 말이다. 여기서 한 구절만을 설명하면 중생들은 지옥에 빠지며, 세 구절을 한꺼번에 설명하면 스스로 지옥에 들어갈 것이니, 그것은 부처님과는 상관없는 일이 된다.
지금의 '비추어 깨달음'이 자기 부처라는 것까지 설명하면 처음 선(初善)이며, 지금은 '비추어 깨달음'에 붙들고 머물지 않는다면 중간 선(中善)이며, 붙들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다면 이는 마지막 선(後善)이다.
이상과 같다면 연등부처의 뒷 부처에 속하니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다. 그렇다고 부처는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라고 잘못 말하지 말라.
이 땅의 초조(初組)께서 말씀하시기를, "잘 하는 것도 없고 성스러움도 없어야 성스러운 부처님이다" 하고 하셨다. 여기서 성스러운 부처란 9품(九品)의 망상꾸러기(精靈)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용·축생 등의 부류와 제석범천 이하 모든 것들은 다 신통변화를 부릴 수 있고, 상품(上品)의 정령도 백겁 고금의 일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찌 그들을 부처라 하겠는가.
저 아수라 왕은 수미산 두 개와 맞먹을 정도로 몸이 매우 크다. 그러나 제석천과 싸울 때에야 힘이 그만 못하다는 것을 알고 백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연뿌리 구멍으로 들어가 숨는다. 그들의 신통변화와 변재가 적은 것은 아니나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할 수는 없으니 절차와 등급이 느슨하여 오르고 내림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깨닫지 못했을 때를 탐진(貪瞋)이라 하고, 깨닫고 나면 부처님의 지혜라고 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옛날과 사람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옛날 하던 것(行履處)과 다를 뿐이다" 라고 하였던 것이다.